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분석] 날조된 김일성의 정체를 밝힌다
[전문가 분석] 날조된 김일성의 정체를 밝힌다
  • 유동열 미래한국 편집위원·자유민주연구원 원장
  • 승인 2019.04.29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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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5일은 북한 최고 명절인 김일성의 107회 생일날이었다. 북한은 김일성을 ‘태양’이라 칭하고 그의 생일날을 ‘태양절’이라고 명명하며 매년 대대적인 축하행사를 개최하고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북한 당국은 김일성을 일제에 대항해 조선의 해방을 주도한 항일애국지도자로 선전하고 있으나, 이는 북한 당국의 역사 날조임을 밝힌다. 따라서 북한과 국내 일부 학자 및 종북세력들에 의해 항일애국투사로 둔갑된 김일성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굴절된 한국 현대사를 재정립하는 중요한 작업 중 하나이다.

 

한국전쟁 당시 양복 입은 김일성의 초상화에 검정 페인트칠을 하는 미군
한국전쟁 당시 양복 입은 김일성의 초상화에 검정 페인트칠을 하는 미군

김일성에 대한 북한 주장의 허구성

첫째, 북한은 김일성의 가계를 외세침략에 대항한 애국적이고 혁명적 가정으로 철저히 날조하고 있다.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와 조부 김보현은 북한 주장처럼 샤먼호사건과 일제침략에 대항한 열렬한 애국자가 아니라 평범한 농부였다. 다만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은 어느 정도 학식과 민족의식도 가진 인물이었는데, 고향을 떠나 만주에서 한의업에 종사했고 한때 민족주의적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正義府) 계통의 백산무사단(白山武士團)이라는 조직의 일원이기도 했으나, 북한 주장처럼 불요불굴의 혁명투사는 아니었다.

어머니 강반석도 북한 주장처럼 조국의 광복과 여성해방을 위해 싸운 열렬한 혁명투사나 공산주의 여성운동의 시초를 열어놓은 탁월한 지도자도 아니고, 보통 가정주부에 불과했다. 다시 말해 김일성의 가계는 역사적 문건들에 자신들의 이름을 남길 만한 행동을 하지 않고 평범한 서민의 삶을 살다가 간 보통사람들이었다.

둘째, 김일성이 1926년 10월 17일 결성했다는 비합법 반일청년혁명조직이라는 타도제국주의동맹도 북한의 철저한 역사 날조이다. 실제 타도제국주의동맹은 1926년 당시 존재하지 않았다. 1930년경 민족주의단체였던 국민부 산하에 남만 한인청년동맹 계통의 청년들이 만든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김일성이 결성했다고 조작한 것이다. 당시 14세에 불과한 김일성이 사회주의사상에 심취해 반일지하혁명 조직을 결성하고, 지휘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북한에서 타도제국주의동맹의 존재가 등장한 것은 1968년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이란 책 발간 이후이다. 이전의 북한 문헌에서는 그들 주장대로 그렇게 중요하고 역사적 의의가 큰 이 동맹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었던 것이다. 이는 북한 역사날조의 일면을 보여준다.

셋째, 1930년 6월 30일 김일성이 중국 만주 장춘현의 카륜에서 소집했다는 ‘공청 및 반제청년동맹 지도간부회의’(일명 ‘카륜회의’)도 역사조작이다. ① 1930년 당시 김일성은 남만주에서 민족주의단체인 국민부(國民府) 산하 청년조직인 ‘남만 한인청년동맹’에서 평 조직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바, 주체사상의 원리를 천명하거나 독자적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며 조선혁명의 주체적 노선을 정립할 여유나 위치에 있지 않았다. ② 당시 김일성이 ‘조선혁명의 진로’ 논문을 ‘볼쉐위크’지에 수록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동 잡지는 1929년 4월 서울 상해파라는 공산주의그룹이 창간한 잡지로 그런 논문이 수록된 적이 없다. ③ 당시 나이 18세인 김일성이 주체사상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주체사상을 실질적으로 정립한 것으로 알려진 황장엽 선생(전 조선로동당 비서)에 의하면 주체사상은 1970년대에 그 이론적 토대를 갖춘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

