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크탱크로부터 듣는다] 개화당, 그들은 누구였나
[싱크탱크로부터 듣는다] 개화당, 그들은 누구였나
  • 김종학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 승인 2019.04.18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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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대사에서 ‘개화사상’은 본격적인 근대의 시작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개화파의 사상과 운동은 흔히 ‘친일파’라는 딱지에 의해 폄훼되는 경향이 있다. 이에 김종학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한일관계연구소)은 이러한 전통적인 관점에 이의를 제기한다. 2007년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일조각)>라는 책을 통해 개화당에 화두를 다뤘던 김종학 연구위원의 아산정책연구원 서평토론에서 발표한 내용을 소개한다.

 

오른쪽부터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박영효이다.
오른쪽부터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박영효이다.

일반적으로 개화당은 김옥균(金玉均)과 박영효(朴泳孝) 등 젊은 양반을 중심으로 갑신정변(1884)을 일으킨 집단을 가리키며 그 사상적 배경은 이른바 ‘개화사상(開化思想)’에 있다고 설명되어 왔다. 여기서 개화사상이란 ‘조선후기 실학을 계승하여 개항이전인 1853~1860년대 형성되어 개항 후, 새로운 사태에 대응하면서 발전된 한국인의 새로운 사상체계’(신용하)로 정의된다.

이 같은 실학의 내재적 발전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저명한 연암 박지원(朴趾源)의 손자 환재 박규수(朴珪壽)였는데, 그의 훈도(薰陶)를 통해 조선조정내에 이른바 ‘개화파’라는 일군의 혁신세력이 등장했다.

하지만 임오군란(1882)을 계기로 청으로부터 정치적 압력이 심해지자 조선의 자주독립에 대한 문제의식, 개혁의 범위와 속도에 관한 견해차로 인해 개화파는 온건과 급진의 두 파(派)로 분열되었으며, 개화당이란 곧 후자를 가리킨다는 것이 기존의 통설이었다.

이에 대해 필자는 개화당은 처음부터 외세를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조선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자 한 비밀혁명결사 또는 역모집단이었으며, 따라서 그 사상적 기원 또한 박규수를 매개로 한 조선후기 실학이 아니라 의역중인(醫譯中人:조선시대 중인의 70%를 차지한 의관과 역관)의 철저한 사회비판의식과 급진적 변혁사상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래서는 이와 관련되는 몇 가지 문제들을 검토한다.

‘개화당’이라는 명칭은 김옥균이 아니라, 일본인들에 의해 처음 붙여진 것이었다. ‘개화’라는 말은 일본의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西洋事情外篇>(1868)에서 ‘civilization’을 ‘文明’ 또는 ‘文明開化’라고 옮기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통용됐다. 이 말이 조선조정에 처음 알려진 것은 1881년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의 견문보고를 통해서였다.
 

‘개화’와 ‘개화당’이라는 말의 유래

한편, 1880년과 1881년 사이에 일본의 언론과 외무당국에서 조선의 특정 정치세력을 ‘開化黨’이라고 지칭하기 시작했는데, 전자의 경우 ‘開化黨’은 오늘날의 ‘開化派’와 유사한 의미로서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개혁세력을 가리켰다. 당시 일본 언론과 외무당국은 개화라는 말을 조선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으로 내세웠으며, 이에 따라 개화당은 자국의 정책을 관철하는 데 이로운 세력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 학계에 알려진 문헌에 따르면, 김옥균이 개화당을 자처하기 시작한 것은 1884년 5월 일본에서 귀국한 뒤의 일이었다. 당시 세 차례에 걸친 차관교섭에서 모두 실패한 김옥균은 최후의 수단으로 후쿠자와 유키치 및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郞)와 같은 일본의 재야세력과 정변을 일으키기로 결탁한 상태였다. 다시 말해 개화라는 말은 갑신정변의 명분이자 후쿠자와 및 고토와의 제휴를 나타내는 일종의 구호였다.

그런데 정변을 이끈 양반 지도층과 그에 가담한 중인 이하 서인과 천민들이 개화를 이해하는 방식에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즉 전자는 고종의 측근이 주도하는 미온적 개혁(‘개진주의’)과 구별되는 ‘참된 개혁’이라는 의미로 쓴 반면, 후자는 신분차별 없는 평등한 세상으로의 이행이라는 뜻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화라는 말이 갖는 모호함은 오히려 갑신정변에 가담한 다양한 세력의 욕망을 유연하게 반영하는 기능을 했다.

개화당의 인물들. 기념앨범을 들고 있는 이가 서광범, 중앙에 학모를 쓴 소년이 박용하다. 이외에도 유길준·홍영식· 김옥균 등이 있다. 갑신정변 직전 찍은 사진이다.
개화당의 인물들. 기념앨범을 들고 있는 이가 서광범, 중앙에 학모를 쓴 소년이 박용하다. 이외에도 유길준·홍영식· 김옥균 등이 있다. 갑신정변 직전 찍은 사진이다.

