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분석] 반복되는 반일 소동, 그 이면의 친북적 의도
[심층분석] 반복되는 반일 소동, 그 이면의 친북적 의도
  • 이강호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승인 2019.06.11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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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1절 기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빨갱이라는 말은 일제 잔재”라고 한 바 있다. 이 같은 주장의 허구성은 새삼 지적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별달리 지적 없이 넘어갔지만 따져봐야 할 문제가 또 하나 있었다. 독립문 관련 퍼포먼스다.

이번 3·1절 행사는 11시 광화문광장 기념식에 앞서 독립문과 대한문에서 각각 출발하는 두 개의 행진이 광화문광장으로 집결하도록 했었다. 문 대통령은 그렇게 집결한 군중들 앞에서 3·1절 100주년 기념사를 했다. 문 대통령을 비롯한 이 정권의 사람들이 그런 연출을 한 것은 독립문이 그만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봤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문 대통령이 독립문에 애착을 보여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문 대통령은 작년 2018년 3·1절 행사는 독립문 앞에서 거행한 바 있다. 당시 문 대통령 내외는 독립문 앞에서 태극기를 흔드는 모습을 연출했다. 더 이전의 장면도 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6월 17일 출마 선언을 할 당시도 서대문 독립문 앞에서였다.
 

독립문 앞에서의 3·1절 100주년 기념행사. 그런데 독립문은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상징하는 기념물이다.
독립문 앞에서의 3·1절 100주년 기념행사. 그런데 독립문은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상징하는 기념물이다.

이 같은 예들은 반일 캠페인을 주요하게 내세우고 있는 문 대통령 등이 독립문에 그런 상징성이 있다고 믿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그런데 정말 그렇다면 이것은 한마디로 무식함의 증거일 수밖에 없다. 독립문의 독립은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뜻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독립문은 1897년 11월 20일 완공되었는데 이때는 일제시대가 아니었다.

독립문은 중국에 대한 사대의 상징이었던 영은문(迎恩門)을 헐어낸 자리에 세운 것이었다. 청나라의 책봉체제에서의 독립을 주창하고 기념하는 건립물이었다. 독립문 건립운동을 주도한 주체는 독립협회였는데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7월 2일 협회를 정식 발족하면서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추진한 것이 독립문 건립이었다.
 

뜬금없는 독립문 퍼포먼스

독립문은 반일의 상징물이 아니었고 그래서 일제시대에도 허물어지지 않고 보존되었다. 심지어 조선총독부는 독립문을 문화재로 지정했을 뿐만 아니라 거액을 들여 보수공사까지 벌였다. 일제는 1928년 독립문 보수를 위해 당시로서 상당한 거금인 4100원의 예산을 써서 수리 공사를 벌였으며 1936년에는 독립문을 조선의 문화재로 지정, 고적 제58호로 등재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 등이 독립문과 관련한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과연 알고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걸 안다면 반일·친일 소동을 벌이는 자들이 독립문을 앞세워 짐짓 비장한 퍼포먼스를 벌일 리가 있을까? 문재인 정권은 이번 3·1절 100주년 기념행사와 관련해 정작 3·1만세운동이 시작된 파고다공원(탑골공원)은 빼고 독립문을 등장시켰다.

파고다공원에 대해 무슨 큰 유감이 있는 게 아니라면 이것은 무식함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런데 이런 웃지 못 할 일이 단지 저들의 무식만의 것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독립문과 관련한 사실관계에 대해선 제법 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놓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애써 지적을 하면 깨닫기는 한다. 그러나 굳이 설명이 없으면 대개의 경우 “독립”이라면 당연히 일제로부터의 것이려니 하고 지나쳐버리기 일쑤다. 이렇게 된 것은 국사 교육과정에서 이 문제에 대해 명료하게 가르치지 않고 얼버무리고 넘어간 탓이 크다.
 

1960년 11월 1일 서울대에서 출범한 민족통일연맹(민통련)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슬로건을 내걸고 ‘남북학생회담’을 제의했다. 사회 혼란을 틈탄 좌익세력의 움직임이었다.
1960년 11월 1일 서울대에서 출범한 민족통일연맹(민통련)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슬로건을 내걸고 ‘남북학생회담’을 제의했다. 사회 혼란을 틈탄 좌익세력의 움직임이었다.

독립문과 관련된 경우는 우리 근현대사와 관련한 반일 프레임의 하나의 예일 뿐이다. 일제의 식민치하에서 독립하여 그 반정립으로 나라를 세우는 과정을 밟은 만큼 반일 정서는 어느 정도는 피하기 어려운 것일 수 있었다. 일종의 방치였으며 때로는 조장된 민족주의 캠페인이 있기도 했다.

