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저급한 술과 상류사회...음료의 문화사
[신간] 저급한 술과 상류사회...음료의 문화사
  • 김민성 미래한국 기자
  • 승인 2019.03.11 05: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법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널리 허용되는 중독성 약물은 딱 세 가지다. 바로 알코올, 카페인, 담배다. 이 세 약물은 인류에게 발견된 이래 여러 사회집단과 문화권에서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받아들여졌다. 특히 세계사 속 군사적 전쟁과 문화적 전쟁은 모두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이 약물들의 수요와 공급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물론 이 약물들 역시 사람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중에서도 알코올은 사회의 즐거움을 위한 공간, 곧 유흥을 위한 ‘공간’이 만들어지는 데에 크게 관여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공간은 시간이 흐르면서 유흥이라는 본래 목적에서 벗어나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새로운 것들(문화와 상품)’이 성장하고 번성할 수 있는 토대가 되기도 했다. 지은이 루스 볼은 이런 공간 가운데 여관(inn), 와인바(tavern), 선술집(alehouse), 커피하우스(coffee house), 한잔집(dram shop), 티하우스(tea house)를 대표적으로 꼽아 이들 공간이 당시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했는지 그 숨은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낸다. 
 

지은이는 중세가 끝나갈 무렵 여행자들이 늘어난 탓에 영국 곳곳에 자리 잡은 여관 이야기로 1장을 시작한다. 여관은 애초에 가난한 여행자들이 하룻밤 쉬며 음주를 겸할 수 있는 장소였지만, 지역과 지역 사이 사람들의 이동과 상업활동이 왕성해지면서 농산품, 공산품, 사치품 등을 정부의 감시를 피해 거래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한편으로 각 지역 여관 주인들은 서로 네트워크를 형성해 민간 ‘우체국장’ 역할까지 겸하는 것으로 짭짤한 부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여관에서 술 한 잔으로 거래를 마무리하던 관행이 당시 상업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것이다.

2장에서 지은이는 포도주를 주로 취급했던 와인바에 대해 이야기한다. 처음 와인바는 부유한 젊은이들이 술을 마시면서 사교 모임을 열던 장소였지만 지식인, 예술가, 정치인들이 인맥을 넓히기 위해 자주 찾게 되면서 나중에는 각 모임이 ‘클럽’으로 발전했다. 훗날 이 클럽들은 영국의 정치·사회·문화 영역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데, 윌리엄 콩그리브, 존 밴브루, 매튜 프라이어, 조지 스테프니 같은 작가들이 몸담은, 그리고 1714년 로버트 월폴을 시작으로 1762년까지 거의 모든 총리를 배출한 캣앤드피들 와인바의 키트캣클럽이 대표적이다. 

3장에서는 서민들의 선술집을 언급한다. 종교개혁 뒤 성당에서 술을 마시는 문화가 차츰 사라지자 마을 사람들이 찾은 공간이 바로 선술집이었다. 때마침 호프가 발견되어 저렴한 맥주 주조기술이 도입되면서 선술집이라는 공간은 서민 공동체의 주춧돌처럼 자리 잡아 번성했다. 아울러 각 지역의 선술집은 여러 기술자들의 노동조합 역할까지 감당했으며 직업소개소를 자처하기도 했다.

4장에서 언급하는 커피하우스 이야기도 흥미롭다. 오스만제국의 커피하우스에서 커피 맛에 빠진 상인 중 일부가 영국으로 그 맛을 들여오면서 커피하우스는 새로운 사교의 장으로 발돋움했다. 커피하우스는 왕정복고 시기 공화주의자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으로 평판을 얻었는데, 이후 정치·경제에 관해 토론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곳을 찾아 토론에 참여할 수 있었다. 곳곳에 세워진 커피하우스는 그 가게만의 특색을 갖게 되는데, 법률가들이 찾는 커피하우스, 인쇄·서적상이 모이는 커피하우스, 의사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커피하우스 등 특정 관심사에 맞게 커피하우스 성격이 규정되곤 했다. 그중 런던거래소 근처의 커피하우스는 업계의 중요 정보가 공유되는 공간으로 알려지면서 훗날 영국 증권거래소가 설립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상류층, 지식인, 일반 서민을 위한 공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5장에서는 선 채로 독한 술을 들이켜고 바로 자리를 뜨는 한잔집 같은 하층민과 노동자를 위한 공간도 언급한다. 이곳에서 화주가 처음 인기를 끌면서 결국에는 영국에 ‘진(Jin)’ 열풍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진을 비롯한 화주를 취급하는 한잔집 또는 진 궁전은 숱한 논란을 일으키면서도 살아남아 하층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공간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6장에서는 티하우스, 곧 찻집을 조명한다. 남자들은 여관, 와인바, 선술집 같은 공간에서 술과 함께 분위기를 즐길 수 있었지만 당시 여성들은 그런 공간에 출입할 수 없었다. 대신 여성들은 혼자서 혹은 함께 모여 차를 마시곤 했다. 19세기 들어서는 많은 여성이 공공장소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다는 사실에 염증을 느끼고 진지한 변화를 열망하게 되었는데, 티하우스는 그 열망의 중심에 있었다. 그곳에서 여성들은 ‘여성 참정권’을 위해 싸웠고 결국 그들이 승리해 여성들에게도 투표권이 주어졌다. 

주류 역사 연구자이자 주류 제조 전문가인 지은이 루스 볼은 이 책 《저급한 술과 상류사회》에서 이집트, 그리스, 아즈텍, 로마인들의 음주 문화를 탐구하는 것을 시작으로 이처럼 영국에서 들불처럼 생겨나고 사라졌던 여러 음주 공간들의 역사와 그 공간들의 사회적 역할을 추적한다. 영국국립도서관을 비롯해 유럽과 미국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150여 장의 진귀한 일러스트를 통해 지은이는 시각적으로도 무척 풍성한 재미를 선사한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것들은 유럽, 그중에서도 영국 이야기에 한정되지만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한국 독자들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다. 아마도 음주 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전 세계 여러 문화에서 공통으로 발견되기 때문일 것이다. 음식 혹은 각 나라의 소소한 문화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풍성한 일러스트와 함께 읽고 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