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이 법치인가? 훼손당하는 사법 독립
촛불이 법치인가? 훼손당하는 사법 독립
  • 김익환 전 대구고등법원 판사
  • 승인 2019.06.10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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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핵심가치인 사법독립원칙이 민주주의에 의해 훼손당한다는 주장은 글자 그대로는 모순(矛盾)이다. 그것은 마치 분리할 수 없는 미립자(微粒子)를 이루며 헌법질서를 지탱하고, 헌법적 가치의 기초를 이루기 때문에 서로 모순될 수 없다. 그런데도 현실에서 그런 모순적 상황이 오늘날 이 나라 우리 목전에서 혼란스럽게 전개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이른바 촛불민주주의, 지난 세월 한국적 민주주의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특정 언어로 한정, 표현되는 그 민주주의가 법치주의, 사법독립원칙을 무시한 채 활개를 치고 심지어는 우리의 헌법적 기초인 자유민주주의조차 흔들려고 하는 것 같다.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왼쪽부터), 고영한, 박병대 전 대법관이 서울중앙지법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 연합
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왼쪽부터), 고영한, 박병대 전 대법관이 서울중앙지법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 연합
고영한 전 대법관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왼쪽부터), 고영한, 박병대 전 대법관이 서울중앙지법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 연합
박병대 전 대법관

필자는 촛불민주주의가 지닌 핵심적 가치가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헌법적 가치에 기초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무지하다. 이른바 촛불민주주의에 의하여 집권한 현 정부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헌법적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지 조차도 잘 모른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법치주의, 사법독립원칙 등의 견고한 기초 위에 건설된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가 현재 심하게 흔들리고 있고, 그 진원지가 바로 촛불민주주의라는 주장이 그냥 흘려버릴 것은 아닌 것 같다.

도대체 촛불로 상징되는 현 정부세력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는 무엇일까? 유신시대, 그 이후 군부독재로부터 자유민주주의 사회로 전환된 지가 수십 년, 정권교체, 언론자유, 정치적 자유가 만개해 비서구사회 중 가장 민주적 사회를 이뤄왔다는 우리에게 이른바 촛불혁명이 등장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혁명의 대상은 앙시앵 레짐(舊體制)인데, 무슨 민주주의사회가 혁명의 대상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박근혜 정권 퇴진을 기치로 내세운 촛불시위와 그 일련의 과정은 과연 혁명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일까? 헌법적 질서와 절차에 의해 이뤄 졌는데도 혁명이라고?
 

적폐를 내세운 민주와 법치의 파괴

이 정부가 전가의 보도(傳家寶刀)처럼 내세우는 적폐가 무엇인지도 잘 모른다. 다만 어떻게 민주적 사회에서 청소해야 할 그러한 사회적 악(惡)이 수북하게 쌓여져 왔다는 것인지 의아하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자기결정 과정이고 이에 여야(與野)가 따로 없어 변화와 개선이라는 가치가 존중되며 협치 또는 정권교체를 통해 스스로 변화, 발전하는 시스템인데, 어느 날 적폐가 수북하게 쌓여 있다, 그러니 시원하게 청소하자는 주장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일까? 적폐 제거라면 법치주의, 영장주의, 불구속 원칙, 무기대등 원칙 등 문명국가의 법관과 검찰이 마땅히 따라야 할 원칙을 내던져버려도 되는 것인가?

그렇게 적폐가 쌓여왔다면 이를 예방하기 위해 국회가 지닌 여러 수단, 예컨대 법관탄핵, 각료해임결의며 사법수사권의 작동은 왜 침묵하고 있었는가. 의회에 일정 지분을 지녔던 현재의 집권세력이나 하루가 멀다 않고 고소·고발권을 행사하는 시민단체는 뭘 하고 있었다는 것인가.

이 모든 예민한 문제에 대해 필자는 전적으로 무지하고 무기력하다. 수많은 학자들이 오랜 시간을 두고 연구해도 어려울 과제를 파악하는 일은 지극히 평범한 법조인에 불과한 필자의 능력 범위 밖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현 정부세력이 6·29 민주화 이후부터 내려온 가치며 결과물, 제도, 질서, 관행을 모조리 해체하고자 하는 열정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이 우리 사회 주류세력의 교체며 장기집권 목표를 향한 과제일까?

그런데 적폐론이며 주류세력교체론이 역사적 관점에서 정당한 것일까? 국민적 공감, 동의에 기초한 것일까? 우리의 헌법적 질서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 있는 것일까? 그들이 금과옥조처럼 내세우는 국민의사는 무엇일까.

