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탐구] ‘대처 혁명’과 마거릿 대처의 리더십
[인물탐구] ‘대처 혁명’과 마거릿 대처의 리더십
  • 박지향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 승인 2019.01.18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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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한때 근대성의 전범으로 인정받은 나라였다. 모든 ‘의회의 어머니’라 불리는 의회를 최초로 확립해 의회민주주의의 길을 열었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자본주의를 발달시키고 산업혁명을 수행했다. 19세기 말에 이르면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제국을 확보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불렸다.

그러던 영국이 1970년대 이르러 ‘영국병’을 앓는 유럽의 중환자로 추락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근로자들의 파업열병과 그 앞에 속수무책이며 게으르기 짝이 없는 경영자의 무능과 정부의 무기력으로 경제는 나락에 빠졌고 1976년에는 IMF 구제기금을 요청할 지경에 이르렀다.

영국은 통치 불가능한 나라였으며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나라였다. 그러던 영국이 마거릿 대처의 등장과 함께 부활의 길을 걷게 되었다. 대처는 정치인이 단지 몇 년의 임기 동안 정부를 ‘경영’하고 물러가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대처 이전의 영국과 대처 이후의 영국은 대단히 달랐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는 ‘대처 혁명’이라고 불린다.
 

마가릿 대체 영국수상 ( 1925.10.13 ~ 2013.4.8 )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겪고 난 후 대처의 처방은 더 이상 효력이 없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소위 ‘고삐 풀린 시장’을 제어하기 위해 정부의 강력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주장과 함께 복지 확대와 사회적 책임이라는 구호가 세상을 휩쓸고 있다.

그러나 복지국가에 대한 요구가 점차 커지고 나의 불행을 남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더 많아지는 오늘의 우리 사회에서 ‘대처주의’는 더 중요한 교훈이 될 수 있다. 마거릿 대처의 명복을 빌며, 그의 업적을 재검토하고 우리에게 영국의 경험이 어떤 교훈을 줄 수 있을지 살펴보기로 한다. 이 글에서는 대처가 집권하기 전 영국의 실태를 개관하고 대처가 제시한 해결책을 살펴본 후 마지막으로 대처의 리더십을 평가해보기로 한다.

대처가 한 일이 얼마나 혁명적이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대처가 집권하기 전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영국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소위 ‘합의의 시대’에 돌입했다. 그것은 ‘케인스 식 사회민주적 합의’라고도 불리는데, 내용은 적자예산을 편성해 완전고용을 성취하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장점만을 따왔다고 하는 혼합경제를 추구하며,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대변되는 포괄적인 복지국가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합의의 정치’와 ‘대처 혁명’

영국병의 첫째 원인은 거대한 공공부문이 야기하는 비효율성이었다. 국유화는 1945년 정권을 잡은 노동당 정부의 기본 원칙 가운데 하나였다. 노동당은 “자본주의적 착취로부터 노동계급을 해방시킨다”는 구실로 국유화를 진척시켰지만 결과는 노동계급의 해방이 아니라 대규모 관료조직일 뿐이었다.

공기업들은 적자경영을 하면서 뻔뻔스레 정부에 손을 내밀었고 정부는 적자재정을 편성해 위기를 넘기곤 했다. 1970년대 중반 인플레는 20%를 넘어섰고 최고세율은 80%에 육박했다. 그런 상황에서는 일자리도, 일하려는 의욕도 생겨날 수 없었다.

영국병의 두 번째 원인은 방만한 복지정책이었다. 영국 복지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연금, 국민건강보험, 실업수당 등이었는데 대처 시대에 이르면 이미 국가의 지불능력을 한참 넘어설 정도로 비대해졌다. 1970년대 초 이미 의사, 간호사, 사무직을 포함해 국민건강보험 종사자가 100만 명이 넘었는데 규모로 볼 때 유럽 최대의 단일 고용주였으며 공공지출 총액의 17%를 점유했다. 대처는 특히 일자리를 구하려하지 않고 실업수당에 얹혀 사는 게으른 사람들을 혐오했다.

영국병의 세 번째 원인은 파업 열병이었다. 노동조합 세력의 문제는 실로 근대 영국 정치에서 핵심 이슈였다. 영국 정부는 노조에 도전했다가 번번이 깨지는 수모를 겪었다. 1974년 보수당의 히스 총리는 노조의 압력을 견디지 못해 ‘누가 영국을 통치하는가?’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총선을 치렀지만 패배했다. 영국을 통치하는 것은 정부가 아니라 노조임이 확실해졌던 것이다. 노조의 횡포는 1978년 말 공공부문 근로자들의 총파업이 국가의 작동을 중단시킨 ‘불만의 겨울’에서 정점에 달했다.

