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과학은 창조주를 부정하나
현대 과학은 창조주를 부정하나
  • 인터뷰어 성영은 교수
  • 승인 2018.11.09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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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이 떠오르는 과학적 무신론 ‘규모 논증’

유럽을 중심으로 과학적 무신론 ‘규모 논증’이 새롭게 등장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창조주가 있다면 인간을 위해 이렇게 광대한 우주를 창조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는 주장이다.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는 생소한 무신론이지만, 도킨슨의 생물학적 무신론에 이어 우주론적 무신론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를 비판하는 릭 페일스(Rik Peels) 교수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 철학과 교수이면서 같은 대학의 아브라함 카이퍼 연구소에서 ‘신앙과 과학’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그는 자유대학교에서 철학, 아펠도른 신학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2012년 우트레흐트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노트르담 대학교를 방문하여 기독교 철학자 플란팅가(Alvin Plantinga)와 연구하기도 했다. 그의 글들과 책은 www.rikpeels.nl 에서 볼 수 있다. 성영은 교수(서울대 공대 화학생물공학부)가 정리했다.
 

성영은(이하 성) = 서로 이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오늘 강의 주제를 정할 때 과학을 하는 내가 비교적 쉽게 통역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규모 논증’을 주제로 정했다. 그런데 막상 보내준 글을 읽어 보니 논증도 논증이지만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에게는 아직 생소한 무신론에 관한 글인데다 인용한 저자들이나 책들 역시 한국에 별로 소개된 것들이 없어 어떻게 통역하고 소개하나 걱정을 많이 했다.

릭 페일리(이하 릭) = 한국에는 이런 주제가 아직 생소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살고 있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교회를 다니는 인구는 3%에 불과하다. 대신 무신론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이런 서유럽의 현상이 그 지역에만 한정된 얘기는 아닐 것이다. 이번 한국을 방문해 보니 한국은 아직 종교적 영향이 크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종교적 영향이 얼마나 오래 가겠는가? 서구를 휩쓸고 있는 무신론의 물결이 한국에도 곧 밀려들 것이라 생각한다.
 

성영은 교수와 릭 페일리 교수

성 = 오늘 강의 주제로 가보자. 강의를 듣지 못한 독자들을 위해 ‘규모 논증’이 무엇인지 설명해 달라.

릭 = 규모 논증은 현대과학이 말하는 우주론으로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주장이다. 현대과학은 시간적으로 우주는 지금부터 138억 년 전에 만들어졌는데도 인류는 겨우 20만 년 전에 출현했다 주장한다. 이렇게 긴 우주 역사의 0.00145%밖에 차지하지 않는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역사를 볼 때 인간을 가치 있고 소중히 여기는 하나님이 있다는 주장은 틀렸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우주의 역사를 하루 24시간으로 잡을 경우 인간은 밤11시 59분 48초 정도가 돼서야 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러므로 우주 역사의 대부분을 인간과 무관하게 또 인간을 그렇게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창조한 것을 보면 하나님이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님이 있다면 공간적으로 우리 은하에 1000억 개의 별이 있고, 그런 은하가 최고 2000억 개나 있음에도 인간을 겨우 모퉁이에 있는 하나의 별의 그것도 그 중 하나의 행성에 있도록 창조할 리가 없다는 주장이다. 더구나 이 우주의 시공간 대부분은 인간이 살기에 극히 부적합한데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이런 우주를 만들었겠느냐는 것이다.

과학으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규모 논증

성 = 규모 논증을 주장하는 대표적 인물들은 누구이고 그들의 주장은 무엇인가?

릭 = 회의론학회를 창립하고 도킨스(Richard Dawkins) 등과 무신론 운동을 펼치고 있는 셔머(MichaelShermer)는 ‘신은 왜 반지름이 137억년이나 되는, 그 중 어느 것도 실제로 사용할 수 없는 우주를 만들었을까? 엄청난 낭비에 불과하다. 신이 있다면 왜 이런 짓을 했을까?’ 하면서 규모 논증을 주장한다. 유명한 우주론자이면서 역시 무신론자인 숀 캐롤(Sean Carroll)은 이 우주의 텅 빈 공간들이나 이 우주를 이루는 기본 입자들이 철저히 생명의 존재와 무관하다면서 이 주장을 한다.

