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보는 3·1운동과 임시정부 (1) - 3·1운동의 기원, 대한인국민회의의 청원서
새롭게 보는 3·1운동과 임시정부 (1) - 3·1운동의 기원, 대한인국민회의의 청원서
  • 박명수 미래한국 편집위원·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연구소장
  • 승인 2019.02.18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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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은 1919년 3·1운동은 동경의 2·8독립운동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일부 학자들은 1918년 11월 28일 신한청년당이 당시 상해에 왔던 윌슨의 특사 크레인에게 청원서를 보낸 사건이 3·1운동의 뿌리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필자는 3·1운동의 뿌리는 1918년 11월 25일 미국에 있는 대한인국민회가 우리 민족의 대표를 선출하고,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독립을 위한 청원서를 보낸 사건이라고 본다.

1918년 11월 11일 독일은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에 항복해 1차 세계대전은 종식되었고, 본격적으로 전후처리문제가 거론되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윌슨 대통령은 전후 처리의 중요한 원칙으로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웠다. 이런 국제적인 흐름을 알고 있던 미주 동포들은 조국의 독립을 성취해 보고자 했다.

당시 미국은 연합국의 주축이었고, 윌슨은 바로 한국인들의 희망의 근거였다. 윌슨은 독실한 기독교 장로로서, 과거 이승만의 지도교수였다. 그는 기독교적인 자유와 민주의 정신을 국제정치에 도입해 보고자 하는 이상주의적인 인물이었다.

3.1 운동의 뿌리는 1918년 11월 25일 미국에 있는 대한인국민회가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독립을 위한 청원서를 보낸 사건이라고 본다. 사진은 1909년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총회 창립회원
3.1 운동의 뿌리는 1918년 11월 25일 미국에 있는 대한인국민회가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독립을 위한 청원서를 보낸 사건이라고 본다. 사진은 1909년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총회 창립회원

1910년 한일병합 이후 미주한인사회는 독립운동의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다. 안창호는 미주, 하와이, 멕시코, 중국, 러시아 등 세계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는 한인들을 모아 대한인국민회를 만들고 민주주의적인 새로운 한국을 만들려고 했다.

미국 본토에 사는 교포들로 구성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는 독일의 항복 직후인 1918년 11월 1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특별 임원회를 소집해 종전 이후 미국 정부에 한국의 독립을 위한 청원서를 제출할 것을 중앙총회에 건의하기로 했다.

당시 중앙총회장이었던 안창호는 11월 25일 중앙총회, 북미지방총회 임원, 그리고 유지인사들 20여인으로 구성된 회의를 갖고 대외적으로 한국을 대표할 인물로 이승만, 민찬호, 정현경 세 사람을 선출하고 청원서를 만들었다.

3·1운동의 동력을 만든 미주한인사회와 이승만

이승만을 비롯한 세 사람의 명의로 작성된 이 청원서는 윌슨에게 보내졌다. 이 문서의 서명자들은 자신들을 “미국, 하와이, 멕시코, 중국 및 러시아에 거주하는 150만 한인을 대변하는 대한인국민회의 집행위원회”에서 선출된 사람들임을 밝히고, 조국의 2천만 동포들을 대신해 이 청원서를 제출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 청원서는 당시 일본의 문제점을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는 일본은 조약을 위반해 한국을 병합했다는 것이다. 한국은 러일전쟁 당시에 일본은 한국의 독립과 영토를 보전한다고 약속하고, 전쟁에서 이긴 다음에 이것을 무시하고 한국을 병합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둘째는 일본은 경제적으로 한국을 부당하게 통치한다는 것이다. 모든 자원은 일본을 위해 개발되고, 한국인들은 일본 기업의 노예가 되었다. 셋째는 일본은 한국 문화를 말살하고, 모든 것을 일본화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일본은 한국 역사와 언어를 무시하고, 교육을 통제해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만들려고 한다. 여기에서 특별히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언급한다. 이 청원서는 일본은 신도와 불교를 장려하는 반면에 기독교는 박해하고 있는데, 가장 구체적인 예가 1912년 한국 기독교지도자 105명을 불법으로 체포한 사건이다.

이 청원서는 윌슨의 정신을 근거로 해서 작성되었다. 자신을 “자치와 정치적 독립에 대한 열정을 가진 한국의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소개하면서, 한국 대표들은 윌슨을 “정의의 중재자이자 강자와 약자를 불문하고 동등한 권리의 옹호자”라고 주장하면서 윌슨이 개별국가의 특정한 목적을 인류의 공동의지에 복종하도록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것은 식민지국가들로부터 민족의 자결권을 되찾아 달라는 것이다.

또한 이 청원서는 한국이 1차 세계대전에 연합군으로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슨이 “공식적으로 연합국과 무관한 민족의 운명”에 대해서 다뤄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동시에 한국인들이 러시아 전선에서 연합군에 가담해 싸웠다는 사실,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민주주의의 대의를 위해 살아왔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한국이 미국의 산업적, 상업적, 종교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 시키고, 1882년 미국과 맺은 한미조약은 아직도 유효하며, 여기에 근거해 한국을 도와달라고 주장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청원서는 한국의 독립이 국제정치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하고 있다. 현재 유럽에서 프로이센주의(독일군국주의)가 국제 평화를 위태롭게 하는 것처럼, 일본은 극동의 프로이센으로 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일본이 2천만 한국인을 강압적으로 지배하는 한 아시아의 평화는 이뤄질 수 없다. 따라서 현재 진행하고 있는 강화회의가 그 목적을 달성하려면 윌슨의 이상인 “매우 명확한 모든 민족적 열망이 최고로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청원서는 한국은 자신이 원하는 정부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윌슨에게 재확인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다.

대한인국민회의 청원서는 뉴욕의 한인들로 하여금 신한회라는 단체를 만들게 했고, 이들은 독자적으로 청원서를 만들어 12월 4일 미 국무장관에게 보냈다. 이것은 곧 바로 연합통신에 보도되었다. 1918년 12월 5일 신한민보는 이 일을 “우연히 몽매간에 생각하야도 장절쾌절 할 일이다”고 기뻐하면서 과거 10년 동안 처량 적막하던 한반도는 이제 산천초목이 일시에 생기를 얻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한국인들의 행동은 일본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일본 신문은 여기에 대해서 10년 전에 한국을 떠나서 상황을 잘 알지 못하는 한인들이 왜곡해서 선전하며 독립을 청원하고 있으나 실제로 조선은 아무런 독립 자치의 능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한인국민회의 청원서는 계속 독립운동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이승만을 비롯한 대한인국민회 대표는 12월 22일 당시 파리에 가 있는 윌슨에게 전보를 보내 이 청원서를 다시금 확인하고 있다. 이것은 같은 해 12월 30일 파리에 접수되었다.

이런 이승만과 대한인국민회의 활동은 신한민보와 일본 언론을 통해서도 공표되었다. 일본에 유학 중인 한인 학생들은 미국인 선교사의 집에서 이승만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파송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19년 2월 8일 독립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이런 소식은 상해에 있는 우리 교포들에게도 알려졌다. 그래서 신한청년회도 김규식을 파리로 파송하기도 결정한 것이다. 대한인국민회의 청원운동은 3·1운동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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