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 자유를 향한 긴 여정....큰 정부는 반드시 실패한다
[특별연재] 자유를 향한 긴 여정....큰 정부는 반드시 실패한다
  • 허화평 전 국회의원
  • 승인 2018.12.31 10:5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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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자들은 미국의 AEI(American Enterprise Institute, 미국기업연구소), THF(The Heritage Foundation, 헤리티지 재단) 같은 연구소를 출범시켜 민주당 정부의 큰 정부 정책을 비판하고 공화당 정부의 작은 정부 정책을 옹호하면서 루스벨트 이래 미국 정치, 경제, 사회를 지배해왔던 케인즈주의 흐름을 역전시키는 데 성공했고, 영국병을 고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 중심 대외교역 정책을 펴고 영국이 EU 탈퇴를 시도하고 반이민 정서가 점증됨으로써 글로벌화가 주춤거리는 현상을 보이고 있으나, 이것은 한때 현상일 뿐 거대한 역사의 물결을 막을 수는 없다.

한국의 다수 지식인들이 2008년 월가의 금융위기를 신자유주의에 의한 글로벌화 탓으로 돌리면서 미국의 자본주의 체제가 파탄 난 것처럼 경솔한 비판을 했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 미국중앙은행(FRB)의 장기간에 걸친 방만한 저금리 통화 정책과 일반 국민의 주택 구입을 장려한 정책, 특히 주택 담보부 대출(모기지, Mortgage) 확대가 부동산 거품을 초래했고, 이 거품이 꺼지면서 월가 주식시장이 폭락한 일시적 현상이었을 뿐이다.

그 후 미국 자본주의 체제는 파탄 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모습으로 건강을 회복하고 지금은 선진국 중 가장 잘 나가는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트럼프는 취임하자마자 감세와 규제 완화 정책을 추구하면서 자국 기업에 활력을 불어넣는 전형적인 작은 정부, 자유시장경제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장하성 교수가 자신의 저서 <한국 자본주의>에서 꼬집고 있는 것처럼 개념 조차 정리되지 않은, 영국의 대처 행정부와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가 채택했던 한때의 정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1938년 이래 구미의 자유주의 지식인들의 치열한 노력에 의해 정교하게 다듬어진 사상이자 20세기 후반 글로벌화 물결을 일으킨 사상이며, 교역과 번영, 자유와 평화라는 인류의 소망을 전파한 사상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오해는 자유주의 사상 교육 부재가 불러 온 것

그간 한국 대학에서는 신자유주의 사상과 이론을 체계적으로 가르친 바가 없었고 일반 사회에서 제대로 소개된 바도 없었다. 그러면서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비판하고 있다.

특히 현실 참여 좌파 지식인들이 2008년 국제 금융위기 이래 대중 정서를 자극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 하면서 한국 사회는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시장만능주의 정책으로 인해 ‘가진 자 1% 대 갖지 못한 자 99%,’ 즉 ‘1% 대 99%’ 양극화 사회가 되었다는 유령을 만들어 내고 자유주의 체제, 즉 자유시장경제를 비판하면서 경제민주화를 주장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있다. 그 선두에 장하성 교수가 있다. 그가 책에서 케인즈주의에 입각한 보편 복지 단계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가장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사회가 한국 자본주의의 현실이라고 한 것은 날조에 가까운 과장이다. 1948년 건국 이전에 한국 자본주의가 존재했었다고 말할 수 없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경제는 식민지수탈경제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고 이조 500여 년은 이씨 왕실만을 위한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만큼 자본주의라는 용어 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춘원 이광수가 1922년 5월, 종합지 개벽(開闢)에 발표한 ‘민족개조론’에서 상업 발달은 보잘 것이 없었다고 하면서 “조선 민족은 적어도 과거 오백년간은 공상과 공론의 민족이었습니다. 그 증거는 오백년 동안 민족 생활에 아무 것도 남겨놓은 것이 없음을 보아 알 것입니다.…현재의 조선인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보는 전등, 수도, 전신, 철도, 윤선(輪船), 도로, 학교 같은 것 중에 조선인이 손수 한 것이 무엇입니까.…산업기관이라고 자본을 총합하여도 일천만원도 못 되는 구멍가게 같은 은행 몇 개가 있을 뿐이외다”라고 썼다.