재판을 담당하는 개개법관은 영웅이 아니다. 연약하고 소박하며 내외부의 미세한 압력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는 한다. 특히 인사권자의 압박, 동료집단의 압박에는 무력하기조차 하다. 그러니 항차 거대한 검찰력 앞에 서랴! 개인적으로는 재판권을 행사하던 자가 재판당사자였던 검찰로부터 수사를 받을 때 굴욕감과 무기력감이 어떠했을까 상상으로나마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70여 년 동안 이와 같은 일은 없었다. 이승만 정권, 어두운 유신시대, 그 뒤의 군부독재 시대에도 그와 같은 사례는 없었거니와 아마도 일제 강점기나 그 이전 대한제국 시절에서조차도 그러한 일은 없었으리라. 조선시대 사화(士禍)가 그러하였을까? 역사가들은 이를 두고 무엇이라 표현할지 궁금하다. 사법대학살?
 

대법원장, 헌재재판소장에 대한 대통령의 임명권은 형식적인 것임에도 실제로는 대통령의 사법권 장악 수단이 되고 있다.
대법원장, 헌재재판소장에 대한 대통령의 임명권은 형식적인 것임에도 실제로는 대통령의 사법권 장악 수단이 되고 있다.

사법 위기의 원인 어디에서 오는가?

어쨌든 그런 과정으로 현 정권이 집권하지 않았다면, 대법관이나 대법원장, 헌재재판관 등의 임기종료가 현 정권 집권기에 집중적으로 몰려있지 않았다면, 오늘의 사법 위기가 발생했을까?

야당이 지리멸렬하지 않고, 이른바 조·중·동 등 전통 언론이 고립된 섬이 되어 여론의 외곽으로 밀려나있지 아니하였더라면, 학계, 종교계 등등의 오피니언 리더를 선도해오던 우리 사회의 공공재 (公共財)를 시민단체, 노조 등이 장악하지 않았더라면 사법 위기가 닥쳐왔을까?

국민 여론이 한 정권의 사법 장악을 허용하지 아니하겠다는 명확한 입장을 견지하였더라면, 또는 집권 초기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80%를 넘는 고공행진을 보이지도 않고, 그래서 정권이 두려움 없이 마이웨이를 아니하였더라면 오늘의 위기가 왔을까?

만약에라도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국민들에게 약속한 내용을 그대로 지켰다면 우리가 이렇게 모여 사법독립위기를 내용으로 하는 토론을 하고 있지 않았을 것 같고, 나아가 세계인이 찬탄하는 대한민국 건국 70년 역사를 끊임없이 부끄러워하고, 훼손하려는 세력들이 엄연히 우리 사회에 자리 잡고 있지 않다면 이런 일이 도대체 일어날 수 없었을 것 같다.

요컨대 현재의 사법파동은 수많은 다층(多層)적 원인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그에 대응하여야 하는 방책 마련 또한 만만치 않은 지혜와 통찰이 요할 것 같다.

오늘날 우리가 처하고 있는 헌법적 위기는 현 집권자와 집권세력이 행정부와 의회를 장중에 넣은 다음, 고공행진 지지도에 고무되어 국민에게 한 약속을 내팽개치고 그들이 열망하는 방향으로 나라의 기본 틀을 바꾸려 하면서 집요하게 사법부까지 장악하려고 하는데, 그것을 방어하여야 할 제도가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는 점이 논의의 초점이 되어야 할 것 같다.

대법원, 헌법재판소 등 한 국가의 최고사법기관은 그 나라, 그 사회의 모습에 따라야 한다. 사회 제(諸)세력, 여러 가지 이념, 성별 등을 적절히 안배하여야 한다. 그 수장(首長)은 물론, 구성원은 경도되지 않는 이념, 정치적 중립, 고결한 인품, 지혜를 갖춘 현자(賢者)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의회나 행정부와 달리 투표 등의 민주적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민주적 절차가 지닌 본질적인 취약성을 보완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민주주의, 법치주의는 인간에 내재한 개인의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한 인류의 오랜 지혜이기도 하다.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하거니와, 권력은 마치 아메바와 같은 원생동물처럼 집요하게 자신과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려는 본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끊임없는 제도적 견제 장치가 필요하다.

대법원장, 헌재재판소장에 대한 대통령의 임명권은 형식적인 것임에도 현실에 있어 전혀 거리가 멀어 대통령의 사법권 장악 수단이 되고 있다. 따라서 방어체제로서 대법원, 대법관, 헌재재판관이 호선하거나 서열에 의하여 대법원장이나 헌재재판장이 되는 순서를 정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사법행정권이 대법원장 1인에게 귀속되는 것이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헌법적 위기의 진원지가 되고 있는 점에 비춰 볼 때 대법원 구성자인 대법관들 전원이 사법행정권을 나눠 행사하는 방법, 즉, 대법관 회의에 사법행정권을 전적으로 귀속시켜야 하지 않을까? 사법행정권의 제약을 시도하면서 이를 대법원장 1인에게 귀속시키고, 그 하부기관인 사법행정처를 분해하는 방안은 좋은 제도가 아니다.

