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글자 풍경...글자에 아로새긴 스물일곱 가지 세상
[서평] 글자 풍경...글자에 아로새긴 스물일곱 가지 세상
  • 김민성 미래한국 기자
  • 승인 2019.03.04 06: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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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독창적 시선 
예술과 과학 그리고 철학을 아우르는 글자 오디세이 

타이포그래피 연구자 유지원이 세계 여러 글자에 아로새겨진 사람과 자연, 역사와 문화 등을 들려주는 글자 인문학 책이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되었다. 저자는 디자이너의 시선에만 머물지 않고, 예술과 과학, 철학 등 다양한 학문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넘나들면서 다각도로 글자 형태가 품고 있는 스물일곱 가지 세상을 보여 준다. 나아가 저자가 직접 만든 그래픽이나 현장에서 찍은 사진 등 국내에서 보기 드문 도판을 대거 곁들여 이야기뿐 아니라 시각적 재미까지 더한다. 

여기 ‘사랑’이라는 글자가 있다. 인류학자라면 문화권마다 다른 ‘사랑의 표현 방식’에 대해 말할 것이고, 언어학자라면 문자권마다 다른 표기, 즉 한글의 ‘사랑’과 로마자의 ‘LOVE’와 한자 ‘愛’에 대해 논할 것이다. 그렇다면 타이포그래피 연구자는 어떨까? 타이포그래피 연구자라면 글자의 형태를 관찰하여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을까 싶다. 이처럼 세상은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같은 풍경도 다르게 보일 수 있다. 
 


『글자 풍경』은 타이포그래피 연구자의 시선으로 낯설게, 인문적 시선으로 통찰력 있게 글자에 아로새겨진 세상을 바라봄으로써, 그동안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경 과 마주하는 경험을 선사한다. 또한 저자 유지원은 타이포그래피 연구자이지만 예술, 과학, 철학 등 여러 분야를 총망라한 종합적 글쓰기를 시도함으로써 자기만의 고유한 목소리를 과감히 드러낸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다 보면, 마치 저자가 두 발로 개척한 새로운 등산로로 직접 독자들을 안내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만큼 저자의 시선과 글이 새롭고 독창적이다. 

한편 을유문화사는 광복과 함께 출발하여, 그 첫 책으로 여성 작가 이각경 선생의 한글 습자 책인 『가정 글씨 체첩』을 출간하였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인데, 이러한 해에 을유문화사에서 뜻깊게도 세계 글자의 형태와 관련한 책이 나오게 되었다. 

『글자 풍경』은 크게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는 유럽과 아시아의 글자 풍경을 다룬다. 독일, 이탈리아, 미국, 영국, 스페인, 터키, 인도, 홍콩 등 다양한 나라에서 글자가 빚어낸 도시 풍경을 그린다. 세계 최대 도시 뉴욕을 글자체 중심으로 본다면, 화려한 네온사인과 고층빌딩보다 대중교통 사인시스템을 장식한 직선 형태의 모던한 ‘헬베티카체(helvetica)’가 단연 눈에 들어온다. 신사의 도시 영국 런던은 또 어떤가. 지하철 표지판부터 조명과 간판 등 런던 거리를 보면 동글동글한 모양의 길 산스체(gill sans)가 보인다. 이처럼 1부에서는 이미 알려진 세계적 도시에서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풍경을 발견할 수 있다. 

2부에는 한글 및 한국인의 눈과 마음에 담긴 풍경을 담는다. 저자는 한국에서 ‘타이포그래피의 근대’를 연 인물로 15세기 중반의 위대한 왕이자 탁월한 학자인 세종대왕을 꼽는다. 한글 창제는 곧 ‘지식 민주화’를 의미하는 것이기에, 한국 ‘타이포그래피의 근대’는 이때부터 밝혀졌다고 보는 것이다. 2부에서는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과 한글의 글자 공간, 궁체와 명조체와 흘림체, 그리고 최근 들어 세계적으로 두각을 드러내는 한글 글자체 디자인을 조명한다. 

3부에는 우주와 자연, 과학과 기술에 반응하는 글자들을 이야기한다. 자동차를 타고 가는데 교차로에서 도로 표지판의 글자체가 잘 보이지 않는다면, 20포인트(Point)가 넘는 크기의 글자체로 만든 책을 읽는다면, 판결문을 ‘흥’과 ‘홍’이 헷갈려 잘못 쓴다면 과연 우리는 편안히 일상을 누릴 수 있을까? 이 장에서는 글자체가 우리 삶뿐 아니라 과학과 기술 등과 얼마나 관련 있는지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4부에는 바흐의 자필 악보와 윌리엄 모리스가 디자인한 책 『세상 너머의 숲(The Wood Beyond the World)』 그리고 가와세 하스이의 우키요에와 청사 안광석의 전각 등을 통해 종이에 남겨진 자국과 흔적을 사색하는 시간을 갖는다. 

인간은 왜 타이포그래피를 할까? 저자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즉 “우리 자신의 개성과 말투가 사람들의 눈에 보이고 읽힐 때 더 잘 표현되기를 바라서, 타인과 소통을 다각도로 더 잘하기 위해서, 더 아름답기 위해서, 더 기능적이기 위해서, 더 다양한 감정을 주고받기 위해서, 우리의 생각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해서”라고. 그러니까 우리는 보다 나은 공동체를 위해서, 함께 더 잘 살기 위해서 의사소통을 하고 타이포그래피를 한다. 따라서 타이포그래피는 전문 영역인 동시에 일반인도 알아 두면 좋을 교양의 영역이기도 하다. 

그래서 『글자 풍경』은 전공자를 위해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지식을 자세하게 제공하기보다는, 글자 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이 쉽고 흥미롭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비록 타이포그래피를 공부하지 않았더라도, 이 책을 통해 글자의 생태를 이해하고 그로부터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말이다. 

한편 이 책은 「중앙선데이」에서 1년간 연재한 칼럼 ‘유지원의 글자 풍경’을 바탕으로 했지만, 당시 지면 제한으로 넣지 못한 사례를 추가했고, 짧게 요약된 부분을 친절하게 풀어냈다. 그뿐만 아니라 저자의 생각을 보다 잘 드러낼 수 있도록 다섯 편의 글을 보충했고, 그림과 사진, 그래픽 등 시각적 요소도 크게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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