일부 학자들이 조선조 말 일제강점기에 자본주의 맹아가 있었다고 아전인수 격으로 주장하지만 설득력이 약하고 민족주의 사관을 지닌 학자들은 식민지근대화론을 결코 수용하지 않고 있다. 또 춘원은 조선의 지식계급은 허장성세병을 지녔고 공상과 공론이 조선 명사의 특징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좌파 지식인들이 1965년 한일협정을 두고 박정희 정권이 대한민국을 헐값에 팔아넘긴 것처럼 주장하지만 비판을 위한 비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1965년은 일본이 1945년 패전국이 되어 잿더미에서 일어선 지 겨우 20년 되던 해였고 국가 GDP는 909.5억 달러, 국민 1인당 GDP는 919.78달러였으며, 대한민국의 GDP는 31억 달러, 국민 1인당 GDP는 110 달러, 정부 예산 규모는 3억 달러에 불과했다. 일본은 가난한 국가였고 우리는 빈곤한 국가였다.

한일협정이라고 불리는 ‘한일 기본조약’의 부속협정인 ‘청구권,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근거하여 무상자금 3억 달러, 장기 저리 정부차관 2억 달러, 3억 달러 이상의 상업차관을 포함한 8억 달러 자금 지원을 받았다. 당시 일본으로서는 능력 범위 안에서 최대한의 지원을 한 것이고 한국으로서는 최대한의 도움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일제 식민통치 36년을 금전으로 환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대한민국은 그 돈을 종자돈으로 하여 POSCO를 건설했고 산업화 시동을 걸 수 있게 되었다.
 

큰 정부하에서는 정상적인 법치주의는 무의미하게 되며 필연적으로 파시즘을 부르게 된다.
큰 정부하에서는 정상적인 법치주의는 무의미하게 되며 필연적으로 파시즘을 부르게 된다.

후진국 수준에 머물고 있는 한국의 자유자본주의

1965년 이후 1997년 외환위기가 닥칠 때까지 32년은 60년대에 시작한 산업화 마무리와 민주화라는 정치적 격동기를 거친 기간으로서 제대로 된 자유자본주의 체제, 정상적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갖춘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자본주의 체제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영국의 경우 수백 년이 걸렸다. 이제 우리는 압축성장이라는 비정상적 성장단계에서 발생한 모순들을 해소하고 정상적 자유자본주의 체제, 정상적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갖춰야 할 단계에 와 있다.

한국의 자유자본주의 체제는 후진국 수준이고 자유시장경제 체제는 국가시장경제, 관치시장경제 수준에 머물고 있다. 350여 개 회원사, 1000여 개 업체, 5만여 명을 고용하고 있는 주한 유럽상공회의소는 2018년 11월 발표한 규제 백서에서 한국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갈라파고스 규제 국가”라고 규정했고 주한 미상공회의소는 “한국 공정거래위원회는 조사 대상 기업인 모두를 범죄자로 취급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장하성 교수는 우파 지식인들이 주장하듯 규제과잉국가가 아닌 규제결핍국가라고 단언하면서 경제를 시장에만 맡겨둘 수 없다고 강변하였다.

잘못된 근거가 잘못된 이론을 낳고 잘못된 이론이 잘못된 정책을 낳고 잘못된 정책은 반드시 실패한다는 것은 인간 세계의 경험이자 상식이다. 장하성 교수는 책의 결론 부분에서 경제 문제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소득불평등을 완화하고 양극화를 해소하는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는 차원을 넘어 모두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함께 잘 사는 공동선을 실현하고 모두에게 공정하고 평등한 기회가 주어지고 공정한 경쟁이 펼쳐지는, 절차상의 정의 뿐만 아니라 공정한 분배와 적극적인 복지를 통해서 결과의 정의도 함께 실현하는 정의로운 자본주의가 한국이 추구해가야 하는 자본주의다.”

이것은 장하성 교수 개인의 경제윤리 매니페스토(manifesto)이자 좌파 지식인·정치인들의 경제 매니페스토라고 할 수 있다. 공정한 분배란 결과적 평등 분배를, 적극적인 복지란 보편 복지를 의미하고 결과의 정의란 그가 말하는 분배 정의를 의미한다. 그가 비록 자본주의라는 단어를 포함시키고 있지만 실제 내용은 자유자본주의와는 거리가 먼 평등주의적 논리이자 사회주의적 논리에 가깝다. 장하성 교수의 논리는 큰 정부가 주도하는 국가주의, 공동선을 중시하는 공동체주의, 결과적 평등 분배를 정의로 하는 평등주의 논리이고 개인주의와 경쟁을 바탕으로 삼는 자유자본주의, 즉 자유시장경제 포기 논리이다. 이는 곧 대한민국이 건국 이래 견지해 온 자유주의 경제 체제를 비자유주의적 경제 체제로 바꾸자는 변혁 논리다. 이것은 자유주의 헌법을 비자유주의 헌법으로 바꾸는 것 만큼이나 심각한 문제가 된다.

