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근대 열강 반열에 올린 ‘英日동맹’
일본을 근대 열강 반열에 올린 ‘英日동맹’
  • 고성혁  역사안보포럼 대표
  • 승인 2018.12.20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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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동아시아 질서를 송두리째 변화시킨 사건은 단연코 청제국과 러시아를 굴복시킨 일본의 전쟁이었다.그 누구도 극동의 섬나라 일본이 대청(大淸)제국과 19세기 유럽의 신흥강국 러시아와 싸워 이기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하물며 무능하기 짝이 없고 국제 정세에 무지했던 구한말의 조선 왕조와 엘리트들이 그런 상황을 예상하리라는 것은 기대할 수 조차 없었다.일본은 어떻게 이 두 강대국과 전쟁에서 조선의 예상을 뒤엎고 승리할 수 있었던가?

그 배경은 일본의 근대화된 힘과 전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무엇보다 ‘적과 동지’라는 국제질서에서 일본은 정확하게 누구와 동지(동맹)가 될 것인지를 제대로 판단했던 외교적 성공이 승리의 원천이었다고 할 수 있다.공권력이 불법에 대해 어쩌지 못하는 상황은 나라가 망하는 전조(前兆) 증상이다.

불과 130여년 전 이 땅 구한말 조선이 그랬다. 동학란이 일어나자 조선 조정은 속수무책이었다. 관군이 오히려 얻어맞고 수세에 몰렸다. 관군은 그렇게 동학군에 밀려 쫓겨났다. 결국 조선 조정은 동학란 진압을 상전인 청나라에 요청했다. 

청나라가 군대를 파견했다는 소식은 일본에 바로 알려졌다. 임오군란 후 맺은 톈진조약에 따라 청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면 일본 역시 자동으로 조선에 출병(出兵)할 수 있었다. 결국 동학란은 청나라가 일본을 이 땅에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요코스카항에 있는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도고헤 이하치로 제독 동상과 미카사 전함.
요코스카항에 있는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도고헤 이하치로 제독 동상과 미카사 전함.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장(勝將) 도고 헤이하치로

청나라와 일본이 처음 맞붙은 것은 육지가 아니라 바다였다.  조선에 출병하는 청나라 북양함대는 정여창이 이끌었다. 북양함대에는 순양함 제원(濟遠), 포함 광을(廣乙), 연습선 위원(威遠), 운송선 조강(操江)호 외에 병력을 수송하기 위해 영국 상선 3척도 포함되어 있었다. 영국 깃발을 마스트에 내건 고승(高陞)호에는 청군 1116명이 승선해 있었다. 북양함대의 조선 출병 소식을 일본은 이미 알고 있었다. 청나라 안에 일본 첩보 조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함 15척, 어뢰정 6척으로 구성된 연합함대는 7월 23일 일본 사세보항을 떠나 조선으로 향했다.

드디어 운명의 1894년 7월 25일 새벽 순양함 제원과 포함 광을호는 이미 아산만에 병력을 상륙시키고 중국으로 귀항(歸航) 중이었다. 그러나 일본 연합함대 소속의 요시노(吉野)·나니와(浪速)·아키츠시마(秋津洲) 등 순양함 세 척은 귀항(歸航) 중인 북양함대를 발견하여 포격을 개시했다. 제원호와 광을호는 침몰했다. 그렇게 풍도 앞바다에서의 청일전쟁은 시작되었다. 

문제는 영국 선적 고승호였다. 나니와함은 고승호에 정선명령을 내리고 영국인 선장 갤러워시에게 국제법에 따라 나포하겠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고승호에 승선한 청군(靑軍)은 영국인 선장을 위협하여 계속 항진할 것을 요구했다. 4시간에 걸친 대치 끝에 나니와함은 영국 상선 고승호에 포격을 가해 결국 침몰시켰다. 그렇게 풍도 앞바다에서 고승호는 청국 병사와 함께 수장되었다. 나니와마루는 영국인 선장과 선원만 구출했다.

영국 상선을 격침한 것은 외교적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영국 상선 격침 소식에 가장 놀란 이는 다름 아닌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영국마저 일본의 적이 될까봐 전율했다. 이토는 도고헤이하치로를 파면하고자 했다. 그러나 해군의 실력자인 야마모토 곤노효에가 이토 수상을 가로막고 나섰다. 

