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과학기술계 기관장 사퇴 압박....붕괴되는 연구 자율성
문재인 정부, 과학기술계 기관장 사퇴 압박....붕괴되는 연구 자율성
  • 박성현 미래한국 편집위원· 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
  • 승인 2019.01.03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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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출범 후 사임한 과학기술계 기관장들은 누구인가

정권이 바뀌자 임기가 끝나지 않은 과학기술계 기관장들이 줄줄이 사임하거나 사퇴 압박을 받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사임한 기관장만 11명에 달한다. 첫 물갈이 논란은 2017년 12월 박태현 한국과학창의재단 이사장, 황진택 에너지기술평가원장, 홍기환 해양과학기술원장 등 세 명이 한 달 새 자리에서 물러났다. 박 이사장은 임기를 반도 채우지 못하고 2년 가량 남은 시점에서 물러났고, 황 원장과 홍 원장은 각각 5개월과 7개월이 남아 있었다. 이들은 사임 이유를 일신상의 문제로만 밝히고 뚜렷한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그 뒤를 이어 2018년 2월에는 장규태 생명공학연구원장, 서상현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장이 물러났다. 3월에는 조무제 한국연구재단 이사장이 절반만 임기를 채우고 사임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하 과기부)의 감사를 받아 기관운영에 관한 지적을 받았고, 이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사임했다. 과학기술계에서는 박근혜 정부에서 임명된 기관장에 대하여 “과기부가 표적감사를 통하여 내보내고 싶은 사람을 기어코 내보내고 있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외압에 따른 과학기술계 기관장의 사표 제출은 이후에도 이어져, 지난 4월에는 신중호 한국지질자원연구원장, 임기철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원장, 성게용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장 등 세 명이 사표를 냈다. 신 원장 역시 사임 전 정부로부터 집요한 감사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1월에는 하재주 한국원자력연구원장과 손상혁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디지스트) 원장이 옷을 벗었다. 하 원장은 ‘탈원전’ 정책에 부정적 입장을 취했다는 평을 들었고, 결국 스스로 원해서 사임한 것이 아니라는 게 과학기술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이들 11명에 대하여 간단히 표를 만들어 보면 <표 1>과 같다.

과기부는 11월 28일 신성철 카이스트 총장을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하고, 30일 카이스트 이사회에 공문을 보내 총장 직무 정지를 요구했다. 신 총장은 2011년 디지스트 개교 때부터 2016년까지 디지스트 총장을 역임했고, 작년 2월 박근혜 정부에서 카이스트 총장에 선임됐다. 과기부는 지난 11월 디지스트에 대한 감사에서 신 총장이 디지스트 총장이던 2012년 2월 세계 3대 기초과학연구소 중에 하나인 미국 로렌스버클리국립연구소(LBNL)와 공동 연구협력 양해 각서를 체결하고, 연구 협력을 집행하면서 국가 예산 200만 달러(약 22억 원)를 부당하게 지급한 혐의가 있다는 것이다.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최근 불거진 의혹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신성철 KAIST 총장/ 연합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최근 불거진 의혹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신성철 KAIST 총장/ 연합

국제적 문제로 비화된 KAIST 총장 ‘직무정지’ 소동

디지스트는 LBNL이 보유한 고가의 연구 장비인 엑스레이 빔 타임(X-Ray Beam time)을 50%까지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대가로 2013년부터 올해 3월까지 총 200만 달러를 지급했다. 그러나 과기부는 최근 감사에서 신 총장이 LBNL에 200만 달러를 줄 필요가 없었는데, 국가 예산을 낭비했다고 보고 있다. 신 총장이 LBNL에 근무하는 본인 제자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LBNL과 이중 계약을 하고 200만 달러를 유용했다고 의심하고 있다.

이러한 혐의에 대하여 신 총장은 조목조목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지난 12월 4일 신 총장은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정부의 검찰 고발은 국제연구협력과정을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한쪽으로 몰고 가는 감사”라며 지적하고, “외국기관 장비를 사용하기 위해선 운영비를 내는 것은 당연하고, 오히려 공동연구협력으로 국내 연구자들이 엑스레이 빔 같은 최첨단 고가 장비를 저렴한 가격에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한 것은 자랑스럽게 생각해 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거기서 일하고 있는 제자를 위해 200만 달러를 지급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200만 달러를 여러 차례 나눠 보낼 때마다 교수들에게 ‘장비 사용 수요가 있는지’를 조사한 다음 근거를 갖고 보내도록 했다고 말했다. 또한 “그간 양심에 부끄러움 없이 살아왔다. 나에 대한 상상할 수 없는 주장 때문에 참담한 심정이다”라고도 말했다.

