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그 남자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 나아질 수 없는 관계를 정리하는 치유의 심리학
[리뷰] 그 남자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 나아질 수 없는 관계를 정리하는 치유의 심리학
  • 김민성 미래한국 기자
  • 승인 2018.12.19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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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남자가 날 때리는 건 아니에요.” 

모든 학대는 부당하고 위험하다. 연인이나 부부 사이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녀, 형제간,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 등 어떤 관계에서 일어나든 학대는 용인될 수 없는 행위다. 그런데 주로 여성을 상대하는 클리닉에서 심리치료사로 일하고 있는 저자가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연인 혹은 부부가 맺는 학대 관계, 그중에서도 남성이 여성을 학대하는 경우다. 물론 우리 사회에는 남편이나 남자친구를 학대하는 여성들도 있다. 그러나 친밀한 사이에서 벌어지는 육체 폭력에 희생되는 사람 중에서 상대적으로 남자보다 여자가 많다는 사실은 통계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학대하는 사람의 성별에 따른 차이가 분명히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성의 상대에게 학대를 당할 때 자신의 목숨이 상대방에게 달려 있다는 공포를 느끼는 경우는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많다. 

그런데 반드시 직접적으로 생명에 위협적인 신체 폭력을 행사해야만 치명적인 학대라고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저자는 심지어 육체적으로 당하는 학대보다 심리적으로 당하는 학대가 더 힘들다고 말하는 여성들도 많이 만나보았다고 밝힌다. 실제로 현실을 왜곡하는 능력, 책임감과 의무감의 결여, 여자를 깔보는 자세, 끊임없는 밀고 당기기 전술 등의 특징을 보이는 심리 학대를 경험하게 되면 혼란과 상처가 오래 남아 관계를 끝내고 나서도 수치심, 자책감 등에 시달릴 수 있다고 한다. 또 감정적, 심리적으로는 학대하지 않으면서 신체 학대만 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고려해봐도 심리 학대의 위험성을 이해할 필요는 충분하다. 
 

이런 이유로 심리 학대, 감정 학대의 위험성에 주목하는 저자가 이 책에서 특별히 더 자세히 다루는 것은 비열하고 폭력적인 면이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 ‘교묘한 학대’다. 저자는 교묘한 학대를 ‘눈에 보이기는 하지만 그다지 심각해 보이지는 않는 학대’라고 설명한다. 교묘한 학대는 관찰하고 감지할 수 있는데도 왠지 하찮은 일 같아서 간과하거나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이 문제다. 그뿐만이 아니다. 배우자나 연인으로부터 감정 학대를 당해도 자신이 학대를 당한다고 인식하지 못하는 여성들도 많아 징후나 증상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흔치 않다는 것도 문제다. 당연하게도, 교묘하고 은밀한 방식으로 일어나는 감정 학대를 당하는 피해자가 어떤 문제를 경험하게 되는지 역시 잘 알려지지 않는다. 

이렇게 숨어서 수면 위로 잘 드러나지 않는 폐해를 더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고 위험에서 멀어질 수 있도록 저자는 교묘한 학대에 대해 담담하고도 친절하게 상담하듯 설명해준다. 그리고 비열하고 폭력적인 말이나 태도로 상대방에게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주는 학대의 양상을 다양하게 소개한다. 수술을 앞두고 불안해하는 아내를 혼자 내버려두고 공부하러 가버리는 남편, 아내 몰래 바람을 피웠다고 고백하면서도 외려 아내의 바쁜 생활과 매력의 결여를 탓하는 남편, 약혼한 여자친구의 가족을 깎아내리는 말을 습관처럼 하면서 여자친구를 가족으로부터 고립시키는 연인, 유머를 가장하여 아내를 괴롭히면서 화를 내는 아내에게 오히려 까칠하다고 공격하는 남편 등 학대자의 유형도 가지각색이다. 사례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만성 불안, 우울증, 알코올 중독 등을 겪는다. 

‘과연 이런 것도 학대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교묘하게 행해지는 학대 역시 사람을 극도로 무력하게 만들 수 있음을 설명하면서도 저자는 거듭 강조한다. 학대하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그가 때리지는 않으니까 학대하는 건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괴로움을 애써 감내해온 이들에게는 이 책이 어쩌면 확실한 자각의 계기를 선사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가해자’가 변하는 경우는 없다. 있다면, 두 가지. 하나는 사회로부터 영원한 격리이고, 또 하나는 ‘피해자’의 대응(re/action)이 달라졌을 때다. 가해자가 처벌받는 경우는 드물고 가부장제 문화는 그들을 방관, 지지한다.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가해자가 아니라 학대 그 자체다. 가해자에 대한 의문과 관심은 트라우마를 가중시킬 뿐이다. 문제는 ‘피해자’의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 아니라 사회가 강요하는 학습된 희망(learned hope)이다. 학대와 폭력에 관한 가장 정확한 개념은 “그 남자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이다. 
-정희진(여성학자, 《아주 친밀한 폭력 - 여성주의와 가정 폭력》 저자) 

그 남자, 그 여자의 심리 분석 

이 책은 학대 관계의 형성과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심리와 성격을 분석하는 데에도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우선 저자가 학대 관계를 목격하며 발견한 공통점 중 하나나는 가해자는 책임감이 없고 피해자는 책임감이 강하다는 것이다. 이는 책 속에 소개하는 사례들에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 특징인데, 보통 학대하는 성향을 지닌 사람이 책임감을 떠안는 사람을 배우자로 고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자신이 져야 할 책임마저 상대방이 떠맡으면 무책임하게 굴며 학대까지 저질러도 상대방에 의해 관계가 유지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학대자로서는 책임감 강한 배우자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또 보통 책임감이 강하면 죄의식도 쉽게 느끼는데, 이 점을 이용해 학대자는 마땅히 자신이 비난받아야 할 순간에 오히려 상대방의 죄의식을 건드릴 만한 일을 언급하기도 한다. 