또 다른 무신론자인 영국의 철학자 에브리트(Nicholas Everitt)도 이 큰 우주, 이 오래된 우주는 유신론 가설과는 놀라울 정도로 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네덜란드 우트레흐트 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필립스(Herman Philipse)는 한 발 더 나아가 엔트로피가 최대로 되어 열역학적인 죽음에 이르고 또 무한히 팽창하여 모든 우주가 얼어붙을 미래의 우주를 봐도 이 역시 하나님이 없는 증거라 주장한다.

유신론 공격으로 대중을 흡수하는 위험한 논리

성 = 이런 규모 논증에 대응하는 것이 신앙인에게 왜 중요한가? 당신은 왜 이런 일을 하는가?

릭 = 이 세상에 악이 있다는 것은 신이 존재하지 않다는 증거라는 소위 ‘악의 논증’이나 우주의 질서나 조화로부터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목적론적 논증’과 유사한 이유에서다. 이 규모 논증으로 철학자나 과학자들이 유신론을 공격하고 무신론을 주장하는 점에서 이 논증은 우리에게 중요하다. 이 규모 논증에서 말하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무한히 크고 인간이 살기에 너무나 부적합해 보이는 현대과학이 주장하는 이 우주는 젊은이들이나 일반인들조차 무신론을 쉽게 받아들이게 할 정도로 호소력이 있어 보인다는 점에서 또한 중요하다.

맥주나 커피를 한 잔 하면서 나누는 가벼운 대화에서도 나올 만큼 우리 일상의 일반적인 내용이지만 이에 대해 기독교 철학자나 과학자들의 책임 있는 대응이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성=당신이 보기에 이 규모 논증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릭 = 이 규모 논증의 전제들이 문제다. 자세한 전제들은 강의 자료에 나오지만 규모 논증의 전제를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인간과 같은 지적이고 자유로운 존재를 창조하고자 하는 하나님이 있다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우주의 많은 부분이 인간에게 부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 하나님이 없다면 우주의 시공간의 많은 부분이 인간에게 부적합할 것이다. 셋째, 우주의 시간적 공간적 많은 부분이 인간에게 부적합하다. 규모 논증은 이런 전제들로부터 우주는 하나님이 있다는 가설보다 하나님이 없다는 가설을 더 지지한다고 결론 내린다. 내 비판은 먼저 이 전제들에 나오는 인간에게 부적합하다는 말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적인 측면으로 너무 제한해 보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 우주가 우리에게 적합한지 아닌지 판단하기에는 아직 너무 모르는 것이 많다. 우주의 세밀한 조정 작용이 하나님이 존재하는 증거라는 ‘미세조정(Fine-tuning) 논증’도 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점 중 하나이다. 필요하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이 우주 속에 살도록 적응시켜 주실 것이다. 과학기술의 끊임없는 발전은 우리로 우주에 살기에 점점 더 적합하도록 만들고 있다는 사실도 적합성 여부를 쉽게 말할 수 없게 한다. 무엇보다 첫 번째 전제가 문제인데 먼저 이 전제의 배경에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 생각이 옳은가 하는 점을 봐야 한다. 즉 시간적으로 상당히 긴 시간 인간이 존재해야만 또 공간적으로 상당한 공간을 인간이 차지해야만 인간이 가치 있고 소중하다는 생각이 옳은가 이다. 많을수록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훌륭한 요리나 좋은 음악은 적당히 있을 때 소중하고 가치가 있다.

아이가 소중하다 해서 부부들이 무조건 많은 자녀를 낳지는 않는다. 인간의 한계 때문만은 아니다. 한계가 없는 하나님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무한하신 하나님이 무한히 큰 이 우주에 인간을 가득 채우지 않으셨다 해서 인간이 소중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제하고 절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미덕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 전제에는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은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데 그것도 문제다. 가치 있고 소중하지만 볼 수 없는 것이 많다. 지성, 이성, 자유, 사랑은 보이지 않는다. C.S. 루이스가 말한 대로 “우주는 생명과는 완전히 다른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를 만족시키는 것들로 가득 차 있을지 모른다.” 오히려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는 볼 수 있는가 아닌가의 기준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차이를 만들어 내는가를 가지고 봐야 할 것이다. 인간이 소중하고 가치 있으니 이 우주에 가득해야 한다는 논리는 이런 점에서 옳지 않다. 오히려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 우주에 분명한 차이를 만들어 냈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인간이 이 우주의 유일한 지적이고 자유로운 존재라면 이 광활한 우주에서 찾기가 수월하지는 않겠지만 유일한 존재이기에 대단히 가치 있고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우주의 규모와 가치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인간의 존재 가치를 물리적인 시공간에서 차지하는 비율로 볼 것이 아니라 우주 전체에 기여하는 정도로 즉, 우주 전체의 목적과 관련하여 이해해야 한다.