“국가가 국민의 삶을 책임질 것이며 모두가 다 함께 잘 사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가겠다는 현 정부의 국정 노선은 장하성 교수 논리와 다르지 않고 2012년 대선을 앞둔 2011년 12월 16일 통합민주당(더불어민주당 전신)이 채택한 당 강령 및 정강정책 노선 연장선상에 있음을 볼 때, 현 정부에 의한 한때의 정책 노선이 아니라 좌파 정당으로서 일관된 정책 노선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파 정당들의 기회주의적 변덕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17년 1월 당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
2017년 1월 당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

큰 정부는 파시즘을 부른다

자유주의 체제와 평등주의 체제의 근본적 차이는 전자가 개인주의와 경쟁을 중시하는 데 비해 후자는 집단주의와 결과적 평등 분배를 중시하는 데 있다. 집단주의 체제에서는 국가, 즉 정부가 공공선과 사회 정의를 내세워 국민의 삶 전체와 개인의 삶을 통제한다.

이 경우 국가가 국민의 삶을 책임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개인의 자유는 허용되지 않는다. 자유주의 체제에서 국가, 즉 정부의 기본 책무는 법치에 의하여 국민 개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자유민주주의 원리에 따라 국민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 행복추구권을 보장하며 자유시장경제 원리에 입각하여 경쟁을 통한 시장 기능을 극대화한다.

이 경우 개인이 개인의 삶을 책임지게 된다. 국가가, 정부가 국민의 삶을 책임지겠다는 것은 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를 시장 기능에 맡겨둘 수 없다고 하고 재정 확대를 통하여 국가 재정으로 일자리(주로 공무원, 공공기간 요원)를 만들고 증세를 통하여 보편 복지와 분배 정의를 구현하겠다고 주장한다. 이것을 계획하고 통제하고 실천하는 것은 정치인들과 관료들이다.

정부 역할이 커질수록 분배 정의와 사회 정의를 구현하려면 세 가지 조건이 반드시 갖춰져야 한다. 정치인들과 관료 집단의 청렴성과 정직성이 전제되어야 하고 국가 운영에서 투명성이 이뤄져야 하며 법치주의가 확립되어 있어야만 한다. 우리의 경우 이 세 가지 조건 전부가 갖춰져 있지 않은 정치사회적 후진국이며, 법치 면에서는 파시스트적 야만국 수준이다.

정부가 책임지고 모든 국민이 함께 잘 살게 하겠다는 것은 국가주의, 집단주의 성격을 갖는 전형적인 큰 정부 논리다. 큰 정부란 정부 주도 국정 운영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권력(정치인, 관료, 함께하는 이익집단, 시민단체)이 법 위에 군림하는 권력정치 현상이 불가피하게 되고 권력정치는 권력자, 그 추종자들의 자의적이고 일방적인 판단과 결정이 강요됨으로써 자유민주공화국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법치주의는 무의미하게 된다.

우리의 현재 환경이 이와 같다. 같은 사안을 두고 정권이 바뀌면 법 해석이 달라지고 기준 잣대가 달라지며 권력의 비호를 받는 세력이 공권력을 무력화시키고 개인의 안전과 재산을 위협할 때 이를 저지하는 경찰이 오히려 제재를 당하는 곳이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검찰은 권력의 도구가 되었고 정치화, 이념화 된 사법부가 권력 편에 서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 있다.