개화당의 기원과 온건-급진

이후 개화는 1894년 청일전쟁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조선사회에 통용된다.(김영작) 한편,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난 후 후쿠자와는 時事新報에 ‘조선에 일본당 없다(朝鮮に日本黨なし)’라는 논설을 게재하고 갑신정변의 배경을 독립당(獨立黨) 대 사대당(事大黨)의 대결로 설명하는 프레임을 창안했다.

그 목적은 후쿠자와 자신과 일본인들의 정변개입 사실을 은폐하려는 것이었다.(강동국)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이인직·이광수·최남선 등에 의해 ‘독립’ 대 ‘사대’라는 프레임은 마침내 ‘개화’ 대 ‘수구’라는 프레임으로 발전했다.(유승렬) 그리고 1960년대 들어 식민사학의 정체성론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학계에서 내재적 발전론이 유행함에 따라 개화당의 사상적 연원을 조선후기 실학에서 구하는 담론(실학-개화사상 담론)이 정설로 확립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개화당의 기원에 관해 직접 증언한 문헌은 2개가 있다. 하나는 박영효가 1931년 이광수와 한 인터뷰이고, 다른 하나는 오경석의 아들 오세창의 증언이다.

전자에 따르면, 박영효는 “<연암집>에 귀족을 공격하는 글에서 평등사상을 얻었지요”라고 하여, 신사상(新思想)의 핵심을 평등사상이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인터뷰 기록은 지금까지 개화당의 박규수의 문하에서 만들어진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로만 인용됐을 뿐, 정작 박영효가 개화사상의 핵심을 평등사상이라고 정의한 데 대해선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개화당의 급진적 평등사상이 박규수에게서 나왔다는 것이 난센스에 가깝다는 것, 그리고 개화당의 목적은 조선의 독립과 부국강병에 있었다는 통념과 배치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편, 박규수가 정계에서 은퇴한 것은 1874년, 김옥균과 박영효가 처음 만난 것은 1877년이었다. 그에 반해 영국 외교문서에는 이미 1874년부터 오경석이 북경주재 영국공사관을 몰래 찾아가 수차례에 걸쳐 조선에 군함을 파견해줄 것을 청원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

일반적으로 임오군란은 개화파가 급진과 온건의 두 파로 분열된 계기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주장에 따르면 개화당은 이미 1871년에 결성되어 1874년과 1875년에는 오경석이 영국공사관에 군함 파견을 청원하고, 1879년에는 승려 이동인(李東仁)이 일본에 밀파되어 책동을 벌였으므로 이는 사실로 보기 어렵다.

따라서 임오군란은 개화파가 양분된 계기가 아니라, 그 때까지 비밀리에 음모를 꾸미던 비밀결사 개화당이 고종의 신임을 얻어 비로소 중앙정계에서 기존 정치세력과 권력다툼, 특히 외교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을 시작한 계기로 봐야 한다. 왜 김옥균과 박영효는 임오군란 직후에 갑자기 중용됐을까? 당시 조선정부의 군사적·재정적 기능은 사실상 마비상태에 가까웠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기무처(機務處)의 설치이다. 지금까지 기무처는 임오군란의 와중에 흥선대원군에 의해 통리기무아문이 폐지된 후, 통리아문이 복설될 때까지 설치된 임시기구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실제로 기무처는 김윤식(金允植)·조영하(趙寗夏)·김홍집(金弘集)·어윤중(魚允中)·신기선(申箕善) 등 이전까지 고종과 민씨 척족의 개혁사업을 보좌하던 소장관료(‘온건개화파’)들이 임오군란을 계기로 국왕의 국정간여를 제한하고 조선을 재건하기 위해 만든 비상기구였다.

이들의 국가재건 구상의 핵심은 대청외교(對淸外交)의 강화, 보다 정확하게는 청으로부터 가능한 한 많은 군사·재정·외교적 원조를 얻는 데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응하고 신하들 간의 권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종은 친일적 경향을 띠는 김옥균과 박영효를 발탁해서, 차관을 얻어오라는 밀명을 줘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했던 것이다.

어떤 정책이 외견상 유사하다고 해서, 곧 그 이면의 정치적 동기 또한 같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김옥균과 후쿠자와 유키치의 관계

1873년 고종이 친정을 시작한 이후 국왕과 왕비, 민씨 척족 그리고 흔히 ‘온건개화파’로 분류되는 일군의 소장관료들은 제한적 범위 내에서 문호개방과 부국강병 정책을 추진했다. 이들의 정치적 목적과 이해관계는 근본적으로 기존 질서와 권력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었다.

그에 반해 비밀결사 개화당은 외세를 업고서라도 그것을 전복하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정치학적 견지에서 보면 양자는 현상유지세력과 현상타파세력으로서 서로 용납하기 어려운 정적(政敵)의 관계에 있었다.(이용희) 사태를 더 복잡하게 만든 것은, 현상유지세력 안에서도 국왕과 신료들 간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서로 달랐다는 사실이다. 즉, 전자는 신하들을 서로 갈등하고 경쟁하게 만듦으로써 국왕 권력과 왕실의 권위를 제고하려고 한 반면, 후자는 왕권이 비대해지는 것을 제한하며 왕권과 신권 간의 전통적 균형을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개화당의 ‘비밀외교’는 이와 같은 착종된 정치현실의 산물이었다.