넷째, 김일성이 1932년 4월 25일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창건했다는 항일무장군사조직인 조선인민혁명군(이전의 조선혁명군, 반일인민유격대 포함)도 역사조작이다. 북한은 조선인민혁명군이 김일성의 영도 하에 15년에 걸친 항일무장투쟁에서 위대한 승리를 이룩하였고, 해방후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은 당과 국가, 군대 창설의 골간이 되었으며 현재의 ‘조선인민군’(1948년 2월 8일 창건)으로 직접 계승, 발전되었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김일성이 조직했다는 조선혁명군은 국민부(國民府) 산하 독립군조직으로 김일성이 조직한 것이 아니다. 김일성은 1930년 4월 조선혁명군에서 탈퇴한 공산주의계열의 대표격인 이종락(李種洛, 당시 조선혁명군 제9대장)이 결성한 ‘국민부 탈퇴파 조선혁명군’에 1930년 7월초 참사(參士: 하사관) 자격으로 입대해 마적 활동하다가 1931년 1월 동 조직이 괴멸되면서 자연스럽게 이탈했다. 김일성이 1932년 결성했다는 반일인민유격대와 1934년 조선인민혁명군 역시 조작이다. 당시 김일성은 만주 동만지방의 중공 유격대(1933년 중국공산당 동북인민혁명군으로 통합)에 입대해 중국공산당을 위해 충성을 바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북한 자체의 기록도 각 연도별로 상이하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북한은 1971년판 력사사전에서 1932년 ‘항일유격대’를 창건했다고 밝혔으나, 1979년 조선로동당략사나 그 이후 자료에서는 이를 ‘반일인민유격대’로 명명하는 등 고유명사조차 상이하며, 연도도 약간씩 달리하고 있다. 이는 조급하게 날조를 하다보니 다른 사건과 앞뒤가 맞지 않아 발생한 문제이다. 이는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사에서 흔히 발생되는 현상이다.

다섯째, 1936년 5월 5일 김일성이 무송현 동강회의에서 창설했다는 전국적 규모의 반일민족통일전선 조직이라 선전되는 조국광복회 역시 북한의 철저한 역사날조이다. 조국광복회의 원래 명칭은 ‘재만한인 조국광복회’(在滿韓人 祖國光復會)이며 중국공산당이 항일연합전선을 강력히 주장한 이른바 ‘8·1선언’(1935년)을 한 이후 만주에서 항일한인 통일전선체를 결성하기 위해 1936년 6월 10일 중국공산당의 지령을 받아 한인당원인 전광(全光)에 의해 결성되었다. 동 단체의 회장이었던 전광의 본명은 오성륜(吳成崙)으로 중국의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제3사장(후에 제6사장)으로 김일성의 직속 상관이었다.

당시 전광은 조국광복회의 지부를 ‘000 공작위원회’라는 명칭으로 조선 내 접경지역에 결성했다. 다만 김일성은 전광의 지휘하에 ‘재만한인 조국광복회 장백현 공작위원회’에 일부 간여했을 뿐이다. 따라서 김일성이 조국광복회를 손수 조직하고 회장으로 추대되어 각종 항일투쟁을 주도했다는 주장은 터무니 없는 조작인 것이다.

여섯째, 북한이 역사조작한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사 중 가장 빛나는 업적으로 찬양되고 있는 1937년 보천보전투도 역사조작이다. 보천보전투란 1937년 6월 4일 김일성이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를 인솔하고 일제의 전략상 요충지인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보(현재 양강도 보천군)를 습격해 승리를 거뒀다는 전투를 말한다.

그러나 당시 보천보전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보천보전투를 수행한 부대는 북한이 주장하는 것처럼 김일성의 조선인민혁명군이 아니라 중국공산당 동북항일연군 제6사 북조선원정대 사령이었던 김일성(북한의 김일성 즉 김성주와 다른 인물: 1901년 함남생, 모스크바공산대학 졸업, 1931년 중국공산당 가입, 동북항일연군 제6사장, 1937년 11월 13일 무송현 양목정자에서 만주군과의 전투중 사망)의 부대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보천보전투의 성과는 북한이 선전하는 것과는 달리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당시 보천보는 1380여명(일본인 50명, 중국인 10명, 조선인 1323명)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로 무장병력은 겨우 5명의 일본주재소 순사(경찰)뿐인 바, 동북항일연군 제6사의 습격에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김일성은 중국공산당 휘하의 동북항일연군 제6사 소속으로 중국공산당을 위해 일부 항일투쟁을 전개한 것에 불과하다.
 

