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기의 한국경제 ] 상속세, 약탈적 평등주의에 사로 잡히면 안 된다
[ 위기의 한국경제 ] 상속세, 약탈적 평등주의에 사로 잡히면 안 된다
  •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19.05.10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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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상속세 부담을 완화하는 추세다. 한국만 역주행하고 있다.

우리나라 상속세는 특히 기업 상속에 가혹하다. 한국의 상속세 최고세율은 50%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인 26%의 두 배이다. 여기에 최대주주의 지분이 50%를 넘으면 경영권 프리미엄 30%가 할증되어 실제 최고세율은 65%(50%x1.3배)가 된다. 그렇게 되면 최고 세율이 55%인 일본 보다 높다.

세계 각국은 상속세 부담을 낮추거나 폐지하고 있다. 2018년 현재 OECD 35개 회원국 중 13개국이 상속세를 폐지하거나 상속세를 부과하고 있지 않다. 대표적인 사회민주주의 국가인 스웨덴은 2005년부터 상속과세를 폐지했다. 그밖에 싱가포르, 홍콩, 중국, 러시아도 상속세가 없다.

이들 국가가 상속세를 폐지한 것은 전체 세수에서 상속세가 차지하는 비중이 1% 정도에 불과한 상황에서 국부 유출 등 부정적 영향을 주는 상속세를 굳이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피상속인(사망자)이 부를 축적하는 단계에서 이미 세금을 납부했기 때문에 사후(死後)에 다시 과세할 경우 ‘이중 과세’가 된다는 것이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가업(家業)을 잇는다’는 말을 한다. 가업을 잇는다는 것은 미담(美談)이다. 그렇다면 재벌의 경영권 승계는 ‘가업을 잇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양자 간에는 본질적 차이가 없다. 다르다면 ‘작은 것’의 대물림과 ‘큰 것’의 대물림의 차이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작은 것’의 대물림은 선(善)으로, ‘큰 것’의 대물림은 악(惡)한 것으로 ‘경계의 대상’이 된다. ‘이중 잣대’를 대서는 안 된다. 경영권 승계는 그 기업이 최소한 현재까지 계속기업(going concern)으로 성공해 왔음을 의미한다. 예컨대 도산한 한보철강의 경영권 승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따라서 약탈적 상속세율을 부과해 ‘성공한 기업’의 경영권 승계를 사실상 금지하는 것은 성공을 처벌하고 부를 파괴하는 것이다.

경영권 승계는 사적자치 영역이다. 일반대중이 ‘여론의 옷’을 입고, “기업가 정신이 유전되느냐” 식으로 개입할 사안이 아니다. 기업을 자식에게 물려준다고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전문경영인에게 위임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경영권 승계의 성공 여부는 ‘비인격적’ 시장이 엄정하게 판정한다. 경영권 승계의 안착 여부는 시장의 몫이다. 65% 상속세율을 부과하는 논거는 무엇인가. 상속세율 65%를 ‘국가의 청구행위’로 해석하면 국가가 기업이 그만큼 성장하도록 유형·무형으로 도와줬어야 한다.

하지만 국가가 특정기업을 도와줄 수는 없다. 그렇다면 기업 활동이 수행되도록 제도적 인프라를 만들어 줬다는 것인데, 그것을 이유로 65%의 상속세를 요구할 수는 없다. 역설적으로 국가는 기업이 성장하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고 있다. 65% 상속세율은 설명이 안 된다.

우리는 ‘동일선 상의 출발’이라는 명분에 포획된 상속세의 미몽(迷夢)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상속세를 100% 부과하지 않는 한 동일한 출발선 상에 서게 할 수 없다. 상속세율 인하를 재벌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음모로 여기면 선택지를 스스로 좁히는 것이다.

이제는 상속세에 대한 신화(神話)를 버려야 할 때이다. 상속세 강화로 얻어지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글로벌 경쟁 환경 하에서 ‘발로 하는 투표’(voting by foot)는 전(全)지구적 차원에서의 자원배분의 최적화를 가능하게 한다. 형평을 높인다고 세금을 많이 받으려 하다가는 세금 낼 사람과 기업을 모두 잃게 된다.

상속세를 폐지하기 어렵다면 최소한 유연하게 제도를 운영해야 한다. 부동산, 주식 등을 상속받더라도 이를 현금화하지 않고 생산과정에 다시 투입하는 경우, 상속세 부과는 마땅히 이연되어야 한다. 상속과세의 자본이득과세로의 전환도 상속세 완화의 대안이 될 수 있다. 평등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경제를 도덕률로 재는 원리주의 역시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다. ‘고래’가 해체되어 죽은 고기로 거래되면 모두 ‘가난이라는 동일한 출발선상’에 서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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