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로 사이비를 걸러내고 인재를 알아본다"
"논어로 사이비를 걸러내고 인재를 알아본다"
  • 인터뷰·사진 고성혁 미래한국 기자
  • 승인 2018.11.08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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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범부(凡夫)들에게 논어(論語)라고 하면 떠오르는 단상은 ‘공자왈 맹자왈’이다. 허세적인 유교문화로 인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했던 지식인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논어는 그 논어가 아니’라며 2000년을 넘는 시간의 강을 건너 논어로 이 시대를 그야말로 거침없이 새롭게 조망해 보는 이가 있다. 조선일보 문화부장 출신의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논어는 그래서 무엇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을까. <미래한국>이 이한우 교장을 만났다.

- 디지털 시대에 논어를 해석한 책을 펴낸 집필 동기는?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연재를 조선일보에 싣기 시작했어요. 연재하면서 이승만의 사상적 뿌리가 뭐냐 하는 것에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죠. 연재를 끝내고 나서 책을 냈는데 그 서문에서 적혀 있어요. 이승만의 서양적 면모는 알겠는데 동양적 면모를 모른다는 것이 너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우리가 알고 있는 동양철학적인 뭔가는 아닌 것 같고 그 이상의 뭔가가 있을 것이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죠. 기자 생활을 하다가 2000년에 독일 연수를 가게 되었습니다. 독일에 갈 때는 상당히 기대가 컸습니다. ‘아 드디어 내가 사상의 나라인 독일에 가는구나’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독일에 가서 보니까 사상의 나라가 아니라 ‘기본’의 나라였습니다.

- 그럼 기본이라고 하는 것은 상식이라고 봐도 될까요?

뭐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상식보다는 ‘한 번 더’ 생각하는 것입니다. ‘한 번 더’ 생각하면 결과적으로는 굉장히 빠르게 됩니다.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나중에 보면 공평하고 공정하게 되더군요. 단적으로 예를 들면 총리 인터뷰를 한다고 하면 무조건 선착순입니다. 매체 파워고 레벨이고 그런 것이 없습니다.

우린 은행가서 번호표를 뽑는데 독일은 그런 것 자체가 필요 없습니다. 그런 사회와 우리처럼 기계로 강제하는 사회, 어느 사회가 ‘기본’이 살아 있는 사회인지는 물어볼 필요가 없겠죠. 또 하나 예를 든다면 독일 고속도로 ‘아우토반’을 비교해보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독일 아우토반은 추월차선에서 길 막고 주행하는 차는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추월하는 것도 볼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이 기본 아니겠습니까? 달리는 차는 달리고 추월하는 차는 법규대로 추월하는 것이 독일 아우토반입니다. 차가 아무리 많아도 기본이 지켜지니 문제가 될 것이 없죠. 이런 것이 기본입니다.

-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기본이 없다고 볼 수 있을까요?

아예 없다고 봐야죠. 저는 반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세월호 사고 때 문이 하나만 열려 있다고 했을 때 과연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린이나 노약자에게 길을 양보했을까요? 훈련 자체가 안 되어 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목숨이 걸려 있는데 그것이 되겠습니까?

우리나라 고속도로 보세요. 주행차선이든 추월차선이든 구분 없이 다 틀어막고 제대로 가지 못하는 수준이잖아요. 세월호 사고도 보면 그래요. 사고가 났을 때 탈출하는 질서를 잡는 룰을 가지고 있는냐 없느냐를 생각하면 우리는 부끄러운 수준이죠.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c)미래한국 고성혁 기자

논어는 리더에게 사람보는 눈을 키워주는 책

- 기본이라는 측면에서 ‘논어’하고 연결성이 있다고 보는 것인지요?

그렇죠. 사실 독일 1년 연수를 끝내고 내 머리를 지배한 것은 ‘왜 우리는 기본이 없는 사회인가?’ 하는 것이었어요. 이것이 저의 화두였어요.