성 = 그러면 하나님이 이 우주를 이렇게 거대한 규모로 창조한 목적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릭 = 성경은 인간의 창조를 아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우주를 볼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큰 우주를 창조하신 데는 인간 창조 외에 다른 목적들이 있다. 우주의 규모가 인간의 규모에 비해 너무 커서 쓸모없다 주장하지만 하나님께서 다른 목적들을 가지고 이렇게 큰 우주를 만드셨다는 점은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미적인 목적이다. 우주의 거대한 규모는 하나님의 미적 속성을 잘 드러낸다. 또한 우주의 별이나 암흑물질 자체, 우주의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발전, 혼돈과 질서 사이의 균형도 하나님의 목적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알 수는 없지만 이렇게 큰 우주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인간 스스로 믿을 수 없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목적일 수 있다. 우주가 꼭 인간 존재에 적합해야 그리고 인간과 같은 생명으로 가득차야 하나님이 있다고 보는 전제 자체가 문제가 있다. 그렇게 말할 이유가 없다.

성 = 하나님이 우주를 작게 만들었으면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것을 잘 믿을 텐데 왜 이렇게 크게 만들어 사람들로 믿지 못하게 했을까? 이 점에 대해 지금 당신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믿지 않게 한 것도 하나님의 목적 중 하나라 말했다. 이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 달라.

릭 = 미국의 요나단 셀렌버거(Jonathan Schellenberg)는 <하나님의 감추심(Divine Hiddenness)>이라는 책에서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자신을 모든 사람에게 다 드러낼 것이다. 그러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믿을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는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라 주장했다. 이 논증이 맞는가?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자신을 다 드러내지 않으신 데는 분명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 이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서 이미 잘 배운 내용이다. 내가 별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성 = 이 규모 논증에 대해 또 다른 방식의 비판은 없는가?

릭 = 규모 논증에 대해 신은 존재하지만 신의 목적이나 행위는 우리가 다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회의론적 유신론의 주장을 일부 빌려와서도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이는 기독교 철학자들이 사용한 방법이다. 보지 못하기에 추론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 그 예이다. 이를 인식적 원리 접근(epistemic principles approach)이라 하는데 미국 칼빈대학 철학과 와익스트라(Stephen Wykstra)가 주장한다. 이를 규모 논증에 적용하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적합한 우주를 창조할 이유를 찾을 수 없기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기독교 철학자인 올스턴(William Alston)이 주장한 인지적 한계 접근(cognitive limitations approach)으로도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이런 문제를 판단할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에 하나님의 목적을 다 알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인간을 겸손하게 만드는 빈약한 논리

이런 모든 것들을 고려할 때 규모 논증은 그 근거가 빈약하다. 우주의 거대한 규모나 인간이 살기에 부적합해 보이는 거대한 시간과 공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볼 것인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물음을 던지면서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성 = 이런 규모 논증에 대한 당신의 반론은 새로운 것인가? 어디서 그 해답을 찾았는가?

릭 =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런 생각들은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시편 8편에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3-5절)”라고 그 답을 말하고 있다. 신약의 로마서 11장에도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히 있으리로다 아멘 (33-36절)”에서도 같은 답을 주고 있다. 물론 이런 성경의 답은 철학 잡지에 실릴 논문에는 넣을 수 없다. 바로 출판이 거절될 것이기 때문이다. (웃음)

성 = 작년 <이기적 유전자> 등의 저자인 리처드 도킨스가 한국을 방문했는데 그에 대한 기사가 여러 신문에 크게 실렸고, 인터넷을 통해 큰 주목을 받았다. 그가 강조하는 무신론이나 반기독교는 그의 책들이 전부 번역되고 있는 한국에서 특히 그 책들을 읽는 젊은이들을 통해 그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릭 = 다음에 다시 한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으면 좀 더 오래 머물면서 도킨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도킨스 뿐 아니라 조금 전에 말한 숀 캐롤, 에브리트, 셔머, 그리고 필립스 등도 무신론을 주장하는 자기들의 생각을 책, 글, 그리고 강연을 통해 전파하고 있다.

성 = 무신론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믿고 있고 우리는 하나님이 있다고 믿는다. 이런 비판으로 무신론 주장자들의 생각이 바뀔 것 같지 않는데 왜 이런 비판 작업을 하는가?

