[연속기획] 공화주의와 자유 그리고 번영....한국 정치체제의 모순을 넘어서
[연속기획] 공화주의와 자유 그리고 번영....한국 정치체제의 모순을 넘어서
  • 김주성 전 한국교원대 총장
  • 승인 2018.10.26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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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촛불민주주의’가 새로운 국시(國是)라는 대한민국, 그래서 대한민국은 지금 안녕한가. ‘이게 나라냐’던 분노의 적폐청산이 법 위에 군림하는 대한민국, 그래서 ‘이건 나라인가? 빗나간 민주주의를 회복할 정치철학은 무엇인가. 자유 보수의 대안적 정치철학이 시급한 지금, 민주주의를 넘어 공화주의에 대한 새로운 아젠다가 제기되고 있다. 이에 미래한국은 보수주의 정치철학으로서 공화주의에 대한 심원한 지평과 만나기 위해 3회 연속, ‘공화주의와 자유 그리고 번영’의 공론장을 마련했다.(편집자注)

한국 정치체제의 모순을 넘어서

현대정치제도는 간단하게 민주주의로 불린다. 우리나라의 정치제도도 물론 민주주의다. 이렇게 민주주의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1917년 4월 2일 의회에서 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겠다고 천명했을 때부터이다. 그는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자신의 정부안에 목소리를 갖고자 권위에 복종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위해,” 전쟁에 참가하겠다고 선언했다.

미국은 세계 최고의 자유민주주의 국가인데, 스스로 민주주의라고 줄여서 부르기 시작했다. 이때만 해도 민주주의가 자유민주주의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당시 유럽에는 계급혁명을 꿈꾸는 사회민주주의자들(socialist democrats)이 득실거렸고, 1917년 11월 17일에는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70여 년이 지난 1989년 10월부터 민주주의의 탈을 쓴 전체주의 독재국가였던 동구권의 인민민주주의 국가들이 무너지고 연이어 소련까지 해체되었다. 세계적인 냉전이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로 끝나자, 이제 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만을 의미하게 되었다. 개념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은 마르크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세웠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 뒤에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들어왔다. 계급혁명을 포기하고 전후 자유민주주의체제에서 사회주의 정책을 펼치기로 한 것이다. 독일의 경우 전환의 계기는 1959년 11월 독일사민당이 고데스부르크 강령(Godesberger Grundsatzprogramm)을 채택하면서였다. 이 강령으로 독일사민당은 계급정당에서 대중정당으로 다시 태어났다. 계급혁명을 포기한 사민당의 정치이념을 ‘사민주의(social democracy)’로 부른다.

철거중인 레닌 동상
철거중인 레닌 동상

현 집권 세력이 자유민주주의를 꺼리는 이유

세계정치이념의 지형도를 살펴보았듯, 오늘날 민주주의로 불리는 나라는 모두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 집권세력은 우리나라의 정치제도를 자유민주주의로 부르길 꺼린다. 2018년 초 문재인 대통령이 제안한 헌법개정 초안에는 헌법 전문과 제4조에 명시되어 있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문구를 삭제하거나 수정했다. 지난 6월 교육부에서 발표한 교육과정안을 보면 역사·한국사 교과서 집필 기준에서 ‘자유민주주의’를 ‘민주주의’로 고쳤다.

왜 그렇게 고집하느냐고 물으면, 민주주의가 보다 중립적이고 넓은 개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혹시 민주주의라는 개념에 비자유적 민주주의인 인민민주주의도 포함되느냐고 물으면 묵묵부답이다. 사민주의를 포괄하기 위해서 민주주의를 고집하느냐고 물으면 대답할 듯 말 듯하다 관둔다. 앞서 살폈듯 인민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닌 전체주의이고, 사민주의는 자유민주주의의 정치체제를 받아들인 사민정당의 정책이념일 뿐이기 때문이다. 굳이 더 캐물으면, 우리나라 헌정사에서 ‘자유민주적 질서’라는 말은 유신헌법에서 처음 쓰였으므로 정통성이 없다는 것이다. 너무 비좁은 생각이다. 헌법조문에 있느냐 없느냐, 있으면 언제부터냐가 정치체제의 판단기준이 될 수 없다. 미국 헌법에는 민주주의란 말도 안 나오고 자유민주주의란 말도 없다. 그래도 미국은 대표적인 민주국가이고 자유민주주의국가이다.

집권세력이 ‘자유’라는 수식어를 싫어하는 까닭은 근본적으로 자유시장을 혐오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대학가의 민주화운동은 자유시장의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극단적인 정치이념을 추구했다. 당시 소위 NL과 PD로 나뉘어 이념투쟁을 벌였었는데, 이들의 혁명전략은 달랐지만 자본주의를 혐오하는 데는 별 차이가 없었다. 그들은 모두 마르크스·레닌의 오도된 이론에 물들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레닌은 제품을 팔기 위한 시장이나 원료의 생산지를 장악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호전적인 제국주의를 펼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었다.