우리 사회에서 국민의 신뢰도가 가장 낮은 집단은 정치인 집단과 관료 집단이다. 관료 집단 속에 경찰, 검찰, 판사가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정치 사회적 문제이다. 이 문제 해결이 선행되지 않는 한 큰 정부 체제는 성공하기 어렵다. 정부 규모가 커지고 관료 숫자가 늘어나고 규제가 많아지고 간섭이 심화되면 될수록 정부에 의한 낭비가 많아지고 부정부패는 더 심화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제반 모순은 단기간에 걸친 압축성장이 가져다준 성장의 그늘에서 생겨난 모순들이다. 모든 성장은 갖가지 모순을 수반하는 것이 인간사의 공통된 경험이다. 하나의 모순을 제거하고 나면 또 다른 모순이 생겨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회 현상이기도 하다. 모순 제거는 어떤 국가도 피해갈 수 없는 영원한 과제다. 어쩌면 국가 운영이란 모순을 제거해가는 과정의 연속일 수도 있다. 그 동안 압축성장으로 인해 생겨난 모순들을 극복하려는 정권 차원의 지속적인 노력은 없었고 뒤따라오는 정권이 앞서 간 정권에 그 책임을 전가하는 데만 몰두함으로써 모순은 오히려 누적되어 왔을 뿐이다. 자신들의 판단과 기준으로 한국의 천민자본주의 체제를 모두가 다 함께 잘 사는 정의로운 자본주의로 대체하기 위해 건국 이래 견지해오던 경제 체제를 뿌리 채 바꿔놓겠다는 발상 만큼 잘못되고 위험한 것은 없다. 성공 가능성 보다 실패 확률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체제를 포기할 수 없다면 자유자본주의 체제와 자유시장경제 역시 포기할 수 없다. 자유시장경제의 생명은 경쟁과 성취에 있고 경쟁과 성취를 통하여 인간은 자립하고 개인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게 된다. 경쟁은 불평등과 양극화를 낳는 근원이 아니라 창조와 성취를 가져다주는 최선의 길이며 부를 안겨 주는 가장 빠른 길이다.

자유주의 체제 사회는 경쟁과 성취를 통하여 성장해 왔다. 성장은 모든 국가가 지향하는 영원한 목표다. 성장이 있고 나서야 분배가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자본이 있고 난 다음 노동이 따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성장을 중시하고 자본가를 존중할 때 정당한 분배와 정당한 노동 대가 요구가 성립될 수 있다. 이때 자본가에게는 경영윤리가 있고 노동자에게는 노동윤리가 있다. 자본가와 노동자는 법치주의 정신을 존중하면서 공정한 거래를 하는 관계다. 성장과 분배가 동반자여야 하지만 언제나 앞서는 것은 성장이어야만 한다. 노동이 자본을 압도하고 분배가 앞서는 성장은 있어본 적이 없다. 이렇게 되면 자유자본주의, 자유시장경제가 질식하는 것은 시간 문제다. 장하성 교수를 비롯한 좌파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경쟁을 불평등의 원인으로 규정하고 노동을 자본 위에 놓으면서 결과적 평등 분배를 사회 정의로 내세우는 평등주의 체제가 되면 개인은 정부와 당, 정치인과 관료들의 하수인이 되고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이 길은 그 동안 우리가 이뤄놓은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또 다시 빈곤의 계곡으로 추락하는 길이다.
 

청와대를 떠난 장하성 교수
청와대를 떠난 장하성 교수

Good Society의 조건

우리 사회는 빈부의 차이가 있는 사회이지만 1% 대 99% 양극화 사회는 아니다. 경제 규모가 커질수록 빈부의 차이는 커질 것이다. 그러한 차이를 좁혀가는 것은 자유주의 원리에 맞게 처리해가야지 평등주의 원리를 적용하려는 유혹을 받게 되면 모든 것을 그르칠 수 있다. 노동 현장에서 착취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대기업주는 죄인 취급을 받고 노동세력은 정권의 대주주처럼 기세등등하지만 글로벌 시장경쟁에서 선두 주자가 되려면 규모의 경제가 절대로 필요하고, 더 많은 대기업 출현이 필요한 것이 우리의 입장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의 불완전한 자유시장경제 체제는 난타를 당하고 있다.

모두가 다 함께 잘 사는 것을 누가 마다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무엇이 다 함께 잘 사는 것일까? 좌파 지식인과 정치인들이 말하는 다 함께 잘 사는 사회란 결과적 평등 분배, 분배 정의를 전제로 하는 평등주의 사회를 의미하지만 현실에서는 가능하지도 않고 성공한 사례도 없다.

“잘 산다”는 것은 빵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다분히 철학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기원전 399년 감옥에서 독배를 받아들이고 죽은 소크라테스(Socrates)는 정의(justice)와 도덕(morality)에 입각한 삶을 살아갈 때 잘 사는 것이라고 하였고 20세기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이래 가장 위대한 과학자의 한 사람이자 최근에 고인이 된 호킹(Stephen Hawking)은 2018년 출간된 <큰 질문들에 대한 간략한 대답(Brief Answers to the Big Questions)>에서 특히 기후와 자연 환경, 재생 에너지, 질병과 건강 같은 요소들의 영향을 받는 삶의 질(quality of life)을 잘 사는 조건으로 제시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우상숭배 시대 철학자였고 호킹은 우주시대, 지구행성 시대를 개척한 과학자였다.

