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적인가? 동지인가?
일본은 적인가? 동지인가?
  •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8.11.29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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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3년 27세 나이로 통신사 서장관에 임명된 신숙주는 7개의 외국어에 능통했다. 뿐만 아니라 탁월한 외교 감각과 폭넓은 지식, 교양으로 그는 세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세종의 명을 받들어 교린(交隣)정책 차 일본으로 떠난 신숙주는 9개월 동안 일본을 돌아본 후 1471년 <해동제국기>를 기술했다.

당시 그는 영의정의 자리에 있었다. <해동제국기>는 조선에서 잊혀졌지만 그 세밀함과 정확함으로 16세기 일본에 끼친 영향은 어마어마했다. 그는 대일 외교 방향에 대해 임금에게 이렇게 고했다.

“그들은 습성이 굳세고 사나우며 칼과 창을 능숙하게 쓰고 배 부리기에도 익숙합니다. 우리나라와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고 있는데, 그들을 진무(鎭撫 : 어루만져 달램)하기를 법도에 맞게 하면 예를 갖추어 조빙(朝聘)하지만, 법도에 어긋나게 하면 곧 방자하게 노략질을 합니다...(중략)...이적(夷狄)을 대하는 방책은 외정(外征)에 있지 않고 내치에 있으며, 변어 (邊禦 : 변방을 지킴)에 있지 않고 조정(朝廷 : 올바른 정무)에 있으며, 전쟁에 있지 않고 기강(紀綱)을 진작하는 데에 있습니다.”
 

미래한국 고재영
미래한국 고재영

일본과 선린을 강조했던 외교 천재 신숙주

신숙주의 간언은 한마디로 조선이 이웃 국가로부터 안보를 도모하려면 내실과 법치에 따른 기강과 함께 선린(善隣)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숙주는 임종하기 직전에도 성종(成宗 1469~1494)에게 일본과의 화평(和平)을 잃지 말 것을 간언했다.

탁월한 외교 천재 신숙주의 이러한 진언은 머지않아 사실이 됐다. 1592년(선조25년) 임진왜란은 조선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중국의 저명한 명(明)·청(靑)史 및 조선史 연구자인 기시모토미오(岸本美緖)는 임진왜란의 원인으로 조선과 일본 간의 교역단절과 동아시아 신흥 상업 질서의 충돌을 주장해 비상한 주목을 받았다.

그에 의하면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전반의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는 명(明)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 교역질서가 해체되고 과열하는 상업의 붐 속에서 신흥의 상업 군사세력이 급속히 신장하여 생존을 걸고 충돌하는 시기’였다는 것. 조선과의 교역권을 잡는 세력이 결국 명과의 교역도 확보해 지배 세력이 된다는 의미였다. 당시 조선은 사대(事大)에만 빠져 신숙주의 교린(交隣)을 잊고 일본을 하대해 문을 닫고 있었다.

그 결과 조선은 일본의 상인들과 결합한 막부와 다이묘들을 궁지에 몰아넣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외교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적과 동지의 관계 설정에 조선은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은 그 결과였다.

류성룡은 임진왜란의 실상을 기록한 <징비록>에서 조선 장수들의 무력함과 모순으로 가득한 전시(戰時)행정체제를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왜군에 속절없이 삼켜지는 조선의 현실을 개탄했던 류성룡은 무엇보다 왜군과 맞서 싸우기 보다는 오히려 왜군 편에 선 조선 백성들이 더 많다는 사실에 한탄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 왕조에서 변한 것은 없었다. 조선 후기 3정의 문란 이후 여러 차례 시도된 체제 개혁은 실패했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자강(自彊)에 실패한 조선을 합병했다.

해방은 독립전쟁이 아니라 미국의 승리로 얻어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엄격한 반일주의 노선을 고수했다. 하지만 1961년 5·16 군사혁명으로 집권한 박정희와 혁명세력은 달랐다.

그들은 한반도가 가진 지정학적 의미를 잘 알고 있었고,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통해 ‘안보 경협’이라는 탁월한 아이디어를 성공시켰다. 한국 경제를 도약시킨 포항제철과 경부고속도로가 대일청구권자금으로 건설됐다. 한국과 일본의 정·재계 리더들은 한일 간에 분업과 경협을 통한 상호 발전을 확신했다. 500여 년전 신숙주가 말했던 교린(交隣)의 지혜를 발휘했던 것이다.
 