공감 능력 역시 학대 관계와 관련해서 살펴볼 만한 특징이다. 공감 능력이 풍부한 사람이 아무에게나 휘둘리지 않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채 공감 능력을 조종할 줄 아는 학대자를 만나면 위험에 빠진다. 학대 관계를 맺는 남녀 관계 중에서는 만난 지 오래되지 않았을 때 상대방이 고백하는 과거의 상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 등을 들으면서 친밀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렇게 어둡고 약한 면에 끌려 가까워지게 되면 학대 행위가 시작되어도 공감 능력이 풍부한 피해자는 가해자의 심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변화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학대자에게 기회를 더 주게 된다. 저자는 이 밖에도 싸움과 불화를 피하는 성향,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 성격 등을 가해자가 선호하는 피해자의 특징으로 지적한다. 

한편 변하지 않는 학대자에 맞서 학대를 줄이거나 멈추려고 노력해도 결국엔 실패하는 과정을 반복하게 되면 피해자는 점점 더 무기력해지고 불안해진다. 심각한 문제는 더 있다. 학대가 점진적으로 증가하면서 가해자는 확신을 가지고 상대방을 깔아뭉개는 반면 피해자는 자기 자신에 대해 의문을 갖고 학대자의 말이 진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심리 학대를 가하는 사람 중에는 상대방이 스스로 정신이 나갔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영화 <가스등>의 주인공이 보여준 행동처럼 아주 교묘하고 은밀하게 주변 환경을 바꾸어 피해자가 스스로 서서히 미쳐가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행위는 이미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라는 용어로도 일컬어지고 있다. 

상대를 해치고 자기 자신을 병들게 하는 관계가 어떤 심리에 의해 형성되고 유지될 수 있는지 설명하는 저자의 글을 읽다 보면 학대를 경험한 독자들은 물론 그저 나쁜 관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책을 집어든 이들도 관계의 폭력성에 대해 좀 더 깊고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될 것이다. 

나쁜 관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여성들에게 건네는 단호하고도 따뜻한 조언 

아무리 혼자 사는 삶이 주목받고 혼밥이니 혼행이니 떠들어대도 ‘1인분의 삶’보다는 사랑하는 이와의 동고동락을 원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이들이 누군가에게 매력을 느끼게 되면 더 친밀해지고 싶어 하고 더 친밀해지고 나면 관계의 지속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모든 관계가 항상 노력에 부응하는 모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누군가는 그저 평범하게 누군가와 함께하길 바라고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노력했을 뿐인데 결과적으로 학대의 피해자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그 경우 치러야 할 대가는 생각보다 크다. 

일단 학대를 당하며 사는 입장에서는 학대하는 사람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항상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한다거나, 그 사람의 마음에 들 수 있게 노력하는 등 자기 내면의 진심과는 상관없이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소망이나 필요는 포기한 채 이런 식의 생활을 지속할 경우 학대의 피해자는 자존감을 잃는 것은 물론이고, 결국 인생의 모든 부분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저자에 따르면 학대 관계 속에서 살아갈 때에는 분노, 화, 신랄함, 초조함, 침울함, 기이하거나 강박적인 생각이나 행동, 무기력, 만성 질환, 감각 상실, 우울증 등의 반응이 흔히 나타난다고 한다. 이런 문제를 모두 겪는 피해자도 있을 수 있다. 이렇게 끔찍한 변화를 부르는 학대를 당하면서도 혼자가 되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한 나머지 혼자가 되지 않기 위해 부당한 대우를 그냥 참고 사는 여성들도 많다. 그러나 저자는 학대를 참으면서 학대하는 사람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은 현명한 선택일 수 없다고 강조한다. 좀처럼 변하지 않는 학대자와의 관계는 일단 끝내는 게 상책이다. 아무리 한때 사랑했더라도, 아무리 관계에서 벗어나기 힘들더라도 학대 관계를 끝내는 방법은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병적인 관계에서 벗어난 뒤에는 좀 더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 

저자는 학대의 피해자가 관계에서 좀 더 수월하고 지혜롭게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 실질적 팁을 전해준다. 보통 학대자와의 사이에 아이가 있을 경우에는 관계를 정리하는 일이 더 어렵게 마련인데, 저자는 양육권을 빼앗는다는 상대방의 협박에 대응하기 위해 법적으로 도움을 구해야 할 필요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또 학대하는 남편과 헤어진 후에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여성의 사례를 보여주며 재정적으로 미리 염두에 둬야 할 점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또 결혼, 성공한 인간관계 등에 대한 정의를 다시 고민해보라고 하는 저자의 권유는 사회적 낙인이 걱정되어 관계를 쉽게 끝내지 못하는 여성들에게 힘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저자는 어떤 학대를 당하든 증거를 모아두고 기록해두는 습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가 하면, 도움을 청할 곳에 대한 검색 기록을 남겨두지 말라는 세심한 조언까지 아끼지 않는다. 

혼자 살면 외롭고 같이 살면 괴롭다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은 끊어내고 차라리 좀 더 외로워지기를 택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혼자 설 수도 있을 때 건강한 관계를 새롭게 맺을 가능성도 열린다. 오랫동안 배우자나 연인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며 살아온 여성들은 물론 일단 학대 관계에 있음을 감지한 여성, 나아지지 않는 관계로 고민하고 있는 여성 등 다양한 처지에 놓인 이들에게 이 책은 든든하고 세심한 지침서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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