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반대한다
나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반대한다
  • 원영섭 변호사
  • 승인 2018.11.29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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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가 지난 6월 대체복무가 없는 병역법 조항에 대해 위헌취지의 불합치결정을 했다. 그리고 대법원은 11월 1일 ‘여호와의 증인’ 신도인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렸다. 양심적 병역거부에 의한 대체복무의 길이 사실상 열렸다. 이제 국회는 2019년 12월 31일까지 대체복무규정을 만들어야 한다.

나는 양심적 병역거부에 반대한다. 총과 칼이 있어도, 지나가는 강아지 한 마리 죽이기 힘들다. 인간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과연 저 생명체를 죽이는 것이 정당한지에 대해 자문하게 된다. 하물며 전쟁은 사람을 죽이는 행위다. 과연 총이 있다고 해서 쉽게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누구나 사람을 향해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면, 자신의 양심과 대면하는 순간이 온다. 그러기에 ‘누구는 양심이 없어 군대가나’라는 물음은 정당하며, 병역거부를 하지 않고 입대하는 사람들의 분노는 역시 정당하다.

양심적 병역거부가 헌법재판소나 대법원을 통해 진행되는 것은 새로운 문제를 만드는 것이었다. 세계 어느 나라도 양심적 병역거부를 위헌판결을 통해 만든 나라는 거의 없다.

우리에게 양심적 병역거부가 헌법재판소의 오랜 안건으로 올려져 있어서 논의의 장이 국회가 아닌 것이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 들여졌다. 헌법재판소 판결 이후 여러 정치인이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지지발언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면 왜 그들은 입법으로 해결하지 못했나. 소송을 통해 승소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다 보니 더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논의될 수 있는 기회가 상실되었다.

이제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대향적 투쟁의 승리자가 되어 전리품을 취득한 사람이 되었다. 결국 대체복무를 포함한 양심적 병역거부가 갈등의 종식이 아닌 갈등의 시작이 되고 있다.

헌법재판소와 국회 간에 공넘기기

양심적 병역거부를 정당한 권리로 볼 것인가와 국가가 특별히 소수자들에게 베푸는 시혜로 봐야 하느냐는 그 뒤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큰 갈래다. 사실 헌재 처벌규정은 합헌 규정으로 보면서, 대체복무규정 없음을 위헌으로 보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되는 판결이다. 이는 헌법재판소가 정당한 권리와 시혜적인 조치에 대한 판단을 정하지 않고 국회에 남겨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처벌규정을 합헌으로 보았기에, 기존 양심적 병역거부에 의한 형사 처벌받은 사람들은 재심이 이뤄질 여지가 없고, 사면에 대한 논의가 있을 뿐이다.

양심적 병역거부가 정당하지 않고 대체복무가 시혜적인 조치라고 한다면, 대체복무의 범위는 입법자에 의해 자유롭게 정할 수 있다. 반대로 양심적 병역거부가 정당한 권리라고 한다면, 대체복무는 현역 입병자들과 일응의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우선 세계적으로 징병제를 실시하는 나라 중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는 45개국, 인정하는 나라는 28개국이다. 즉, 징병제를 인정하는 나라 중에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28개국은 특히 서구, 유럽 선진국에 몰려 있는데 이를 이유로 우리나라도 발전되었으니 선진국 스탠더드를 따라가자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는 그 나라의 역사와 안보 상황과 분리되지 않는다. 독일은 헌법으로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고 있는데, 이는 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가로서 전쟁 자체를 반대하는 차원에서 전후 헌법에 기재되었다. 대만은 60만의 병력을 30만으로 줄이는 과정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했다. 대만이 병력 규모를 줄인 것은 대륙통일에 대한 전략을 접고 대만 방어 전략으로 바꾸면서 육군을 줄이고 공군과 해군에 집중한 결과였다. 일반적인 유럽 국가들의 안보 상황은 우리나라에 비해 비교적 안정화되어 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과연 객관적으로 양심을 판별할 수 있을까. 대만에서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한 후 그 동안 형사처벌 되는 수에 비해 대대적으로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늘어났다. 이스라엘도 양심적 병역거부를 수단으로 한 병역 기피자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의 ‘양심’이란 어떤 사실을 인식하는 것을 넘어 그 인식한 사실에 대해 옳고 그름에 관한 판단이다. 그러기에 흔히 ‘고의’와는 다르다. 예를 들어, 살인죄의 ‘고의’는 사람을 살해한다는 인식만 있으면 족하고 ‘살인이 정당한가’까지는 묻지 않는다. 엄격한 심사를 거쳐서 한다지만, 본질적으로 심사를 통해 판명될 수 없는 사안이다.