과학기술계에서는 고가의 엑스레이 빔을 50%까지 독점적으로 사용하면서 사용료를 5년간 200만 달러를 지급한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비싼 사용료라고 볼 수 없다는 의견이다. LBNL은 디지스트와 공동 연구를 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국가 연구비를 횡령했다는 의혹에 대해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다. LBNL은 해명 서한을 정부에 발송하여 항의 의사를 표시하면서 “한국 일부 언론에서 우리가 디지스트 측과 애초 무상으로 장비를 이용하기로 한 뒤 별도로 사용료를 낸 것처럼 이중 계약을 했다는 보도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사용 계약에 따라 돈을 적법하게 받았다는 반박인 것이다. 또한 12월 7일 국내 한 과학 매체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LBNL과 디지스트의 계약은 미국 법령과 규정을 따랐고, 상위 감독 기관인 미국 에너지부(DOE)의 승인도 받았다. 두 기관의 계약은 적법했다”고 주장했다. 우리 정부가 주장하는 횡령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심과 혐의만으로 신 총장을 검찰에 고발하고 직무정지를 카이스트 이사회에 요구한 것은 한 마디로 사퇴하라는 압박이다.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앞에서 열거한 과학기술계 기관장들이 줄줄이 사퇴한 것으로 보인다.

진보적 성향의 과학 시민단체인 ‘바른 과학기술사회실현을 위한 국민연합’도 지난 10일 성명서를 통해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연구 풍토를 침해하는 정치 권력의 개입은 없어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장을 역임한 신용현 바른미래당 의원은 11일 “최근 과학기술계에서 현 정부에서 자행되는 찍어내기식의 부당하고 무리한 표적 감사에 대한 불만이 나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12일 카이스트에 따르면 카이스트 교수 247명을 비롯해 대학·연구소·기업 관계자 등 727명이 총장 직무정지 요청 거부 성명서에 서명했다고 한다.

다행스럽게도 지난 14일 열린 카이스트 이사회(이사장 이장무 전 서울대 총장)에서 연구비 횡령과 배임 의혹을 받는 신 총장의 직무정지 결정을 유보했다. 과기부 등 정부 측 당연직 이사들이 이사회에서 직무정지를 밀어붙였지만, 다른 이사들이 혐의만으로 직무정지를 시키는 것은 성급한 결정이라며 구체적으로 입증된 자료를 가지고 재논의하자고 결정했다. 올바른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과학기술계에 주는 국제적 망신과 상처,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번 신 총장의 직무정지 파동으로 LBNL과의 연구협력 건도 상호 신뢰에 상처를 입게 되었고, 이 사태는 불명예스럽게도 국제 이슈로 비화되는 양상이다. 최근에 과학계의 세계적인 학술지인 네이처(Nature)에 “한국 과학자들은 신 총장 사건을 정치적 숙청으로 보고 있다”는 비판적 시각의 기사를 크게 실었다. 국제적 망신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는 GDP 대비 R&D 투자가 세계 제일이라고 자랑하곤 한다. 연구개발비가 많은 것은 좋으나 이를 효율적으로 집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연구비를 주로 집행하는 과학기술계 출연연구소와 대학에 연구의 자율성을 주고 마음껏 연구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줘야 하는데, 작금의 일련의 사태는 이와는 반대로 가고 있어 심각한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소위 ‘정권을 위한 과학’의 바람이 불면서 정치적 코드에 맞지 않는 기관장이나 총장을 물러나게 하는 것은 연구의 자율성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다. 연구의 자율성과 독립성이 침해되어 연구비 투자 성과가 나지 않고, 국민의 혈세가 낭비된다면 이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기관장 사퇴 압박으로 붕괴되는 연구의 자율성에 대하여 담당부처인 과기부도 “우리도 어쩔 수 없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내면서, 윗선의 지시임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과학계마저 정치적 성향에 따라 ‘편 가르기’와 ‘과학의 정치화’를 밀어붙인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어둡고, 국제적 조롱거리가 될 수 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100대 국정과제를 발표했고, 과학기술계가 큰 기대를 가진 과제는 35번째 과제인 ‘자율과 책임의 과학기술 혁신 생태계 조성’이다. 이런 생태계 조성은 기관장 사퇴 압박 등으로 도리어 역주행하고 있다.