서로 외면하는 한일정상, 박근혜 정부는 일본과의 관계 복원보다는 중국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 연합
서로 외면하는 한일정상, 박근혜 정부는 일본과의 관계 복원보다는 중국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 연합

적과 동지의 구분에 실패하고 있는 한일관계

한일관계는 6·25전쟁 이후 ‘지정학적 안보-경제협력’이라는 구심력과 ‘식민지배-반일감정’이라는 원심력 사이에서 불안한 긴장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다 2005년 8월 당시 한일 국교정상화 교섭 관련 외교문서 공개를 계기로 한일관계는 민족주의에 경도된 과거사에 의하여 좌우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갔다.

대한민국의 좌우가 모두 반일의 포퓰리즘에 휩쓸렸다. 2012년 8월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함으로써 한일관계는 돌이키기 어려운 경색 국면으로 치달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8월 14일 한국교원대 방문에서 일왕의 방문에 대해 “‘통석(痛惜)의 염’이니 이런 단어 하나 찾아서 올 것이라면 올 필요 없다”는 말로 일본 열도를 분노로 들끓게 했다. 박근혜 정부 역시 한일관계를 복원시킬 의지는 없었다. 오히려 중국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보다 못한 미국의 반 강권으로 2015년 11월 아베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외무장관 회담을 통해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합의를 도출했고 이듬해 2016년 11월에는 이명박 정부에서 포기된 한일군사정보협정이 체결됐다.

박근혜 정부는 위안부협정이나 한일군사정보협정에 국민 설득을 하려들지 않았다. 그 결과 한일간에 벌어진 갈등은 가라앉기 보다는 더 악화됐다. 탄핵으로 집권한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정부에서 체결한 일본군위안부 문제 합의를 정면 부정했다. 그럼으로써 한일관계 파탄에 한 발 더 나아갔다.

이전 정부의 합의를 정면으로 뒤집는 한국 정부의 태도에 일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한일관계가 파탄을 넘어 종말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는 사건은 뜻밖에도 최근 대법원에서 일어났다. ‘일본의 조선인 징용자 배상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는 대법원 판결이었다. 일본과 어렵게 성사된 한일협정 그 자체가 대한민국 사법부에 의해 원천 부정되는 사건이었던 셈이다.

우리 사회의 반일감정이 단지 역사적, 민족주의적 앙금에서만 비롯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대중들의 인식 속에 끊임없이 주입되는 반일 선동에는 북한의 대남통일전선전술이 자리하고 있다는 주장이 있다. 2007년 故 황장엽 비서는 자유북한방송에 출연해 김일성의 ‘갓끈이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통일전선 전략이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봅니다. 반미, 친북세력이 강화되고 한국에서 반일, 반미 그런 세력이 계속 강화되고 있습니다. 이 반미 통일전선 전략을 세울 때 김일성은 ‘남한 정권은 갓을 쓴 정권과 같다.

그 갓 끈의 한 쪽은 미국과의 동맹이고 다른 한 쪽은 일본과의 동맹이다. 갓이라는 것은 어느 한 쪽이든 그 끈만 떼어 놓으면 입으로 불어도 갓이 날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이 통일전선 전략에서 전략적 공격 목표는 한미동맹을 약화시키고 한일 관계를 악화시켜서 미국과 한국과의 관계, 일본과 한국과의 관계를 이간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 바가 있습니다.”  -북한민주화를 위한 탈북자들의 당면 과업

김일성의 ‘갓끈이론’과 ‘반일·반미’ 쌍둥이 전략

반일과 반미가 갓의 양쪽 끈이라는 김일성의 갓끈이론은 결국 한미동맹을 와해시키는 전략으로서 반일선동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2006년 2월 북한의 ‘일제의 조선강점피해조사위원회’(위원장 리몽호) 대변인은 ‘총독부’ 설치 100년(1906년 2월 1일)을 맞아 담화를 발표하고, 남한의 각계각층에게 반미·반일 투쟁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그 주장을 잠시 살펴보자.