1953년 7월 평양 집무실에서 유엔 측과 체결한 휴전 협정서에 서명하고 있는 김일성

김일성의 실제 경력, 그리고 마적단

북한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지금의 평양시 만경대)에서 아버지 김형직(金亨稷)과 어머니 강반석(康盤石) 사이에서 3남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金成柱)이다.

김성주는 그의 아버지 김형직이 자주 거처를 옮겨 다녔기 때문에 어린 시절에 부모와 함께 유랑생활을 했다. 김성주는 부모가 고향을 떠나던 6살 때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 하리 칠곡에 있던 외조부 강돈욱(장로) 집에 맡겨졌으며, 2년 후 아버지가 만주 장백현 팔도구(八道溝)에서 자리를 잡게 되자 부모와 합류하여 생활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성주는 팔도구 소학교에 입학했다가 몇 년 후 다시 외가로 보내졌다. 아버지 김형직이 일제 경찰에 붙잡혀 압송되던 도중에 도망쳐 피신생활을 하게 되자 어머니 강반석, 동생 철주·영주 등 가족은 임강현에 있는 숙부 김형권의 집으로 갔고, 김성주만 다시 외가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김성주는 외가가 있는 마을의 창덕학교(彰德學校) 3학년으로 편입했고, 5학년이 되던 1925년 초에 김형직이 만주 무송 소남통에 무림의원이라는 한의원을 차리고 자리를 잡자 다시 만주 부모 곁으로 갔다. 김성주는 이듬해에 만주 화전현 화전(樺甸縣 樺甸)에 있는 한국인 민족주의적 교육기관인 화성의숙(樺成義熟)에 입학했다.

민족주의 성향이었던 김형직이 아들 김성주에게 민족주의 교육을 시키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김성주는 이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곧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아버지 김형직이 1926년 6월 5일 ‘살부회’(殺父會)라는 공산주의계열의 테러단체에 의해 암살당했기 때문이다.

김성주는 아버지가 사망한 무렵 무송일대에서 활약하던 마골(馬骨)이란 자가 이끄는 공산 폭력배 조직에 가담했다. 이것이 김성주와 공산주의자와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었다. 마골의 폭력조직은 민족주의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와 무장부대에 의해 소탕되었지만, 그 당시 김성주는 나이가 어린데다가 아버지가 민족주의자였다는 것이 참작되어 처벌되지 않았다. 대신에 민족주의자들은 김성주를 봉천에 있는 중국인 학교인 평단중학교(平旦中學校)에 입학시켜 줬다. 그러나 김성주는 본래 거친 성미에다 마골 일당한테서 배운 폭력적 행동으로 인해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채 곧 평단중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어머니 강반석은 죽은 김형직 친구들의 도움을 얻어 김성주를 1927년 봄 길림(吉林)에 소재한 중국인학교 육문중학교(毓文中學校)에 입학시켰다. 육문중학교에 다니는 동안 김성주는 길림 북한교회(목사: 손정도, 전 국방장관 손원일 부친) 소속 소년회에 가입했고, 얼마 안 되어 그 소년회의 회장이 되었다. 그러나 김성주는 육문중학교도 오래 다니지 못했다.

당시 길림지역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이 청년조직을 만들기 위한 회합을 가졌는데, 김성주는 이때 공산주의자에 포섭되어 이 회합에 참가했었다. 일제의 사주를 받은 만주 군벌의 경찰이 이 회합에 참가했던 사람들을 모조리 체포하려고 하였으나 김성주는 손정도 목사의 도움으로 곧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곳에 더 머물 수 없게 된 그는 길림을 떠나야 했고 학교도 그만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가 1929년 5월 김성주의 나이 17세 때의 일이다.