진보진영의 DNA를 가지고 있기에 집권세력은 자유시장과 자유무역을 앞세우는 자유주의에 대해서 반감을 숨길 수 없다. 그들은 자유시장과 자유무역에 대한 피해의식과 민주주의에 모든 것을 거는 순정의식을 함께 가지고 있다. 최저임금인상과 탈원전 정책에서처럼, 그들은 민주주의로 시장을 통제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시장통제주의자인 셈이다. 마구잡이로 시장을 통제하다보니, 경제지표가 요즈음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지난해 상반기 36만 명이었던 취업자수 증가폭은 올해 14만 2000명으로 절반 이하로 급감했고, 설비투자는 18년 만에 최장기 감소했다. 세계 경제가 상승하고 있는데도 우리 경제는 추락하고 있는 것이다. 현 정권에 경제 성공을 기대하는 것이 무리일지 모른다.

21세기 시대정신에 어긋나는 민주주의 일변도의 정치의식을 가지고 있으니까 자유시장을 잘 다룰 리 없다. 잘 다루려면 민주주의자이면서도 자유시장의 일반 법칙을 신뢰해야 한다. 현 시대는 19세기 초중반이 아니다. 그때만 해도 민주주의자는 자유주의자가 아니었고, 자유주의자는 민주주의가가 아니었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서로 어긋났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와 자유주의자는 대부분 민주주의자가 되었고 민주주의자는 거의 다 자유주의자가 되어 있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서로 어울리고 있다. 번영과 평화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려면, 무엇보다 현대 정치제도에 대한 깊은 이해와 높은 운영능력을 갖춰야 한다. 진보진영일수록 현대의 복합정치체제에 대한 이해도가 얕아 자유주의에 대한 반감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일종의 의식 지체를 겪고 있는 셈이다.

현대정치제도는 자유주의와 공화주의 그리고 민주주의가 삼중 복합된 정치체제이다. 세 이념이 어울려 번영과 평화를 이끌고 있다. 따라서 세 이념이 어떻게 복합되어 있는지 또는 어떻게 복합운영해야 효율적인지 깊이 천착해야 한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공화주의를 매개로 결합되었다. 먼저 자유주의와 공화주의가가 결합했고, 뒤에 공화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함으로써 세 이념의 복합 체제가 완성된 것이다. 따라서 공화주의를 얼마나 풍부하게 이해하고 효율적으로 운용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운명이 좌우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진보지성들은 공화주의에 대해서는 반감이 없다. 그들은 민주화운동을 할 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외치고 다녔다. 그러기에 나름대로 공화주의와 민주공화국에 대한 이해법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이해법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공화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된 민주공화국의 현재적 의미를 새겨보자.

자유주의를 배제한 시민적 공화주의의 모순

1980년대 미국에서는 공동체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주로 1971년에 ‘사회정의론’으로 세계지성계를 떠들썩하게 한 존 롤즈의 자유주의 이론을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매킨타이어, 왈쩌, 타일러 등이 주도한 공동체주의는 한국의 지성계에 큰 영향을 줬다. 진보지성들에게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입지를 제공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존 포칵의 놀라운 주장이 나왔다. 존 로크의 자유주의 일변도로 설명되던 미국의 독립을 르네상스 휴머니즘에 연유한 공화주의로 설명했던 것이다. 그러자 포칵의 공화주의와 공동체주의가 시민적 공화주의(civic republicanism)로 합류했다.

자유주의에 비판적이던 한국의 진보지성들은 시민적 공화주의를 빠르게 흡수했다. 시민적 공화주의는 한국의 진보지성이 공화주의를 바라보는 대표적인 시각이 되었다. 시민적 공화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 테제를 확대 적용하거나, 시민적 덕성과 시민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강조하는 르네상스 시민적 인문주의(civic humanism)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시민적 공화주의의 특징은 다음 3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개인에 대한 전체의 우월성을 바탕으로 공공선의 규제된 형태인 연대감에 초점을 두고 있다.

둘째, 직관에 의해 공공선이 객관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고 상정하고 공동체가 나가야 할 목적을 미리 전제한다. 셋째, 정치 참여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자 정치적 이상이며, 동일한 이유에서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은 곧 부패를 의미한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공공선을 위해 비현실적인 정책을 마구 집행하는 현 집권세력의 정치행태들을 보면, 그들이 시민적 공화주의에 얼마나 깊이 빠져 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시민적 공화주의는 아테네의 경험을 바탕으로 반시장적인 참여민주주의의 모습을 띠고 있다. 21세기 자유시장의 시대에 풀어야 할 정치 문제가 개인의 자율성과 공공선이라면, 시민적 공화주의로는 현대정치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다.