세끼 밥을 먹고 집이 있고 자가용차가 있고 고등교육을 받고 의료 혜택을 비롯한 각종 복지 혜택을 누리고 산다고 해서 잘 사는 것일까? 권력과 부와 명예를 누린다고 해서 잘 사는 것일까? 이러한 조건들은 인간이 세속적 삶에서 잘 사는 기본 조건은 될 수 있을지라도 전부일 수는 없다. 이것들은 우리가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감에 있어 요구되는 물질적, 외형적 조건일 뿐이며 비물질적 조건(정치, 사회, 법치, 안보), 자연 조건(환경, 기후), 국제적 조건(교역, 번영, 평화)들이 인간 삶의 질과 안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다.

우리가 정치인, 관료들을 믿지 못하고 투명성이 없고 신뢰할 수 없는 정부를 의지하고 살아간다면 잘 산다고 할 수 있을까? 정권이 바뀌고 최고 지도자가 달라질 때마다 법 해석이 번복되고 법치 잣대가 달라지며 정치권력의 필요에 따라 위헌적인 소급입법과 특별법을 만들어 법치의 이름으로 정치적 사법 처리가 다반사로 이뤄지는 나라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잘 산다고 할 수 있을까?

· 경찰, 검찰, 법원을 믿지 못하고 살아가야 한다면 잘 산다고 할 수 있을까?

· 권력의 비호를 받는 패거리, 떼거리의 힘이 법의 힘을 능가하는 사회에서 살아간다면 잘 산다고 할 수 있을까?

· 경쟁이 불의가 되고 성공이 질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사회에서 살아간다면 잘 산다고 할 수 있을까?

· 적대세력의 위협을 받으면서 살아간다면 잘 산다고 할 수 있을까?

· 미세먼지와 오염된 공기 속에서 숨을 쉬고 오염된 땅과 바다와 하천을 끼고 살아간다면 잘 산다고 할 수 있을까?

정의가 무색하고 공정성이 무의미하며 신뢰가 통하지 않는 사회에서의 삶을 결코 잘 사는 삶이라고 할 수 없다. 배부른 것만으로, 돈이 많은 것만으로, 권력과 명예가 넘쳐나는 것만으로 잘 사는 것이 아닌 것이 인간의 삶이다. 모두 다 함께 잘 사는 세상이란 인간이 꿈꾸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정부를 믿고 정치인과 관료들을 신뢰하면서 법과 질서가 존중되는 사회에서 억울함이 없고 각자의 노력에 따라 노력한 만큼의 대가와 보상을 누리고 좋은 자연 환경 속에서 안전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보람 있게 살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며 이것이 곧 자유주의 체제가 추구하는 길이다.

우리 경제의 당면 과제는 2008년 이래 좌파 지식인들이 만들어낸 유령을 쫓아내고 관치시장경제 틀에서 벗어나 선진국 수준의 정상적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선진국 수준의 법치주의 환경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의 모순을 빌미로 자유시장경제 체제 자체를 바꾸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 모순을 해소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한 가지는 혁명적으로 바꾸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 체제 골간을 유지하면서 점차적으로 개선·보완해 가는 것이다. 후자의 방법을 택하는 것이 순리이고 현실적이다.

좌파 정부가 좌파적 가치관에 입각하여 경제 정책을 추진하려고 하는 것은 그들로서는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현재 경제정책을 둘러싼 논쟁과 시비는 가치관을 둘러싼 시비이자 자유주의 대 평등주의라는 사상 차원의 논쟁이자 시비다. 가치관, 사상을 함께 하는 여당과 제1야당 간의 정책적 시비라면 타협이 가능하지만 가치관, 사상을 달리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타협은 불가능하고 오직 양자택일만이 가능할 뿐이다. 따라서 가치관, 사상을 둔 충돌은 피할 수 없고 오래갈 수밖에 없다.

장하성 교수는 의미 있는 교훈을 남기고 청와대를 떠났다. 국가는 학자의 실험 장소가 될 수 없고 국민은 학자의 실험 대상이 되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이다. 정부에 참여하는 학자는 결코 책임지는 일이 없고 자신의 이론과 주장에 대한 비판을 어떤 경우에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으며 반박 논리를 제시함에 있어서는 달인들이다. 우리는 결코 그들이 만들어 낸 실체가 없는 유령의 희생 제물이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허화평 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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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한 2019-01-01 23:56:59
ㅎㅎㅎ
허선생.
댁들이 1980년대초에 했듼 것이 유사 파시즘이었소.
정치규제로 야당인사들 발 묶어놓고 관제야당 서너개 만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