대처는 또한 재정적자의 감소를 최우선 순위로 정했다. 대처의 경제적 이상은 ‘버는 것보다 더 많이 써서는 안 된다’로 요약할 수 있다. 국가는 그 수단 내에서 사는 법을 배워야 하고, 공공지출은 납세자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삭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처는 종종 “가정주부조차 할 수 있는 일을 왜 정부가 못한단 말입니까?”라고 꼬집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방대한 규모의 공기업을 축소하고, 게으르고 방만한 경영을 하면서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정부에 의존하는 공기업에 경쟁을 도입해 생산성과 효율성을 제고하도록 해야 했다.
 

레이건과 대처, 소련의 철의 장막을 허물어트린 자유진영의 양대 거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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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화의 길, ‘공기업파산불패’의 신화를 깨 버리다

민영화는 몇 가지 목표를 한꺼번에 달성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첫째 공기업의 적자 요인을 없애주고, 둘째 주식 매각으로 국고 수입을 증대시켜 고질적인 재정적자를 청산해주며, 셋째 민간의 활력을 회복시켜 줄 것이었다. 무엇보다 민영화는 집산주의를 되돌리고 개인의 자유를 회복시켜 줄 것이었다.

대처 정부가 추진한 민영화 사업 가운데 가장 인기 있고 성공적인 것은 1980년부터 시작된 공영 임대주택의 매각이었다. 전후 정부는 막대한 양의 임대주택을 건립하고 운영해 왔는데 대처 정부는 이것을 민간부문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즉 임대주택 보유기간에 따라 공정가격에서 최대 60% 할인된 가격을 거주자에게 보장해 줬다. 대처는 원래 임대주택 판매에 반대했지만 그 효과를 깨닫자 그것을 자신의 정치적 신념의 상징으로 추켜세우면서 주택소유 붐을 일으켰다. 1990년 대처가 물러날 때까지 총 150만 호가 팔렸는데 현재 영국은 자택 소유자의 비율이 유럽에서 가장 높은 나라이다. 거주자가 소유주가 되는 과정에서 혜택은 주로 숙련공들에게 돌아갔고 그 결과 중산층이 두터워졌다.

대처 정부가 들어선 1979년부터 1992년까지 총 415억 파운드어치의 국가소유 주식들이 민간으로 넘어갔다. 1992년이 되면 이제 팔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공기업이 해체되었다. 1989년 10월에 있은 보수당 전당대회에서 대처는 “일주일에 200만 파운드씩 손해를 입히던 공공부문의 5개 산업들이 이제 민간부문에서 일주일에 1억 파운드씩 이익을 내고 있다”고 자랑스레 보고했다. 무엇보다 민영화의 마력은 ‘파산할 수 없던 것을 파산할 수 있게 만든 것’이었다.

민영화된 기업들은 구조조정과 경쟁을 통해 비용 절감과 생산성 증가를 이뤘다. 대중은 처음에는 오랫동안 익숙해 있던 공기업이 해체되는 것에 불안을 느꼈지만 다양한 서비스와 가격 인하에 만족하게 되었다.

대처 정부가 추진한 민영화 덕분에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평범한 사람들이 자본주의에 직접 투자하도록 초대되었다. 대처는 자신이 추진한 이 변화를 ‘대중 자본주의(popular capitalism)’라고 불렀다. 대중 자본주의 덕분에 영국은 세상에서 가장 넓게 주식 소유자가 분포된 나라가 되었다. 즉 각국의 20개 대기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의하면 영국의 20개 대기업이 모두 광범위한 주식 소유분포를 보였다.

미국은 16개, 일본은 18개이며 홍콩, 벨기에 등은 광범위한 소유 분포를 가진 대기업이 거의 없었다. 대처 정부는 공기업을 매각하면서 피고용인들의 주식 소유를 권장했는데 실제로 민영화된 기업의 직원들 가운데 90% 이상이 자사 주식을 구입했다. 그 결과 ‘보스와 노동자’, ‘우리와 저들’ 같은 구분이 약해지고 직원들이 회사와 일체감을 갖는 효과가 나타났다

대처가 야기한 가장 중요한 변화를 하나만 고르다면 호전적인 노동조합을 격파하고 골병이 들어 있던 노사관계를 재정립한 일일 것이다. 한마디로 ‘노조 길들이기’인데, 대처는 그것이 경제를 건강한 기반 위에 놓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전제라고 확신했다.