도고헤이하치로는 영국상선학교 출신으로 국제법에 정통하기 때문에 국제법에 따라 교전했음을 이토 수상에게 말했다. 국제법상에 교전 당사국의 적군이 승선한 이상 상선의 지위를 가질 수는 없었다. 국제법에 근거한 일본의 외교적 노력에 영국은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외교적 처리는 북경대리공사 고무라 주타로가 맡았다. 영일동맹과 러일 강화조약인 포츠머스조약, 미일통상항해조약 모두 고무라 주타로의 손에서 이뤄졌다. 그는 외교적으로 일본을 열강의 반열에 올린 인물이다. 일본 해군에 도고헤이하치로가 있었다면 외교에는 고무라가 있었던 것이다.

러일전쟁을 보는 당시 세계의 시각. 일본이 러시아를 이길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다.
러일전쟁을 보는 당시 세계의 시각. 일본이 러시아를 이길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다.

러시아의 팽창에 맞서서 영일동맹 맺다

청일전쟁 승리로 일본 전국은 열광했다. 패전한 청나라는 일본에 2억냥이라는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전리품은 조선이라는 나라였다. 시모노세키조약 제1조는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한다. 당시 일본의 인식은 조선은 청의 속국이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의 외교권을 좌지우지 했던 것은 청나라였고 조선은 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2조는 청국은 요동반도(遼東半島)와 타이완(臺灣) 및 펑후섬(澎湖島) 등을 일본에 할양한다로 명시했다. 시모노세키조약 제 2조가 문제가 되었다. 요동반도가 일본에 귀속되는 것에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반대하고 나섰다. 서구 열강의 힘에 일본은 결국 요동반도를 다시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1895년 ‘삼국간섭’이다. 가장 큰 압력을 가한 나라는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요동반도를 차지하면서 여순항을 요새로 만들었다. 러시아는 1896년 동청철도 부설권과 남만주철도 부설권을 따내면서 시베리아 철도와 연결시켰다. 극동으로 러시아군을 신속하게 투입할 수 있는 기반을 닦은 것이다.

삼국간섭에 청일전쟁의 승리는 빛이 바랬다. 러시아의 입김은 만주를 넘어 조선까지 넘어왔다. 러시아의 말 한마디에 일본이 무릎을 꿇는 것을 본 조선의 고종과 민비(후에 명성황후로 추존)는 러시아로 급속히 기울어졌다. 

1895년 을미사변(민비시해사건)과 아관파천도 국제 역학적 관점에서 보면 러시아의 조선에 대한 세력 확정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의 대응책이었다. 러시아의 힘에 짓눌린 일본은 동맹이 절실했다. 일본 혼자서는 러시아를 상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팽창에 화들짝 놀란 것은 일본만이 아니었다.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은 크림반도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러시아와 충돌했다. 러시아가 부동항(不凍港)을 찾아 극동으로 세력을 넓히는 것에 특히 영국은 위협으로 느끼고 있었다. 만주와 조선까지 러시아의 힘이 미치자 영국은 1885년(고종 22년) 3월부터 2년간 거문도를 무단 점령하고 주둔했다. 여순과 블라디보스토크의 러시아함대를 견제하기에 딱 좋은 장소가 거문도라고 영국은 판단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찾은 동맹은 바로 영국이었다. 일본은 영국의 자본과 기술이 필요했다. 영국은 동아시아에서 러시아를 막는 데 대리인이 필요했다. 그 대리인은 바로 일본이었다. 일본 덕분에 영국은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게 러시아라는 공통의 적에 맞서서 1902년 영일동맹이 체결했다. 영일동맹 체결에 반대한 인물도 있었다. 다름 아닌 이토 히로부미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추밀원 의장으로 메이지 천황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 이토는 영일동맹이 러시아를 자극할까봐 우려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천황의 재가를 받아 러시아 니콜라이2세를 알현했다. 러시아와의 전쟁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토의 교섭은 실패로 끝났다.

이러한 이토 히로부미를 카스라 내각 대신들은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르는 ‘늙은 너구리’라고 조롱했다. 외교파인 이토의 입김은 더 이상 일본 정치에 작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 대신 일본 육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반러시아파가 일본 정치를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카스라 내각의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는 이토 히로부미를 일컬어 러시아를 지나치게 무서워하는 공로병(恐露病) 환자라고 부를 정도였다. 우리는 이토 히로부미를 한일합방의 원흉이라고 칭하지만 실제로 한일합방을 실질적으로 추진한 것은 이토가 아니라 카스라 내각이었다. 