길림에서 도망친 김성주는 이통현(伊通縣) 고유수(孤楡樹)에서 활동하고 있던 친공산주의 성향인 소규모 한국인 무장부대를 찾아가 그 대원이 되었다. 이 무장부대의 두목 이종락(李鐘洛)은 무장부대와 더불어 길흑농민동맹(吉黑農民同盟)이라는 공산주의 폭력단체를 조직하여 그 일대의 농민들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이고 자기들에게 협조하지 않는 한국인이나 중국인 부농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종락은 또 1930년부터는 20-30명 밖에 안 되는 자기의 무장부대에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라는 거창한 이름을 제멋대로 붙였고, 뒤이어 그 부대의 명칭을 ‘재만조선혁명군사회부’로 바꿨다. 김성주는 이종락 밑에서 이러한 길흑농민동맹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조선혁명군의 일원으로서 한국인 농민들을 상대로 세금징수와 폭력행동을 자행했었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더 정확히 말하자면 1930년 11월부터 김성주는 김일성(金一星)이라는 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종락이 이끈 길흑농민동맹의 횡포가 심해지자 당시 만주를 지배하고 있던 군벌정권은 1931년 1월 길흑농민동맹 및 조선혁명군에 대한 일제 소탕에 나섰다. 이 소탕작전에서 두목 이종락과 대부분의 대원들이 체포되어 길흑농민동맹과 조선혁명군은 와해되었다.

김일성은 이때 체포를 모면하여 무송으로 도망가서 그 곳에서 소규모 공산주의 무장폭력단체를 조직했다. 그리고서는 혁명을 위한 무기를 확보하고 군자금을 마련한다는 명분으로 중국인들의 집을 대상으로 약탈을 전개했다. 김일성(金一星)이라는 별명을 사용하는 김성주가 이끄는 공산폭력단체는 악명이 높았고, 그들을 방치할 경우 김일성 일당에 대한 중국인들의 증오가 한국인 전체에 대한 중국인들의 증오로 확대될 우려가 컸다. 이에 민족주의 독립운동 세력은 김일성 일당을 체포·추방하기로 작정했으며, 그러한 일을 당시 흥경현 왕청문(興京縣 旺淸門)에 본부를 두고 있던 진짜 조선혁명군이 맡았다.

1932년 2월 진짜 조선혁명군의 한 부대가 김일성 일당을 체포하기 위해 무송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김일성 일당은 진짜 조선혁명군 부대원들이 잠자고 있던 사이에 기습하여 전원을 몰살하고 무송을 떠나 잠적해 버렸다.

그후 김일성는 안도경찰대장 무흥운(중국인)의 양자로 있다가 무흥운이 일본군에 총살되자, 무흥운의 부하들과 함께 입산 도주했고, 1932년 여름부터 안도현(安圖縣)을 근거로 활약하던 비공산계열의 중국인 항일무장부대인 동북의용군 오의성(吳義成) 부대의 당차부(당번병)로 가담했다.

김일성이라는 별명을 사용한 김성주는 이때부터 중국 동북의용군 일원으로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했다. 일제의 만주침략이 강화되자 비공산계의 중국인 항일무장부대인 동북의용군과 공산계의 중공당 항일무장부대인 동북인민혁명군은 일제에 효율적으로 저항하기 위해 서로 통합하기로 합의, 1936년 봄에 양측 군대를 통합하여 ‘동북항일연군’을 만들었다.

 

김일성 사망을 알리는 조선일보 호외. 김일성은 1994년 6월 15일 카터 전 미 대통령과 면담 후 7월 8일 사망했다.
김일성 사망을 알리는 조선일보 호외. 김일성은 1994년 6월 15일 카터 전 미 대통령과 면담 후 7월 8일 사망했다.

전사한 상관의 이름 金日成을 도용한 김성주

김성주는 중국공산당 동북항일연군의 제1보로군 제2군 제6사의 부대원이 되었다. 김성주는 이 무렵에 중국공산당 당원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제6사의 사장은 한국인 ‘金日成’이었고, ‘金一星’이라는 별명을 사용한 김성주는 그 ‘金日成’의 하급부대원이었던 것이다.

당시 제6사의 사장 한국인 ‘金日成’은 1937년 만주군의 매복에 걸려 전사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 당시 제6사장이 김성주라는 설과 ▲당시 제6사장은 1937년에 전사한 김일성이며 김성주는 제6사의 부대원으로 金一星이라는 별명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설이 학계에서 대립하고 있으나, 필자는 후자 입장이다. 이는 당시 일본 경찰과 혜산사건 재판기록에서도 확인된다.