1980년부터 대처 정부는 일련의 고용법과 노동조합법 개정을 통해 불법파업을 행한 노조에 벌금을 부과하고, 불법파업으로 발생한 비용을 면제해 주던 관행을 제거했으며, 클로즈드 숍 제도의 지나친 보호 조항을 바꿨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대처는 비교적 온건한 태도를 취했는데 자신의 승리가 확실해질 때까지 기회를 엿보았던 것이다. 대처는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정치인이었다.

강성 노조에 이념전에서 승리하다

대처는 노동운동의 전위대로 자타가 인정하던 전국광부노조를 상대로 한 1년간의 투쟁에서 특유의 강인함을 유감없이 보였다. 대처는 면밀한 사전 준비를 한 후 1983년 9월 경제적으로 채산성이 맞지 않는 탄광의 폐쇄를 발표했다. 당시 75%의 탄광이 적자였다.

국내산 석탄의 톤당 가격은 45-50파운드인데 반해 폴란드나 호주로부터 수입한 석탄은 운송비를 포함하고도 25-30파운드에 불과했다. 그 차액은 세금으로 메꿔야 했을 뿐만 아니라 값 비싼 석탄은 생산비용을 높여 결국 영국 제품의 수출 경쟁력을 약화시켰다. 그러나 막강한 세력 덕분에 ‘아서 왕’이라고 불린 전국광부노조 위원장 스카길은 ‘대처로부터 영국을 구해낼’ 혁명적 전위대를 이끈다고 주장하며 1984년 3월 총파업을 시작했다.

대처의 준비는 즉각적으로 효력을 발휘했고 그는 각 단계마다 여론을 동원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1985년 2월이 되면 조합원들의 반 이상이 파업을 중단했고 다음 달, 전국광부노조 대표회의는 스카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직장 복귀를 결의했다. 1년 동안 계속된 파업에서 결국 노조 집행부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조합원의 반을 잃어버린 채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스카길의 파업은 경제적, 산업적으로는 불필요한 파업이었다. 그것은 정치적 파업이었다.

파업을 분쇄한 후 대처 정부는 후속조치로 더 강경한 법을 제정했다. 파업 전에 조합원 비밀투표가 의무가 되었고 분규 작업장이 아닌 곳의 동조파업은 불법이 되었다. 또한 노조원의 불법행위에 따른 민사상의 책임이 노조에 부과되었으며, 클로즈드숍이 점진적으로 철폐되고 노조 가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노사관계 개혁이 여론의 동의는 물론 노조원들 다수의 지지를 얻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노조의 횡포에 국민들이 질려 있었고 조합원들 자신도 지쳐 있었던 것이다.

광부노조에 대한 승리는 노동조합운동과 좌파에 대한 이념적 승리이기도 했다. 노조도 파업을 첫 번째가 아니라 마지막 수단으로 생각할 정도로 온화해졌으며, 무모한 파업으로 기업 전체의 힘을 피폐시키는 것보다 최신 설비를 갖춘 높은 수익형 기업을 만드는 것이 서로에게 이롭다는 노사간 합의가 도출되었다. 대처의 ‘노조 길들이기’의 결과 노조의 정치적 역할은 이제 끝났으며 정치 파업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대처 총리의 서거 소식에 샴페인을 터트리고 있는 영국인들, 영국병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대처 총리의 서거 소식에 샴페인을 터트리고 있는 영국인들, 영국병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대처 혁명’의 효과, 자신의 이름에 ism(사상)을 갖다

대처는 자신의 이름에 ‘주의(ism)’을 붙인 최초의 정치인이었다. 대처주의란 무엇인가? 경제적으로는 국가 통제가 아닌 자유로운 시장경제, 정부의 가격 통제가 아니라 시장에서 결정되는 물가와 임금, 공공지출의 억제, 국유화된 기업의 민영화를 포함했다.

대처주의는 또한 난폭하고 무법적인 노조를 개혁하고 개인의 독립성과 창의성을 짓밟는 사회주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미였다. 대처주의의 핵심은, 그러나, ‘의존문화’를 근절해 국민에게 스스로의 운명을 다스리게 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었다.

대처는 ‘국가는 개인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전제를 전복시키고 작은 정부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 했다. 이 목표는 어느 정도 실현되었는가? 1980-90년대에 실시된 사회조사에 의하면 대처가 원한 만큼은 아니지만 그의 정책은 확실히 시장경제의 원리를 가르치는 데 성공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탈 국유화가 가장 성공적이었는데 1974년에는 국민의 24%만이 탈 국유화에 찬성했지만 1987년에는 국민의 2/3 이상이 민영화를 지지했다.