시민적 공화주의는 선험적이고 자연발생적인 연대감을 지나치게 강조하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를 파괴하고 다양성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공화주의는 아테네 전통보다는 로마 전통이다. 고대 아테네는 계급지배의 민주주의가 풍미했던 곳이다. 공화주의 전통은 초기에 원시적으로 존재했을 뿐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테제도 아테네 민주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설정된 것으로 보고 유연하게 해석해야 한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공화주의의 전통을 고대 로마에서 찾아 개인의 자율성과 공공선을 조화시키려는 지성작업이 최근에 쏟아지고 있다. 소위 신로마 공화주의(neo-Roman republicanism)로 불리는데, ‘타인의 자의적인 의지로부터의 자유’로 정의되는 마키아벨리의 자유개념을 가지고 개체의 자율성과 전체의 공공선을 동시에 보장할 수 있는 정치 원칙을 탐색하고 있다.

신로마 공화주의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비사회적이고 이기적인 개인의 자유에 초점을 둔다. 둘째, 공공선은 선재된 것이 아니라 개인들이 함께 생활하면서 시간을 통해 구성된 공유된 선(shared goods)으로 본다. 셋째, 정치참여는 개인의 자유를 실현하고 자율성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정치참여보다는 시민들이 공적 심의를 통해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조건으로서 정치적 평등과 정치적 자유를 강조한다.

고대 로마의 정치경험을 토대로 구성된 신로마 공화주의는 21세기의 정치과제를 수행하는데 적격으로 보인다. 21세기는 자유시장과 자유무역을 앞세운 자유주의의 전성시대다. 자유주의는 18세기에 봉건체제를 몰아냈으며, 19세기에 사회혁명의 시대를 이겨냈고, 20세기에 이념전쟁의 시대를 승리로 장식했다. 이제 전 세계는 자유시장과 자유무역체제로 개편되고 있다. 신로마 공화주의의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신로마 공화주의는 개인의 자율성과 공공선을 함께 추구한다는 점에서 근대정치 체제를 구축했던 자유공화주의(liberal republicanism)와 이념지향이 같다. 둘 다 본질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지키려는 정치이념이다. 신로마 공화주의는 ‘타인에게 지배받지 않을 자유’를 우선시하고, 자유공화주의는 ‘타인으로부터 간섭받지 않을 자유’를 우선시한다. 그런데 ‘타인으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을 자유’는 ‘타인에게 지배받지 않을 자유’가 보장될 때 가치가 있다. 노예는 주인한테 간섭받지 않아도 노예일 뿐이다. 나아가 ‘타인에게 지배받지 않을 자유’는 ‘타인으로부터 간섭받지 않을 자유’를 확보할 때 완성된다. 간섭에 찌든 자유인이 어찌 자유롭겠는가? 결국 신로마 공화주의와 자유주의적 공화주의는 지향점이 같다.

자유주의적 공화주의 정치철학의 요청

자유공화주의는 자유시장과 자유무역이 태동하던 시기에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를 독특하게 결합시켰다. 새로운 정치체제를 창안했는데, 그것이 바로 대의제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대의제를 공화정으로 불렀다. 여기에서 공화정은 ‘선출된 소수의 대표에게 위임된 정부’ 또는 ‘집단으로서 인민의 참여가 완전히 배제된 정부’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공화주의의 심의성을 소수의 대표가 구성한 의회로 확보하고, 헌법에 기본권을 설정하면서 3권을 분립시켜 시민들이 정부권력으로부터 자의적 지배를 받지 않도록 했다. 헌법의 기본권은 주로 자유주의적인 자연권을 법제화한 것이다. 이렇게 대의제는 공화주의의 심의성과 비지배의 자유를 자유주의의 개인성 및 비간섭의 자유와 결합시켰다.