“지금 일본반동들은 과거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천인공노할 죄악에 대해 사죄하고 보상할 대신 도리어 식민지 역사를 찬미하고 재침야망의 칼까지 갈면서 미제의 대조선 침략정책에 편승하여 또 다시 ‘대동아공영권’의 옛 꿈을 실현해보려고 미쳐 날뛰고 있다. 이것은 우리 민족과 내외여론에 대한 엄중한 도전으로서 절대로 용납될 수 없다...(중략)...미국의 비호 밑에 식민지《총독부》를 설치하고 우리 민족의 자주권을 무참히 유린한 일제의 범죄적 역사가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남조선 인민 대중들은 반미, 반일투쟁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서야 할 것” - 2006.2.1 조선신보 보도

북한의 이러한 대남통일전술이 반미와 반일을 함께 연계하고 있다는 점은 한·미·일 3각 안보동맹의 완성을 저지하려는 의도인 것으로 해석된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쉽게 동의하지 않을 한미동맹 해체보다는 ‘약한 고리’인 한일관계를 집중적으로 타격함으로써 일본을 대한민국의 敵으로 돌리는 데 성공하게 되면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은 자연적으로 모순 관계에 빠지게 된다.

신각수 전 주일대사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2008년 이후 나빴던 북중관계가 현저히 개선되고 최근 북중러 3국 외무차관 회의가 열려 대북 제재 완화를 요구했다”며 “북방 3각이 굳건하게 짜인 셈이다. 그런데 남방 3각은 한미 간에 미묘한 이견이 존재하고 한일 간에는 관계가 좋지 않다”고 진단한다.

한일관계 속의 안보는 1965년 양국 간에 국교를 정상화함으로써 “미국을 중심으로 한국과 일본이 자유진영의 일원으로 결속하여 소련과 중국, 그리고 북한의 공산진영에 대항하는 구도”가 구축되었다. 한국과 일본은 ‘반공’이라는 자유진영의 가치 하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단결하였고, “한반도의 안전과 번영이 일본의 그것에 중대한 영향을 지니고 있다”는 소위 ‘한국조항’이 한일관계의 기본인식으로 자리 잡았다.

1966년부터 양국 대사관에 무관들이 파견되었고, 이후부터 양국의 군 수뇌부들이 격을 높여 가면서 방문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한일관계의 회복은 경제적 상호 교류와 안보 협력이라는 정확한 현실 인식 속에서 출발했지만 80년대 민주화운동의 헤게모니를 장악했던 주사파 NL 운동권은 이를 정면 부정하면서 ‘민족자주’라는 구호로 북한 통일전선전술상의 반미·반일을 성공적으로 남한 대중들에게 이식시켰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이들의 핵심 세력들이 현재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를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은 앞으로 한일관계가 악화를 넘어 미일동맹 관계를 모토로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반미운동으로 연계될 것을 예고한다.

과거 속에 갇힌 한국, 과거를 넘어서려는 일본

지난 11월 18일 문재인 대통령은 한일·일한협력위원회 합동총회에 ‘한일관계를 위해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취지의 서면 메시지를 보냈다. 서면에서 문 대통령은 “식민지 시대는 한일 모두에게 아픈 과거다. 그러나 아프다고 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며 “국이 역지사지의 자세로 정의와 원칙을 바로 세운다면 마음을 터놓는 진정한 친구가 될 것”이며 “동북아의 번영을 위해 큰 노력을 기울여 온 일본의 건설적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고 말한 것으로 청와대는 발표했다.

결국 문 대통령의 주장은 이번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의 문제도 일본이 책임지고 풀어야 한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물론 이에 대한 일본 외무성의 반응은 한마디로 ‘우려와 노력’이었지만, 아베 총리는 좀 더 다른 수를 내다보고 있는 듯하다. 아베 총리는 이보다 앞선 11월 10일 “남북 및 미북 정상 간 소통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김정은 위원장과 (자신이) 직접 만나 제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밝혔다. 틀어진 한일관계에서 북한이 새로운 변수로 떠오른 것이다.

우리가 일본에 대해 적과 동지의 구분에 실패한다면, 일본도 대한민국에 대해 그렇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쓸데없는 반일감정이 대한민국만 고립시키고 있다. 500년 전 신숙주의 혜안이 담긴 <해동제국기>를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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