반면 더 많은 기업과 산업을 국유화해야 한다는 데 찬성한 사람들은 16%에 불과했다. 대중의 의식변화는 국가의 다른 역할들에 대한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정부가 임금 및 물가를 통제해야 한다는 의견이 급격히 감소했으며, 일자리 제공과 실업자 생활보장이 정부 책임이라는 답이 각각 38%, 45%로 나타나 그것이 전적으로 정부 책임이라고 믿던 과거와 현저한 차이를 보였다. 다시 말해 국민의 사회민주적 신념이 급격히 약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대처 집권 이전의 분위기와 비교해 볼 때 실로 놀라운 변화였다.

대처의 이런 입장은 다른 정치인들과는 매우 대조적이었고 그런 발언들은 대단히 충격적으로 간주되었으며 좌파는 그것이 탐욕을 조장할 뿐이라며 비난했다. 이에 대해 대처는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제공한다고 해서 이기심과 탐욕을 조장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위선이라고 일축해버렸다. 대처가 볼 때 돈 자체는 목적이 아니었다. 돈은 단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게 만들어주는 수단에 불과했다. 재산은 ‘이기적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관용과 베푸는 사회’를 가져다준다고 확신한 대처는 열심히 일하고 벌어 ‘너 자신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그 돈을 쓰라고 충고했다.

그처럼 위대한 업적을 남긴 마거릿 대처의 리더십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흔히 정치가와 정치꾼을 구분하듯이 리더십 연구자들은 변혁적 리더십과 거래형 리더십을 구분한다. 전자는 영속적이고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오는 데 반해, 후자는 단순히 체제 유지에 급급해 한다. 또한 진정한 리더십은 단기적 이해관계를 떠나 장기적이고 명백한 국가 비전을 제시하고 강한 추진력을 가지고 그것을 실현하려 노력한다.

대처는 이 모든 경우에 들어맞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대처의 별명은 ‘철의 여인’, ‘싸우는 매기’, ‘암탉 아틸라’였다. 이런 별명에서 드러나는 대처의 이미지는 강인함이다. 대처는 아무리 인기가 없어도 그것이 옳은 정책이라고 생각하면 끈질기게 추진했다. 대처 집권 초, 구조조정으로 실업자 수가 300만 명을 돌파하자 내각 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때 대처는 “돌아가고 싶으면 당신들이나 돌아가시오. 나는 돌아가는 짓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라고 일갈했다.

마거릿 대처의 리더십, 모든 경우에 맞았다

총리 취임 후 처음으로 행한 보수당 전당대회 연설에서 대처는 ‘아마’라는 단어를 모두 지워버렸다고 한다. “나는 확신의 정치인입니다. ‘아마’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가 그의 변이었다. 대처의 단호함은 탈법적 행동을 자행하던 노조를 상대로 한 싸움이나 아르헨티나 군부 독재를 대상으로 한 포클랜드 전쟁에서도 잘 드러났다. 이 모든 행동의 결과 대처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렸다.

일부 사람들에게 대처는 마치 ‘마녀’와 같았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대처는 ‘다시 태어난 엘리자베스 1세’와 같은 존재였다. 실제로 대처는 집권 말기에 제왕적 지도자의 모습으로 변해갔고 결국 몰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대처가 보여준 가장 위대한 지도자적 자질은 그가 단기적인 정치적 이익에 좌우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흔히 지도자를 평가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평소와는 다른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들었는가이다.

마거릿 대처는 영국 국민과 제도로 하여금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들을 하거나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역사를 만들어간 지도자였다. 대처는 진정 한 시대를 매듭짓고 새로운 시대를 연 지도자였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지도자 한 사람의 힘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1960-70년대 계속된 영국 경제의 쇠퇴와 사회적 갈등 고조와 국가 위상의 추락은 국민들로 하여금 전후 지속된 사회민주적 합의에 회의를 품게 했고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대처 개인의 역할이 중요했지만, 영국 사회가 당면했던 총체적 좌절감과 문제의식도 대처의 과감한 혁명을 도왔던 것이다. 그러나 대처 없이 그러한 변화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보여준 리더십은 우리에게도 영감을 불러 일으킨다. 특히 1945년 이후 영국 사회에 퍼진 나태, 무책임, 방종을 몰아내고, 복지국가의 품에 안겨 나태하고 무책임해진 국민들로 하여금 두 발로 일어서서 자신의 삶을 책임지도록 각성시킨 대처의 리더십은 감동을 안겨준다. 우리에게도 언젠가 대처와 같은 지도자가 나타날 것을 기대해본다 .

박지향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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