자유주의와 공화주의가 결합해 정치체제화되자, 헌법으로 보장된 계약의 자유를 비롯한 자유권들은 시장을 활성화시켰고 도시가 번창하기 시작했다. 부동산인 토지에 생산기반을 뒀던 봉건사회의 농촌인구들이 전통적인 인습을 훌훌 벗어 던지고 도시로 모여들었다. 동산인 자본에 생산기반을 둔 시장과 산업의 사회로 변모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힘과 지혜로 누구의 간섭도 없이 삶을 개척해야 하는 실존적인 개인으로 거듭 태어났다. 자유사회와 공화정은 봉건체제(ancien regime)의 저항을 물리치고 새롭고 풍요로운 근대세계를 만들어 냈다.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는 18세기 후반에 대의제로 결합되었고, 대의제와 민주주의는 19세기 후반에 보통선거로 결합되었다. 민주공화국이 태어난 것이다. 민주공화국에서 치러지는 보통선거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었다. 보통선거는 평등적이고 민주적이면서도 불평등하고 귀족적이다. 누구나 선거에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으므로 민주적이지만, 선거 결과로 얻는 후보의 투표수는 불평등하므로 귀족적이다. 선거로 당선된 대표들을 미국 건국시기에는 자연적 귀족(naturalaristocracy)으로 불렀다. 공화주의와 민주주의는 이중성을 지닌 보통선거로 결합되었던 것이다.

보통선거로 결합되자 민주주의의 요구들이 증대했다. 앞서 시민적 공화주의처럼 시민의 정치참여를 이상으로 삼고 극대화하려 하자 공화주의와의 연결고리가 허약해졌다. 특히 한국에서는 국가정체성을 흔들리고 시민단체들이 법제화된 국가권력을 타고 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시민단체들 때문에 정부에서 잘못된 정책을 수정하지 못할 정도다.

시민단체들의 요구는 공화주의적인 정치기제로 순화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안정과 번영을 확보할 수 없다. 21세기 자유무역의 시대에 들어와서는 시장의 동향을 더 치밀하게 파악하고 더 정교하게 대처해야 한다. 그러려면 시민단체의 직설적인 요구가 걸러지지 않은 상태로 정치체제에 투입되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정치기제로 흡수되어 걸러져야 한다. 민주주의를 재해석하고 공화주의와의 결합양식을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아테네에도 공화주의적인 대의제의 시원적 특성이 있었다. 아테네에서는 대표를 추첨으로 뽑았다. 500명의 평의회 위원들이나 700명에 이르는 행정관들을 매년 추첨으로 뽑았다. 이들은 연임이나 재임도 할 수 없었으며, 임기도 1년으로 짧았다. 그런데 추첨하기 전에 자격심사가 있었고, 임기를 마치면 고소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추첨 후보로 나설 사람들은 심각하게 자기검열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시민대표는 스스로 골라낸 사람들이기 때문에 일반 시민과 똑같을 수는 없었다. 다만 대의제에서 보다는 일반 시민과 유사성이 훨씬 높았던 것이 사실이다. 누구나 추첨으로 뽑힐 가능성이 동일했기 때문이다. 만일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대표와 일반 시민 사이의 거리감 차이로 이해할 수 있다면, 심의성을 잃지 않고 거리감을 좁히는 다양한 정치기제를 구상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시민사회의 공론장을 활성화 할수록 거리감을 좁히면서도 심의성을 높일 수 있다. 나아가 정당정치나 시민공론장에서 해소되지 않는 심각한 갈등 문제는 심의민주주의의 정치기제를 활용할 수 있다. 공화주의적인 심의와 민주주의적인 지지를 이런 방식으로 결합한다면, 개인의 자율성과 공공선을 조화시키면서 21세기 번영의 길을 개척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주의, 민주주의, 공화주의의 결합

다시 말하면 균형감 있게 자유주의와 공화주의 및 민주주의를 결합하고 효율적으로 운영할 때, 한편 개인의 자율성과 다양성이라는 조건을 충족시키고 다른 한편 자유를 향유하는 상호 호혜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으로써 민주적인 심의가 이뤄질 수 있다. 민주적 심의 과정은 갈등하는 사회적 문제들을 보다 탄탄하게 공공선을 확보하는 쪽으로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자유무역의 무한 경쟁시대에 정치안정과 국가경쟁력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아 번영의 길로 나서야 한다.

자유무역시대는 냉전시대와 다르다. 냉전시대에는 자유우방의 약소국에 대해서는 상당히 관용을 베풀어줬고, 경제반칙을 하더라도 상당 부분 눈감아 줬다. 그러나 전 세계가 자유시장체제로 통합되자 경제반칙은 누구도 봐주지 않는다. 세계자유무역체제는 무한경쟁체제이다. 현재 무한경쟁이 복잡하게 진행되고 있다. 관세부과로 무역전쟁도 불사하는 모습이다. 국가경쟁력을 단단히 갖추지 않으면 무역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그러자면 공화주의적인 정책심의를 기반으로 자유주의적인 정책창의성과 민주주의적인 정책지지를 견실하게 결합해야 하다. 민주공화국의 현재적 의미는 21세기 자유무역의 시대에 국가 번영을 구가할 수 있는 공화주의적 정치가능성일 것이다.

김주성
전 한국교원대 총장
텍사스주립대 정치학 박사
전 한국동양정치사상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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