릭 = 여기 무대가 있다 해보자. 신자가 성경을 들고 서 있다 치자. 그리고 같은 무대에 리처드 도킨스나 숀 캐롤과 같은 무신론자도 서 있다. 무대 위의 신자가 이 무신론자를 향해 무신론은 틀렸다 말한다. 그러나 무신론자는 이 신자의 말에 관심을 두거나 이 신자와 대화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 무신론자는 청중석에 앉아 있는 천 명, 아니 만 명의 청중들을 향해 무신론을 말한다. 그는 무대 위에서 비판하는 신자에게가 아니라 청중에게 관심을 두고 청중을 향하여 열변을 토한다. 그러면 이런 상황에서 무대 위의 신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무신론자가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고 비판을 중단해야 하는가? 그러면 무신론자의 말만 듣게 되는 청중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대중을 향한 무신론자를 설득해야하는 이유

성 = 성경은 창조 뿐 아니라 인간의 타락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또한 아주 강조한다. 그런데 무신론은 규모 논증에서 보듯이 기독교의 창조만을 문제 삼아 성경이 틀렸다고 한다. 이렇게 성경의 일부인 창조만 공격하는 무신론에 대응할 필요가 있을까? 그것은 오히려 그들이 제기한 문제에 끌려가는 것이 아닌가?

릭 = 물론 그렇다. 신자는 창조 뿐 아니라 인간의 타락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영원한 나라의 입장에서 전체를 봐야 한다. 무신론자들이 제기하는 그 이상을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과 대화하고 세상 학문과 교류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기본 토대에 맞춰야 한다. 그래야 대화가 가능하다.

성 = 당신이 말한 대로 박사 지도교수인 필립스는 무신론자인데 기독교인으로서 그 밑에서 공부한다는 게 어렵지 않았나? 신자는 무신론자들과 어떻게 지내야 하는가? 특히 많은 신앙인 젊은이들이 이런 문제로 고민하는 것으로 안다.

릭 = 박사과정에 들어가기 전 언젠가 필립스의 세미나를 들어갔는데 그 때 그 세미나에서 그는 자신의 저서 <과학 시대의 하나님? 종교적 이성 비판(God in the Age of Science? A Critique of Religious Reason)>의 일부를 발표했다. 세미나 후 내가 그의 발표에 대해 기독교인으로서 비판을 하자 그가 나에게 연구원으로 올 것을 제안했다. 나는 왜 연구원이냐면서 당신 밑에서 박사를 하고 싶다고 해서 그의 지도하에 박사를 했다. 그는 무신론자였지만 아주 신사였고 친절했고 성실했다. 2주에 한번 만나서 토론을 해줬고 그렇게 4년을 지도해줬다. 지금도 신앙적 입장은 다르지만 서로 인정하고 존경하면서 친구로 지내고 있다. 나는 우리가 불신자를 대할 때 그와 같은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 = 이력을 보니까 철학도 하고 신학도 했더라. 또 잘 아는 대로 부친은 구약학자이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히브리어나 헬라어 등을 잘 배웠다고 들었다. 왜 목사나 신학자가 되지 않고 철학자가 되었는가?

릭 = 나는 신학(구약신학에서 시작해 특히 조직신학)에 관심이 많았다. 조직신학을 잘 읽을 수 있었고 여러 신학자들을 잘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내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더라. 비유로 말하면 조직신학은 아주 좋은 요리였는데 내가 어떻게 요리를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신학은 좋은 도구다. 그런데 나에게는 나에 맞는 더 좋은 도구가 필요했다. 그것이 나에게는 철학이었다. 논리학이나 해석학 등이 좋은 도구였다. 아펠도른 신학대학교에 다녔지만 암스테르담에서 인공지능, 진화론, 무신론 등에 대해 들으면서 이런 분야에 기독교인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신앙인으로서 철학으로 그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기독교 철학이 좋은 소명이라 여겨 선택한 것이다.

성 = 오늘 대화 감사하다. 다음에 다시 한국을 방문할 계획이 있는가?

릭 = 아직은 없다. 기회가 되면 다음에는 한국에 좀 더 오래 머물고 싶다. 나도 감사하다.

성영은 교수는 일리노이대에서 박사를 받고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에서 화학을 가르치고 새로운 에너지를 찾는 연구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케플러 신앙의 빛으로 우주의 신비를 보다>(성약, 2011), <창세기 1장으로 본 과학>(공저, 성약, 2015)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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