일본 카스라 내각의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외무대신은 러시아에 조선과 만주를 교환하는 이른바  조만교환론(朝滿交換論)을 제시하면서 조만 국경 중립지대 설치를 제안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회답은 만주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이 조선 북부의 중립지대화 및 조선 영토의 군사적 사용 금지 등 조선 북부지역까지 러시아 세력으로 만들 생각을 노골화하면서 러·일간 외교 협상도 무산되었다.

메이지 천황도 어쩔 수 없이 러시아에 대한 개전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은 러시아 함대에 맞서기 위해 영국으로부터 최신 함정을 도입했다. 일본 연합함대의 대부분은 영국에서 만들어졌다. 도고헤이하치로의 기함인 미카사(三笠)함도 영국에서 건조했다. 당시 일본 총예산의 절반 이상이 군비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부족했다. 1904년 일본은행 부총재 다카하시 고레키요가 런던으로 건너갔다. 전비를 조달하기 위한 일본 국채를 팔기 위해서다. 그러나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할 것이라고 믿는 영국 금융가는 없었다. 그런데 뜻밖의 인물이 나타났다. 미국의 금융인 ‘야콥 시프’였다.

세계정세에 까막눈 이었던 구한말의 한국을 풍자한 그
세계정세에 까막눈 이었던 구한말의 한국을 풍자한 그림

로스차일드 가문의 유태인 야콥시프, 일본 국채 절반을 매입하다

영국도 아닌 미국인 야콥시프가 일본이 발행하는 공채의 절반인 5000만 엔을 사겠다는 제안이었다. 다카하시 고레키요는 야콥시프를 만났다. 유태인 야콥시프는 MA로스차일드 가문 에이전트로서 미국의 금융을 쥐락펴락하던 인물이다. MA로스차일드는 야콥 시프를 미국에 보내 유대계 금융회사인 ‘쿤롭’에 투자해 사업을 시작하게 했다. 야콥시프는 유럽의 MA로스차일드 가문을 대표해 뉴욕 증권시장과 기업체에 대한 대출 업무를 시작해 월가와 미국의 경제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JP모건도 사실상 야콥시프가 조정하는 대로 MA로스차일드의 자금을 받아 움직였다. 철강산업의 카네기, 석유산업의 록펠러, 철도산업의 해리먼 모두가 MA로스차일드 자금으로 성공한 사람들이다.

그런 유태인 금융인 야콥시프가 왜 러일전쟁에 일본을 사실상 재정적으로 지원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재정러시아의 유태인 학대 때문이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가 유대인에 대해 강력한 탄압 정책을 취한 것은 1881년 3월 1일 로마노프 황실의 짜르(Czar) 알렉산드르 2세가 유대인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암살된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런 까닭에 알렉산드르 3세는 반유대 정책을 통해 유대인에게 무자비한 박해를 가했다. 제정 러시아 짜르 니콜라이 2세는 1905년 러시아 내 모든 유대인에 대한 강제 퇴거 명령을 지시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러시아에 거주하던 500만 유대인은 러시아를 떠나 신대륙으로 대거 이주하게 되었다.

유대인에게 러시아의 짜르 체제는 같은 하늘 아래 살수 없는 원수나 다름없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유럽 내 반러시아 조직에 자금을 몰래 지원하고 있었다. 그런 유태인 야콥시프에게 일본은 러시아 짜르 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가장 적합하게 보였다. 그래서 일본 국채의 절반을 사들이게 된 것이다. 일본은 영일동맹과 함께 미국의 유태인 자본까지 끌어들인 셈이다. 미국의 유태인 자본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까지 일본 편에 서게 했다.

역사의 아이러니일지는 몰라도 유태인의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은 현재까지 유효하다. 1970년대 오일 쇼크 때 중동 산유국의 압박 때문에 박정희 정부는 이스라엘과 단교했다. 그 결과 미국 유태인 사회는 反박정희로 돌아섰다. 코리아게이트라 불리는 ‘박동선 게이트’도 배후에는 미국 내 유태인이 있다는 ‘설’이 있을 정도다. 북핵 문제에 대해서도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라는 다름 아닌 이스라엘이다. 용천역 폭발사고와 시리아 핵시설 폭격도 이스라엘 작품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유태인 사회와 한반도는 ‘역사의 끈’으로 묶여 있는 듯하다.