대법관, 헌재재판관 임명권을 의회와 대통령이 나눠 가지는 현재의 제도는 민주적통제라는 관점에서는 그럴 듯해 보이나 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집권당에 의해 의회가 대통령으로부터 독립적 권한 행사를 제대로 못하는 현실에 비춰 적절한 제도일까? 헌법에서 사라진 법관추천회의를 접목하는 현자의 선출제도는 어떨까?
 

사법권 독립의 핵심적 요소

사법권 독립의 최후 보루가 재판을 담당하는 법관들 개개인임은 틀림없으나 과거 유신시대, 군부독재시대의 경험에 비춰 볼 때 최후의 보루기 쉽게 함락되곤 했던 상황을 잊을 수 없고, 따라서 지난날의 경험에 더해 통찰과 지혜가 오늘날 현실에서 반드시 필요하다.

개개 재판관은 영웅이 아니고 가냘프고, 연약한 존재, 거대한 외부세력에 대해 무기력하고, 고독한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내부에서 위로부터의 압력, 외부에서 여론과 사회 제(諸)세력의 압력으로부터 굳건히 사법독립을 지켜달라는 국민적 요청, 헌법가치가 때로는 사법독립을 위한 방편이 되지 못하기도 하는 것은 재판 업무에 종사해 온 여러 분들의 경험일 것 같다.

법관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고 사법독립, 법치주의, 헌법적 가치 수호를 위해 재판권 행사에 대한 침해방지책으로 법관모욕죄 등의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지 아니할까?

판결에 대한 부당한 비난, 재판에 대한 부당한 간섭, 법관에 대한 압력, 청탁 등을 방지해 법관 개개인이 사법독립을 지켜나가기 위한 법적 규제가 필요하지 않을까?

개개법관의 재판권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로서 탄핵제도는 오히려 동료법관들에 의해 탄핵대상법관으로 지목되기도 하는 웃지 못 할 현실이고, 법관들에 의해 전·현직 법관들이 파렴치한 도주, 증거인멸 의심을 받아 구속수사가 오히려 원칙으로 바뀌는 듯한 현실을 우리는 처참한 심정으로 목도하고 있다.

불구속원칙, 무기대등의 원칙은 서구사회가 어두운 중세 규문(糾問)주의로부터 탈출해 근대사회를 이루는 형사소송 절차의 대원칙임에도 이른바 적폐사건에서는 여러 법관과 검찰에 의하여 간단하게 무시되고 있다.

전직 국가원수에 대해 며칠 걸러 가며 내리 공판기일을 지정하려 한다거나, 수사가 종료된 후에도 계속 구속재판으로 이어져 적절한 방어권을 행사할 수 없다고 탄식한 전직 대법원장에 대한 재판이 과연 문명국의 제대로 된 재판이라 할 수 있을까?

형사사법절차가 공정하고 정의로운 것인가 하는 점은 개개 법관이 검찰권을 철저히 견제하며 위와 같은 원칙을 고수하는 것인가 하는 점인데 현실에서, 심지어 전직 대통령이나 전직 대법원장에 대한 재판에서 조차도 이를 기대할 수 없으니 이 나라의 형사사법절차가 어떻게 공정하고 정의롭다고 할 수 있으랴!

훗날 이러한 오늘날의 재판에 대해 재심재판이 줄을 잇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제 우리는 법관조차도 자의적으로 원칙을 깨트릴 수 없게 하는 제도적 장치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법관 내부 사회의 정화도 필요하다. 동료법관을 탄핵소추 대상자로 다른 법관들이 결의하는 행위, 연구회라는 조직 명칭을 내세워 법관내부사회를 이념화하거나 정치적 행위 내지 사법부 내의 세력 행사를 의도한다면 어떠한 탁월한 연구 성과를 낸다하여 정당화 될 수 없다. 순수한 학문적 행위를 촌(寸)치라도 이탈한다면 마땅히 해산되어야 한다. 정치성, 이념추구는 한 국가의 기반암을 이루는 사법독립 원칙에 치명적인 악이다.