김성주는 ‘金日成’부대의 일원으로서 중국공산당을 위해 항일투쟁에 참가한 적이 있으며, 1937년 보천보전투도 이의 일환이었다. 일제는 1939년부터 만주지역의 항일유격대들에 대한 소탕작전을 강화했으며, 동북항일연군은 이때부터 1941년 초에 거의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동북항일연군의 중국인 및 한국인 잔존부대원들은 국경을 넘어 러시아(구소련) 땅으로 도피했으며, 김성주도 다른 잔존부대원들처럼 1940년 구소련 땅으로 도피했다.

구소련은 이들 동북항일연군의 잔존부대원들을 시베리아의 오케안스크에 수용했다가 1942년부터는 하바로브스크 근처의 브야츠크에 병영을 만들어 수용했다. 이들을 수용 관리한 소련군 극동군사령부 정찰국은 이들 한국인과 중국인들을 규합하여 88특별여단을 결성했다. 88여단은 중국인 100명, 한국인 60명, 구소련인 40명, 도합 200명 정도의 인원으로 구성되었으며 단장은 중국인 주보중이었다. 88여단은 전투부대가 아니고, 만주와 한반도 북단지역에 대한 정찰활동만을 하는 부대였다. ‘金日成’이라는 별명을 사용한 김성주는 이 88여단에서 소련군 대위의 임시계급장을 달고, 제1대대장으로 활동했다.

김성주는 88여단의 일원으로서 4-5명씩의 소규모 부대를 편성하여 소련군을 위한 항일첩보활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김성주는 1941년부터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소련군을 위해 이러한 소조활동을 몇 차례 전개했으며,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1945년 9월 귀국하기 직전 소련군으로부터 적기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김성주는 소련군이 1945년 8월 9일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대공세를 전개할 때도 대일전투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88여단의 임무가 전투가 아니라 정찰·첩보활동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성주는 북한에 진격한 소련군 전투부대와 함께 귀국하지 못하고, 소련군의 북한지역 점령이 완료된 1945년 9월 19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소련 군함 브가쵸브호를 타고 구소련군의 지시와 보호를 받으며 88여단에 소속되어 있던 다른 한국인 대원들과 함께 원산항으로 귀국했다.

당시 김성주는 소련군 군복에 대위계급장(임시계급장임)을 달고 있었으며 직책은 소련군 평양지구 위수사령부 부책임자였다. 당시 김성주는 소련극동군 군사위원이었던 스티코프에 의해 북한의 통치자로 내정되어 있었다. 소련이 김성주를 북한의 통치자로 내정했던 이유는 소련의 지시에 무조건 복종하여 소련의 북한 공산화정책을 충실히 실천할 인물로 적합했기 때문이다.
 

조선독립이 아닌 중국공산당과 소련공산당을 위한 항일활동

소련은 1945년 10월 10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결성하고, 김일성을 비서(부책임자)로 앉혔다. 소련군정은 1945년 10월 14일에는 ‘소련군 환영 평양시민 군중대회’를 개최하고 겨우 33세에 불과한 김성주를 ‘金日成장군’으로 소개하였다. 이날 이후 김성주는 완전히 金日成장군으로 공식화된다.

김일성은 북한이 주장하듯이 독자적으로 조선독립을 위해 백두산를 근거지로 하여 항일무장군사조직인 조선인민혁명군을 지휘하며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하여 조선의 해방을 성취한 것이 아니라, 1920년대는 일부 비적활동을, 1930년대에는 중국공산당을 위해, 1940년대는 소련공산당을 위해 일부 항일활동을 전개한 것에 불과함을 지적한다.

북한 김씨왕조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이른바 ‘조선혁명 전통’이란 북한당국에 의해 날조된 항일무장투쟁사에 근거한 것으로 이의 진실을 알게 되면 철옹성과 같은 김씨정권(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정통성은 한낱 모래성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북한 자유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북한 정권의 아킬레스건인 날조된 김일성의 허구성을 명백히 알리는 전략적 수단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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