기관장 사퇴 압박을 가할 때 가장 애용되는 수단은 국가 R&D 감사이다. 연구비를 제대로 사용했는가를 감사하는 것이다. 현장 연구자들은 R&D 감사에 대해 “R&D 특성을 무시하고, 연구자를 범죄자 취급한다”고 흔히 말하고, 감사관들이 현장의 R&D에 대한 경험이나 이해가 제대로 되어 있는지도 의문이라고 말한다. 이런 후진적인 감사 풍토에서 ‘과학기술출연기관법 제10조 ①연구기관은 연구와 경영에서 독립성과 자율성이 보장된다’라는 조항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과학기술계에서는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지배구조를 흔히 4개 층위로 나눠 말한다. 대통령·감사원·국회 등이 제1층위, 정부 부처들이 제2층위, 평가·관리기관들이 제3층위, 출연연구소·대학 등이 제4층위이다. 실제로 연구하는 주체는 제4층위이다. 그러나 제1, 2, 3층위에서 각종 보고 명령이 쏟아지고 간섭이 끊임없이 이어진다면 어떻게 제4층위의 연구 자율성이나 연구의 몰입이 가능할 것인가?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위계질서가 그대로 남아 있어 제1, 2, 3층위의 사(士)는 무소불위(無所不爲)한 것인가? 이제 이러한 위계질서는 무너뜨릴 때가 되지 않았을까?

KAIST 정기 이사회에서 과학계 출신 이사들이 정부측 이사들에 맞서 신성철 KAIST 총장의 직무정지 안건 표결을 유보시켰다.
KAIST 정기 이사회에서 과학계 출신 이사들이 정부측 이사들에 맞서 신성철 KAIST 총장의 직무정지 안건 표결을 유보시켰다.

혁신성장의 진정한 기초 인프라

신 총장 ‘직무 정지’에 대한 카이스트 이사회의 유보 결정으로 과기부가 성급한 판단으로 혼란을 야기했다는 비난이 거세질 전망이다. 국내외에서 과학기술계에 대한 정부의 리더십이 흠집이 생겼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사건의 전말이 분명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직무정지를 요청했다는 지적이 뼈아프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번의 신 총장 사건으로 그 동안 지속되어온 기관장 사퇴 압박에 종지부를 찍을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적인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과학기술계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힌 정부는 기관장 사퇴 압박은 결국 국론분열을 일으켜 현 정부에도 득이 될 것이 없다는 반성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혁신성장을 말하는 문재인 정부는 그 동안 과학기술계가 앞장서서 주도해야 할 혁신성장의 분위기를 조성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감사를 동원해 특별히 잘못이 드러나지 않은 연구기관장들의 사퇴를 받고, 연구 자율성을 해치고, 과학을 정치화하는 분위기에서는 연구 생산성이 올라갈 리 없고, 혁신성장도 도모할 수 없다.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과 무리한 주52시간 근무제로 인하여, 기업하기 어려운 환경을 조성했고, 연구의 자율성이 붕괴될 정도까지 기관장들을 특별한 이유 없이 퇴진시키고, 열심히 해보려고 하는 과학자마저 범죄자로 내몰면 어떻게 혁신성장이 가능할 것인가?

이제 2019년 새해를 맞아 정부 정책에 획기적인 전환이 있었으면 한다. 더 이상 정부는 과학기술계의 연구 자율성을 해치는 행위를 하지 말고, 연구자가 신명나게 연구할 수 있는 자율성을 주는 것이 혁신성장의 길로 가는 가장 중요한 기초 인프라이다. ‘과학의 정치화’는 과학기술을 죽이는 독약과 같은 것으로 절대 금물이다. 또한 제1, 2, 3층위가 4층위의 연구자 위에 군림하지 말고, 4층위의 연구 활동을 지원하고 돕는 봉사의 자세로 나아갈 때 혁신성장도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4차 산업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있으며, 연구자들이 선봉에 서서 4차 산업혁명의 기술들을 개발하고 신산업을 이끌어나가야만 우리나라의 미래가 밝을 것이다. 새해에는 이런 분위기가 조성되기를 기원해 본다.

박성현

미래한국 편집위원· 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
노스캐롤라이나 통계학 박사
서울대 명예교수
사회적책임경영품질원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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