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망명을 회고하며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망명을 회고하며
  • 한광덕 예비역 육군 소장
  • 승인 2019.02.19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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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주체사상의 대부였던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1997년 4월 서울 망명은 주체사상의 자기모순을 온 세상에 알리는 참회의 모습이었기에 소련(1991년)에 이어 북한도 곧 무너지는 신호탄으로 보였다. 그런데 오늘은 남북의 주사파가 자유 대한민국을 공격하고 있으니 기가 막힌다.

지만원 박사는 황장엽 전 비서가 1980년 5월의 광수였다는 주장을 하고 조갑제 대표는 이 주장의 가능성을 거부하는 논쟁을 하면서 온 나라가 바야흐로 총성만 들리지 않은 전쟁터의 모습이다.

1980년의 이야기는 접고 1997년으로 함께 돌아가 살펴보자. 황장엽 전 비서의 서울 도착 2주 전인 4월 17일 5·18 관련 두 번째 대법원 판결에서 역사를 바로 세운다며 김대중 사형(87)이 전두환 사형(97년) 구형으로 바뀌었고 그 4주 후의 노동신문에 대남공작 찬양 보도가 대서특필로 게재되었다.(민족의 령수를 받들어 용감하게 싸운 통일혁명렬사: 1997.5.26.)

이 대남공작 찬양 보도는 당시엔 몰랐고 오늘까지도 많은 국민이 모르는 상태로서 간첩 5만 명이 활동한다고 말을 했던 황장엽 전 비서는 한 명의 신고도 하지 않은데다가 ‘공화국 간첩 영웅1호’의 찬양 특집보도에 대해서조차도 침묵을 하고 말았으니 이 침묵의 유지를 깨지 못한 직무유기의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었던 것인가.

남침도 북침이라며 오리발을 내밀던 북한이 간첩 활동을 공적으로 찬양한 것은 5·18의 민주화 공로가 북에 있었으니 보상을 하라는 신호탄은 아니었을까. 힘든 세금을 내고 있는 우리 국민들의 알권리 차원에서 오래 전에 밝혀졌어야 할 5·18 유공자 명단 공개가 그토록 지연되는 이유까지도 따져보게 되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에 북한의 대남공작에 대한 경계의 실패가 있었음을 인정하자. 이제라도 경계의 실패에 눈을 뜨기만 하면 국군 장병들의 명예와 사기는 고양되고 온 국민은 서로 상대방을 격려하며 자유 대한민국은 확실히 튼튼하게 지켜질 것이다. 국군은 6·25 남침전쟁에서 그리고 월남전에서 자유를 지켜낸 참 민주화 투사였다.

한광덕 예비역 육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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