발틱함대의 무덤이 된 동해 

1904년 2월 8일 일본의 여순 기습공격으로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일본은 5월초 압록강 연안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한 데 이어 6월에는 만주에 15개 사단을 거느리는 만주군일본총사령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8월 랴오양(遼陽) 부근 전투, 10월 사허후이전투(沙河會戰鬪), 1905년 1월 헤이거우타이전투(黑溝臺戰鬪), 뤼순의 203고지 전투, 1905년 3월 펑텐전투(奉天戰鬪) 등에서 일본군은 악전고투 끝에 승리를 거둔다.

만주군 3군 사령관 노기마레스케(乃木希典)는 여순공방전에서 두 아들을 잃었다. 2군 소속 육군 소위로 출정했던 장남 노기 카쓰스케는 5월 요동반도의 남산 전투에서 사망했다. 3군 소속의 육군 소위로 11월의 3차 총공격에 참여했던 차남 노기 야스스케도 전사했다. 노기 장군은 여순 러시아 요새를 향해 정면 육탄 돌격전을 감행하면서 막대한 병력 손실을 입었다. 러시아군의 맥심 중기관총에 뤼순 고지는 일본군 시체로 덮였다. 노기마레스케 3군의 혈투 끝에 여순항을 내다보는 203고지를 점령하면서 러일전쟁은 분기점을 맞았다.

요동의 러시아군을 지원하기 위해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이끄는 발틱함대가 1904년 10월 15일 리예파야항(港)을 출항했다. 전함 8척 등 각종 군함 34척과 공작선 ·병원선 등을 포함한 38척의 대 함대가 극동을 향해 출격했다. 그러나 발틱함대의 여정은 험난했다.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없었다. 영일동맹을 맺은 영국은 러시아 발틱함대의 수에즈 운하 통과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발틱함대는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가는 가장 먼 항로로 항해해야 했다. 중간에 석탄을 보급받기 위한 기항지 입항도 영국은 거부했다. 해상에서 석탄을 보급 받아야 했다. 문제는 신선한 채소 등 부식 보급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 결과 발틱함대 선원들 중 상당수가 비타민 부족으로 괴혈병에 시달려야 했다.

도고 제독은 쓰시마 해협으로 발틱함대가 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경남 진해만에 있던 연합함대가  드디어 출격했다. 1905년 5월 27일 발틱함대를 발견한 도고의 연합함대는 일제히 불을 뿜었다. 전투 결과 러시아 함대 발틱함대는 전함 6척을 포함한 16척이 격침되고, 5척이 자침했으며, 6척이 나포되고, 6척이 중립국으로 도피했다. 무사히 자국 항에 도착한 것은 순양함 1척과 구축함 2척으로 총 3척에 지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최근 울릉도 앞바다에서 보물선으로 이목을 모았던 돈스코이함도 쓰시마해전에서 침몰한 발팀함대의 함정이다. 현재도 러시아 함대는 동해를 지날 때면 발틱함대를 기리는 행사를 거행한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조선에 대한 평가

러일전쟁을 다룬 시바료타로의 ‘언덕위의 구름(坂の上の雲)’에는 러일전쟁의 의미를 이렇게 묘사했다. “여순 공격은 메이지 유신 후 근대화를 서두른 일본인에게 있어서 처음으로 ‘근대’라고 하는 무서움에 접했던 최초의 체험이었다. 요새(要塞) 그 자체가 ‘근대’를 상징하고 있다. 그것을 알아가는 것을 일본인은 피로써 대가를 치렀다.”

영국과 미국을 얻은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했다. 고무라 주타로와 하버드대학 동문인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도 한반도의 일본 지배를 승인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 조선을 평가 절하했다. 1905년 1월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헤이 국무장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한국인들을 위해서 일본에 간섭할 수 없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을 위해 주먹 한 번 휘두르지 못했다. 한국인들이 자신을 위해서도 스스로 하지 못한 일을 자기 나라에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을 위해 해주겠다고 나설 국가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면서 일본의 손을 들어줬다. 

만약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현재의 대한민국을 보더라도 똑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천안함, 연평도 포격을 당하고도 우린 주먹 한번 휘두르지 못했다.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김정은 칭송하는 단체가 광화문 한복판에서 떠들고 있다. 미국이 서서히 한국을 버리는 모양새다. 스스로 지키지 못하면서 적에게 굽실거릴 나라를 도와줄 미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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