그래서 생각하다가 다짜고짜 조선왕조실록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한 7년 걸렸어요. 그 와중에 출판사하고 연결되었는데 당시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는 6명을 골랐죠. 태종, 세종, 성종, 선조, 숙종, 정조를 골라서 6권으로 출판했죠.

임금도 임금이지만 실록을 읽어보면 훌륭한 재상이 많습니다. 조준, 하륜, 황희, 이준경 등인데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사람을 보는 눈이 뛰어났습니다.

사람을 보는 눈을 논어를 통해 길렀다는 내용이 실록에 나옵니다. 그래서 저도 놀랐죠. ‘논어가 그런 책인가?’ 하면서 저도 처음엔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대략 보면서 ‘아, 우리가 논어에 대해서 잘 모르는구나, 잘 못 읽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논어’가 리더에게 사람 보는 눈을 키워주는 일종의 ‘훈련소’구나 하는 생각은 실록을 읽으면서 확실하게 정립이 되었죠.

- ‘논어’를 한단어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지(知)입니다. 논어에 나옵니다. 제제가 공자에게 묻습니다. ‘선생님 인(仁)이 뭡니까?’라고 말이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지(知)는 뭡니까? 지인(知人)이다.

- 우리는 흔히 인(仁)이라고 하면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고 배우지 않습니까?

그건 3류, 맹자류, 주자로 이어지는 성리학인데 성리학은 사실 공자학은 아니라고 봐요. 광의로는 유학인지는 몰라도 공자의 유학하고 성리학하고는 오히려 대립됩니다.

지금 논어가 망가진 이유의 핵심은 바로 주자가 다 해체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한 자씩 자구해석을 하면서 오히려 맥락이나 뜻을 모르게 만든 것이죠. 논어를 공자의 말씀에 맞춰 제대로 읽으면 논어는 굉장한 ‘왕권(王權)’이론입니다.

- 그렇다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하고 일맥상통한다고 봐도 되는 것입니까?

그렇다고 무조건 왕권을 강화한다는 것은 아니죠. 기본적으로 ‘신권(臣權)’은 말도 안 되는 것이고, 왕권을 강화하되 굳세고 눈 밝은 ‘강명(剛明)한 군주’를 만드는 훈련서(訓練書)로서 논어가 만들어갈 것으로 봅니다. 실제로 한(漢)나라나 당(唐)나라 때까지 그렇게 읽혀왔고 정확하게 그렇게 해석이 되어 왔습니다. 그러다가 송나라에 와서 주자가 완전히 난도질해서 분해시켜 버린 것이죠.

- 흔히 조선시대 유교의 폐단을 말하는데 그렇다면 조선의 유교는 공자의 말씀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인지요?

조선 초 태종이나 세종 때는 이미 성리학이 들어와 있어서 일부 신하가 성리학적 발언을 하긴 했지만 정치제도적으로는 성리학이 들어올 여지가 별로 없었어요.

정치제도적으로 성리학이 들어온다는 것은 의정부나 육조(六祖)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간원 사헌부에 들어가서 정부의 말을 바로 잡아주는 쪽이었지, 조정 업무에 관여하는 쪽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조금씩 알게 모르게 전통적 유교가 성리학에 의해 잠식당한 것이죠.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저서들 / 해냄출판사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저서들 / 해냄출판사

사람답기 위해 애쓰라는 공자의 가르침

- 논어에서 제일 좋아하는 구절은 어떤 것입니까?

저는 무조건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입니다. 엄청난 구절입니다.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不亦君子乎) 이 세 구절이 논어 전체에서 3대 주제입니다.