일반적으로 후쿠자와는 20여 년 전의 일본과 지금 조선의 모습이 유사한 데서 오는 동정상련(同情相憐)의 순수한 호의에서 김옥균 등을 원조하였고, 김옥균은 후쿠자와의 가르침을 받고 비로소 근대 국제관계에서의 독립의 의미를 깨달아 조선의 개혁과 독립자주에 투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김옥균이 1881년에 후쿠자와를 처음 만나기 수년 전부터 이미 개화당은 암약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통설은 날조된 신화에 가깝다.

후쿠자와는 1881년 10월 <時事小言>의 발표를 기점으로 서양열강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일본이 무력을 써서라도 아시아의 맹주가 되어야 한다는 팽창주의 노선으로 선회했다. 그가 가장 우려한 것은 조선과 중국이 세계 정세를 파악하지 못해서 끝끝내 ‘문명개화’, 즉 서양문물의 수용을 거부하다가 다른 열강, 특히 러시아가 이를 차지하는 사태였다. 한편, 김옥균은 처음부터 정권을 장악하는 데 필요한 원조를 구하려는 의도를 갖고 일본에 건너왔다. 따라서 양자의 제휴는 학문적 존경심이나 정서적 유대 이전에 정치적 이해관계의 산물로 봐야 한다.

후쿠자와는 1882년 김옥균과 박영효가 두 번째로 일본에 건너왔을 때 유력한 재야정객인 고토 쇼지로를 소개해 줬다. 이듬해인 1883년 10월 김옥균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일본 외무경의 냉대로 차관교섭이 최종 실패하자 거사에 필요한 자객과 자금을 제공받는 대가로 고토에게 조선개혁의 전권을 위임하겠다고 밀약했다.(<朝鮮內政改革意見書>) 이에 대해 고토는 밀약의 증거로 고종의 친서를 요구했는데, 김옥균은 어보(御寶)와 교지를 위조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세 차례에 걸친 김옥균의 도일(渡日)은 모두 차관교섭과 관계돼 있었는데, 차관의 성사 여부는 국왕의 신임과 정권장악 음모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점에서 개화당의 명운과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자 후쿠자와는 時事新報에 ‘脫亞論’을 발표하여 악우(惡友)와 함께 하는 자는 함께 악명을 면할 수 없으니 마음으로부터 동방의 악우를 사절한다고 선언했다.

이는 김옥균과 고토를 통해 조선 내정을 개혁하려고 한 구상이 좌절된 데 대한 실망과 분노의 표출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후쿠자와와 고토는 단념하지 않았다.

1894년에 이르러 이번에는 유길준을 통해 같은 계획을 다시 시도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조선에서 중대한 분란을 일으켜 일본 정부의 국제적 위신을 실추시키고 곤란에 빠뜨림으로써 정국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자유당(自由黨) 인사들의 정치적 계산도 작용하고 있었다.
 

김종학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김종학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개화당 운동의 역사적 의미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면 왕조 말기에는 언제나 사회적으로 신분차별이 고착화되고, 이러한 현실에 절망한 차상위 신분의 지식분자가 중국에 건너가 그곳에서 얻은 관직 또는 새로운 학문의 권위를 앞세워 개혁을 시도하거나 역성혁명에 투신하는 패턴이 반복됐다.

나말여초의 육두품(六頭品)이나 여말선초의 향리층(鄕吏層)이 바로 그런 존재들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1870~1880년대 개화당 운동은 비록 과격한 것이기는 해도 아주 예외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조선왕조의 붕괴를 예고하는 서곡과도 같은 것이었다.

19세기의 수많은 민란과 역모사건 가운데 개화당 운동이 단연 이채를 발하는 것은 양반들의 폐쇄적 카르텔을 깰 수단을 임진왜란 이후로 누대의 원수인 일본이나 전통적으로 금수로 멸시해온 서양인들의 힘에서 구한 사실에 있다.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누구라도 손을 내주기만 하면 이들은 기꺼이 잡을 용의가 있었고, 그런 의미에서 이들에게 ‘친일파’나 ‘친영파’와 같은 레터르를 붙이는 것은 온당치 않다.

또한 이들은 같은 조선인보다는 서양인이나 일본인을 더 신뢰해서 스스럼없이 자신들의 정체와 음모를 털어놓고 도움을 청했는데, 여기에는 조선 땅을 벗어나 중국의 명망 높은 문사나 관리들과 신분구별 없이 인간적 교유를 나누는 데서 더할 나위 없는 해방감을 느꼈던 중인의 계급적 심성이 일정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개화당의 연구에서 국내 문헌보다 오히려 외국의 외교문서가 더 큰 사료적 가치를 갖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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