법관회의처럼 중요사항에 대해 법관 전원의 의사를 묻는 장치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법조직은 대의제(代議制)에 친하지 아니할 뿐더러 대표에 의한 결의가 적절한 정당성의 장치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늘 아래 완벽한 제도는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찾아볼 수 없다. 결국 불완전한 인간에 의해 제도의 처음 정신이 훼손되기 일쑤이므로, 가능한 한 완벽을 기하는 방법 밖에 없다. 서유럽 각국 행정절차과정에서 시행되는 옴부즈맨 제도, 또는 로마 공화정의 원로원을 견제하는 호민관 제도에서 추출해 내부적 사법독립을 위한 방편으로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감시체제

부적절한 인사권 행사, 재판권의 훼손과 간섭이 감지되거나 발견되면 즉각 경보신호음을 울려주는 사법 옴부즈맨 제도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외부의 감시체제 구축이다. 옴부즈맨에 의한 내부적 감시에서 나아가 외부적으로 언론, 시민단체, 변협, 변호사단체의 사법독립 훼손에 대한 감시는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진화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문화적 요소에 의한 진화 메커니즘으로 내세운 밈(meme)개념에서 출발하여, 우리가 사법독립을 지켜나가고 헌법적 가치를 수호하는 일종의 사회문화법적 감시체제, 법관 검사 등 사법절차에 관여하는 개개인들에게 헌법수호 가치를 심어주는 일종의 문화적 사법정의 수호의 밈을 구축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경찰수사권 독립 문제, 공수처 제도를 두고 정부 여당 내에 갈등 양상이 벌어지고 있다. 경찰수사권 독립 문제는 법치주의, 적절한 형사사법절차라는 큰 틀에서 논의되어야 하고, 법원, 변호사회 등의 유관기관들과도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수사기관을 자꾸 만들어 나라를 수사왕국으로 만들어 가는 발상은 바람직하지 않다. 세계를 제패한 앵글로 섹슨 제국이 그런 수사왕국을 만들거나 복잡, 정치(精緻)한 행정조직에 힘입어 건설된 것은 아니잖은가?

나아가 이와 같은 국가의 기본 틀을 정하는 문제는 최근 여야가 예리하게 대립하고 있는 선거 ‘룰’을 정하는 문제와 더불어 신중하고, 충분하게 논의되어야 한다. 원자력 발전정책이나 최저임금정책처럼 거의 비전문가의, 국민이 제대로 모르는 내각결의에 의한 특정가치를 위한 거의 밀실소수집단의 허겁지겁 식의 소통 없는 과정으로 결정된다면, 링컨이 천명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민주주의는 사정없이 후퇴할 것이다.

오늘날 문명화된 사회에서 국가권력의 행사는 권력이라기보다 오히려 의무에 가까운 것이 되어가고 있다. 헌법과 법률에 의한 공직자의 권한행사는 늘 소통하고, 근신하며, 오늘 내일이며 동서고금의 사례 등 여러 사정을 감안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념이나 한두 가지 가치로 결론을 논하기에는 세상은 너무 복잡하고, 차후 나타날 여파를 사전에 두루 짐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히 무소불위에 가까운 검찰권을 견제하는 헌법적 장치가 사법부인데, 지난날 그런 헌법적 의무를 다해야 할 사법부가 늘 소극적이고 검찰에 끌려가는 듯하다가 사법부 자체가 검찰 수사의 도마 위에 올라 난도질을 당하고 법관들이 검찰에 끌려가는 현실이 전개되고 있다. 사법부가 풍비박산이 되게 해버린 자가 다름 아닌 사법독립수호의 헌법적 사명을 어깨에 지고 있는 대법원장이니 말문이 막힌다. 그런 식으로 순식간에 사법권독립 위기 상황이 현출되면서 현재의 제도장치는 제대로 작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으로 최후의 보루라 할 법관 개개인의 사법독립수호 의지를 촉구하나 그 마저도 그다지 신뢰할 수준이 되지 못하는 것이 서글픈 우리의 고충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험난한 기상(氣像)하에 힘겹게 항해하고 있는 대한민국호(號)에 운명적으로 함께 승선한 우리 모두가 이 상황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자명하지 않은가. 정치권과 연대하고 우호적 언론, 시민, 종교 단체, 지식인을 원군으로 삼아 다수 국민들의 이해와 공감을 끌어낼 수밖에 없고, 그 구체적 방법을 반드시 찾아내야 하는 과제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나아가 사법독립의 최후 보루인 법관의 용기를 고취하고 한편이 되어 그들이 사법권 수호책임을 다하도록 응원하는 적절한 방법까지 찾아냈으면 한다.

암울한 시대의 법조인으로서, 과거 어려웠던 시절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면서, 마치 독립운동 하듯 현재 각자가 처한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하여 우리 시대의 과제와 사명에 조그마한 보탬이라도 되게 하자는 제의를 하면서 마무리하고 싶다.

※ 본 기사는 5월 21일 국회에서 있었던 ‘사법부 대위기 토론회’에서 있었던 주장을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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