여기서 파생되고 파생되어 나오는데 결국에는 다시 ‘학이시습지’로 돌아갑니다. 학이시습이 아니라 학이시습지인데 아무것이나 배우라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것(之)을 배우라고 하는 것인데 단순한 글(文)을 배우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넓은 의미에서 ‘사람’다워지는 것을 위해 ‘애씀’이라는 것입니다. 인문학이라는 것이 사람다워지기 위해 애쓰는 것이거든요. 맨 처음부터 공자는 사람다워지기 위해 애쓰라고 강조하는 것이죠.

흔히들 고문(古文)이라고 하니까 단순히 옛글이라고 하는데 글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예전부터 사람다워지기 위해 열렬히 ‘애쓴 분’들의 케이스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불역(不亦)에서 역(亦)자는 ‘또한’이라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라는 뜻입니다.

정말로 진심으로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권력자에 적용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권력을 잡으면 권력을 행사하고 싶지, 도리를 따르고 이것저것 가리려면 귀찮지 않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권력자의 마음에 올라오는 그런 것을 하지 말라고 제동을 거는 말입니다.

황제한테 배우고 익히기를 정말로 기뻐할 때라야 비로소 그 옆에 스승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사신이 옆에서 길을 가르쳐 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임금 자신이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아무도 그 이야기를 해 줄 수 없기 때문에 배우는 마음을 가지라고 논어 1번에다 가져다 놓은 것이죠.

- 그렇다면 대중을 상대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겠군요?

당연하죠. 일종의 제왕학입니다. 배움(學)을 즐거워하고 좋아한다는 것은 뒤에 보면 호학군주(好學君主)하고 연결됩니다. 단순히 책을 좋아한다고 호학(好學)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길을 열고 자신을 낮추고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정확히 이해하면 세종은 호학군주이지만 정조는 호학군주가 아니에요. 정조는 알려진 것과 달리 오만방자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임금임과 동시에 스승을 뜻하는 군사(君師)라고 했어요. 스스로 군사라고 하는데 누가 가서 가르쳐 주겠습니까? 이 한 구절만 보더라도 우리가 정조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죠. 호학(好學)을 한 글자로 줄이면 겸(謙)입니다. 겸손하다고 할 때 겸(謙)인데 겸(謙)으로 귀결되어야 제왕학으로서 논어를 읽어가는 기본 틀이 하나씩 잡히는 겁니다.

- 태종이 세종보다 더 위대하다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을 논어적 관점에서 독자에게 어떻게 설명하실 수 있습니까?

세종은 태종 근처에서 못 오죠. 논어에서 가장 중요한 말 중 하나가 경사(敬事)라는 말이 있어요. 이 말을 흔히 ‘일을 공경하라’고 말하는데 이건 완전히 잘못된 해석입니다. 논어에서 ‘경사’라는 말은 일을 주도면밀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일을 치밀하게 하라는 말이죠.

반대로 불경(不敬)이라는 말은 윗사람을 업신여기고 오만하고 거만하다는 뜻도 있지만 방심하고 소홀히 하는 것도 불경(不敬)이라고 말합니다. 즉, 일을 맡겼을 때 경(敬)하게 한다는 것은 끝까지 치밀하고, 조심해서 일을 완전히 성공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경(敬)이라고 논어에서는 말합니다. 결국 기본이자 근본을 말하는 것이죠.

자장이 공자에게 묻습니다. 명(明)이 무엇이냐고 말이죠. 두 가지를 이야기하는데 물이 스며들 듯이 친족들의 하소연, 사사로움을 끊어내는 것을 명(明)이라고 했습니다. 일을 공평무사하게 하고 일을 꿰뚫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태종이 처남들을 왜 죽였겠어요? 앞으로 왕이 될 아들이 외척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을 미연에 막기 위한 것이죠. 그런 측면에서 태종은 명(明)한 인물이라는 겁니다.

이런 태종의 복심을 제대로 알면 칭찬을 해야 하는데 욕을 하면 어떡해요? 우리나라의 수준이 논어의 ABC도 안 되는 상태에서 역사를 자기 마음대로 보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감성적으로 말이죠. 요즘 식으로 말하면 태종이야말로 완전히 직무(Job) 중심적 사고를 하는 인물이라는 겁니다.