병역거부를 양심과 비양심의 용어로 가를 수는 없다

‘양심’이라는 단어도 문제다.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용어는 병역입대자를 비양심이라고 오해하게 한다. 헌법상 ‘양심의 자유’에 나오는 그 ‘양심’이 맞지만, 일상에 쓰는 ‘양심’이라는 용어와는 사용법이 다르다. 우리가 ‘양심적인 사람’이라고 지칭할 때 그 양심은 누가 봐도 인정할 만한 사회 통례에 따르는 객관적 양심이다. 그러나 양심적 병역거부의 양심은 다른 사람의 시각을 배제한 본인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주관적인 양심이다. 법률상의 용어와 관용적인 용어 사이에 괴리가 있다. 그 때문에 양심적 병역거부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용어를 바꾸자는 이야기가 있다.

무엇보다 양심적 병역거부는 법치주의의 중대한 예외다. 고속도로에 시속 100km의 속도제한이 있는데, 100km를 넘어 가는 것이 정의라고 믿는 양심이 있고, 100km를 넘어 운전했다면, 이들을 처벌할 수 있을까? 양심의 자유가 속도제한보다 우선이라고 한다면, 처벌해서는 안 된다. 속도제한 규정이 정의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규정이 되어 버린다. 속도제한은 양심에 반해서 지킬 수 없고 다른 대체의무를 하겠다는 것은, 법 준수를 개별적으로 거래하겠다는 이야기다.

너무 비현실적인 가정을 들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럼 실제 일어나는 일들을 살펴보자. 이슬람의 명예살인은 한 가족의 가장이 가문의 수치를 준 여성을 살해하는 것이 정의라고 믿는다. 이것은 정말 그들의 신념이다. KKK단이 자행한 흑인에 대한 사보타지는 역시 그들의 신념이다.

나치의 홀로코스트가 그들의 신념과 양심에 의해 한 행동이라면, 이 모든 행위를 어떻게 처벌할 수 있나. 살인을 처벌하는 법률은 오히려 바로 저런 신념과 양심을 가진 사람들을 처벌하기 위해 필요하다. 내심의 양심이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외부에 대한 행동으로 나아가면 당연히 법적 평가의 대상이 된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법치주의를 부정하는 것이다.
 

원영섭 변호사
원영섭 변호사

만약 우리나라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한다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누구도 양심의 물음에 흔들릴 수 밖에 없다는 최소한의 공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양심적 병역거부에 의한 대체복무는 시혜적인 조치임을 인정하되, 안보에 무임승차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국민들에게 고마워하는 방향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최상이었다.

그러나 재판을 통해 논의가 진행되면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재판에 이기기 위해 대한민국을 나쁜 나라로 만드는 데 최선을 쏟았다. 어떤 대체복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그들이 이제는 논의되고 있는 양심적 병역거부의 수준도 징벌적이라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취지의 집회를 하고 있다. 이런 모습을 선뜻 이해할 국민들이 얼마나 될까.

국민들은 국가가 부여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행위에 대해 그 의도가 무엇이든 언제나 분노할 준비가 되어 있다. 냉정하게 보자면, 대체복무를 강화하는 것 말고 양심을 판단할 방법은 사실상 없다. 양심적 병역거부가 병역기피의 수단으로 악용되는 것은 진정한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도 좋지 못한 일이다.

결국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사회로부터 병역기피자나 다름없는 낮은 대접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비록 양심적 병역거부에 반대하지만, 양심수로서 그들을 인정한다. 이제 양심수가 아닌 대체복무의 길이 열렸다. 그들이 이 길을 승리자의 길이 아닌 동반자의 길로 가기를 바란다.

원영섭 변호사
서울대 건축학과 졸업
전 자유한국당 서울 관악구갑 당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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