이상하게 유교에서 예(禮)를 가례(家禮) 중심으로 흘러가게 했는데 잘못된 겁니다. 논어에서 예(禮)는 사리분별입니다. 일을 사사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공명정대하게 처리하는 ‘사리분별’이 바로 예(禮)이죠.

- 공자의 말씀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라는 측면에서 우리 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우선 교육의 가장 중요한 것은 자아정립(自我定立)입니다. 자아정립을 하려면 그 기본은 인간관(人間觀)이 바로 되어야 합니다. 바른 인간관을 자기 스스로 체화(體化)하는 것이 자아정립인데 우리는 그런 문제에 있어서 서양적 인간관도 아니고 동양적 인간관도 아니고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인간관인가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없어요.

그런 ‘과정’이 없는 상태에서 모여 살고 있는데 모여 살려면 룰(rule)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에 대한 공유(共有)도 없어요. 교육 자체가 완전히 무너진 상태죠. 이렇게 되면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상태’로 가게 되는 것이죠.

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각자 능력과 연줄을 이용하거나 하면서 법을 이용하는 것인데 이미 그런 상태 아닙니까?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을 어떻게 길러낼 것인가 하는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그것은 안하고 ‘약자보호’니 하면서 그런 쪽으로 가고 있는데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는 약자보호도 못하고 오히려 강자가 더 편해지는 세상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게 되면 분노만 불러 일으키면서 공동체의 룰은 점점 더 희미해져 가는 것이죠.

포퓰리즘을 경계했던 공자

- 현 정부를 논어적 관점에서 본다면?

정치에 있어서 공자가 제일 경계시킨 것은 인(仁) 중에는 ‘아녀자의 인(婦仁)’을 경계했고, 용(勇) 중에는 필부(匹夫)의 용맹을 끊임없이 공자가 경계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포퓰리즘이죠. 맹자에도 보면 아녀자의 인(婦仁)을 경계하는 구절이 있어요.

예를 든다면 홍수나서 다리가 떠내려 갔을 때 고을 원님이 마음 아파하면서 개인 재산을 털어 다리를 건널 수 있게 하니까 현자가 오히려 비판하며 ‘평소에 다리를 튼튼하게 해 놔야지 막상 다리가 홍수나서 떠내려간 후에 점수 따려고 그러느냐면서 비판했다는 것 아니에요? 이런 고을 원님의 행태가 전형적인 아녀자의 인(仁)이라는 겁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얄팍한 아녀자의 인(仁)에 현혹이 되어 일종의 화장술로 일관하고 있다고 봐야죠. 아녀자의 인(仁)이라고 해서 여자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함에 있어서 장기적이고 지속적이지 않고 대신 단기적이고 순간 순간 모면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필부의 용(勇)도 같은 맥락이죠. 근원적인 것은 생각하지 않고 표피적으로만 행동하는 것인데, 누가 아프다고 하면 끌어 안아주면서 위로하는 척하는 것이죠. 일종의 위선(僞善)입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위선(僞善)공화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위선(僞善)에 대한 문제가 논어에 나옵니다. 저도 처음엔 잘 몰랐어요. 공자는 위선(僞善)과 관련해서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는 반대로 알고 있죠.

대표적으로 이런 대화가 있습니다. 제자가 공자에게 “원한을 덕으로 갚으면 어떻습니까?”라고 하니 공자가 바로 반문합니다. “그럼 덕은 무엇으로 갚을 텐가?”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덕(德)은 덕(德)으로 갚고 원한은 곧음(直)으로 갚아야 한다”고 말이죠.

이 말은 아주 무서운 말입니다. 곧음(直)은 법(法)되고 바른길(正道)도 되죠. 서양 철학자 니체는 위선(僞善)을 망치로 깨야 한다고 했는데 내가 볼 때 공자는 위선(僞善)을 포클레인으로 깨는 것 같아요.

좌우지간 현 정부의 문제는 위선으로 귀결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제는 그 거짓도 도를 넘어서 위험할 정도인데 절대로 성공하지 못합니다. 무너질 수 밖에 없다고 봐요. 정치적 구도가 현 정부의 문제점을 받아 낼 정도만 되면 금방 전환될 수 있다고 봅니다.

- 우파의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

참 이런 말 하긴 뭐한데 마치 난파선에서 서로 선장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배가 가라앉고 있는데 말이죠. 난파선 선장하려고 난리인데 누가 기대를 하겠어요?

- 논어의 정치철학을 바탕으로 한다면 박근혜 정부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요.

저는 박근혜 정부 때도 비판을 했는데 그 이유는 교만입니다. 겸손하지 않고 오만방자했던 것 아닙니까? 현재 문재인 정부도 교만한 부분에선 똑같죠. 박근혜 정부 때도 인사 문제가 엉망이었고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조선일보에 있을 때도 비판적이었어요. 도대체 은둔 기간 18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점검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죠. 그러다가 중국 자금성에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완전히 돌아섰죠.

논어로 비추어 본 김정은, 문재인, 트럼프

- 논어를 ‘사람을 보는 눈’을 키워주는 학문이라고 볼 때 트럼프와 김정은의 사람을 보는 눈은 어떻다고 보십니까?

사람 본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죠. 트럼프는 어떻든 간에 사업을 성공시킨 사람 아닙니까? 사람 보는 눈이 없다면 사기 당하거나 하지 그렇게 사업을 성공시키지 못하죠. 기본적으로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봐야죠.

김정은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김정은이가 자기 고모부 장성택을 처형시키는 것을 보고 ‘저 놈 간단치 않은 놈이다’라고 생각했어요. 논어적 관점, 즉 권력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신하의 나라’가 되면 안 되죠.

김정은이 하는 것 보면 북한을 완전 장악했다고 봐야죠. 그런데 우리는 운동권이 장악한 신하의 나라가 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조선시대 때도 보면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왕위에 오르지만 사실상 서인세력의 힘에 의한 것이라서 서인세력의 볼모가 되잖아요.

현재도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그러다가 정조 때에 이르면 신하의 나라도 아니고 외척한테 나라를 맡기는 더 저질의 나라가 되고 말았죠.

- 앞서 거론하신 조선의 여섯 임금 태종, 세종, 성종, 선조, 숙종, 정조를 순위로 매긴다면?

태종이 그중에선 가장 완벽하죠. 꼴등은 정조이죠. 군주제 나라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 외척한테 권력이 넘어가는 겁니다.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왜 생겼습니까? 정조가 김조순한테 권력을 준 것 아닙니까? 태종은 그것을 막으려고 처남까지 다 죽였는데 신하의 나라도 아니고 외척한테 권력이 넘어가도록 내버려 둔 것은 자격이 안 되는 것이죠.

- 여담입니다만 지금까지 대한민국 대통령하고 조선시대 왕하고 연결 짓는다면?

그 부분은 예전에 글도 썼습니다만 태종은 박정희 대통령하고 스타일면에서 굉장히 비슷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인조하고 비슷하다고 봅니다. 서인세력 등에 업혀 왕이 된 사람이 인조잖아요.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은 광해군하고 비슷하다고 봅니다. 자신의 병력(兵力)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쫓겨났으니까요.

- 끝으로 한 말씀 하신다면?

사람 보는 눈을 키우는 학문이 논어라고 할 때 논어는 사이비(似而非)를 걸러내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사하지만 아닌 것을 걸러내야만 사회가 제대로 돌아갑니다. 본질을 꿰뚫고 사이비를 걸러내는 것이 정치 지도자의 최고 덕목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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