그런데 그 틈을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기본 행로와는 다른 의도를 품은 정치적 작동이 파고들고는 했다는 게 문제를 간단치 않게 했다. 그 대표적인 장면들이 4·19 직후 있었던 통일운동과 박정희 정권 초창기의 6·3사태였다.

“4·19 직후에는 어떻게 하면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민족통일을 실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학생들 간에 토론이 활발했습니다. 4·19는 자유당 독재와 3·15 부정선거에 의해 촉발되었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문제 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도, 그 당시에는 민주화 문제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 같지 않습니다.” (안병직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 기파랑, 2007)

1960년 11월 1일 서울대에서 민족통일연맹(민통련)이 출범했다. 민통련은 1961년 5월 3일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를 내걸고 ‘남북학생회담’을 제의했다. 그리고 1961년 5월 무렵까지 서울과 지방의 18개 대학에 민통련이 결성되었다. 그 배경에는 4·19 이후 느슨해진 상황을 틈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통칭 혁신계라 칭해진 좌익세력의 움직임이 있었다.

4·19 직후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4·19세대 주역의 한 사람이었던 이영일 전 의원의 회고가 있다. 이영일 전 의원은 광주일고를 나와 1958년 서울대 문리대에 진학했으며 4·19혁명 당시에는 정치학과 3학년이었다.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 4·19혁명 56주년이었던 2016년 4월 19일 개최된 제62회 이승만 포럼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4·19 당시 젊은 학생들은 대통령으로서의 이승만 박사는 알지만 그분이 독립운동과 건국을 위해, 한국전쟁과 휴전과 한미방위 동맹을 위해 어떻게 기여했는가를 바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바로 이 무지의 공간을 파고든 것이 친북좌파들이었다. 이승만 박사 때문에 적화통일이 안 된 것을 몹시 애통해했던 친북공산주의자들이 나서서 4·19 이후의 혼란을 틈타 반 이승만 모략책동을 치밀하게 펼쳤다.”

덧붙여 그는 통일운동을 들고 나온 서울대 민통련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4·19 직후 민족통일연맹이 결성된 후 필자는 민통련의 선전위원장으로서 활약했는데 이 때 한국의 각지에 잠재되어 있던 공산 분자들이 제철을 만난 듯 민족통일연맹운동에 날파리 떼처럼 몰려들었다. 이들 중에는 민청학련사건에 관련되어 사형당한 사람도 끼여 있지만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 이들이 맨 먼저 들고 나온 주장은 이승만의 건국노선을 소남한단정(小南韓單政) 노선이라고 맹공하였다.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김구(金九) 선생 중심으로 통일되었어야 할 나라가 이승만이 미국과 짜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했기 때문에 통일이 안 되고 한반도에 두 개의 분단국가가 세워졌다는 것이다. 매우 그럴듯한 소리였다. 이 주장이 허구였음을 내가 깨닫는 데 반세기가 흘렀다.”
 

김일성의 남한 진보단체 접촉 시도와 남북연방제

1961년 5월 5일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결성준비대회’ 선언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세계사적 현 단계의 기본적 특징은 식민지·반식민지의 민족해방투쟁의 승리”라고 규정하고, “식민지적·반(反)식민지적 반봉건성의 요소”를 척결하고 “민족·대중세력은 매판관료세력을, 통일세력은 반통일세력을, 평화세력은 전쟁세력을 압도”하여 통일을 실현시켜야 된다는 것이었다.

‘식민지·반식민지의 민족해방투쟁’ 운운은 거슬러 올라가 레닌의 제국주의론과 스탈린의 민족전략에 기원을 둔 소련의 세계적화전략의 일환으로 제기된 것이었으며 소련을 종주국으로 한 북한 공산세력의 대남전략의 핵심이기도 했다.

민족주의 정서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강력했다. ‘통일’ 구호도 그래서 위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친북좌익의 정치적 비수가 숨겨져 있다. 이념을 달리하는 더욱이 혈전을 치른 두 개의 적대적 체제 사이에 협상을 통해 ‘평화통일’을 하자는 것은 감상이나 기만 둘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다. 남쪽에 낭만적 감상이 있었다면 북한에는 그것을 파고드는 대남전략이 있었다. 2013년 1월 17일 미국의 우드로 윌슨 센터(WWC)는 그 실상을 말해주는 자료를 공개했다.

옛 소련의 평양주재 대사였던 알렉산더 푸자노프가 1960년 3~12월까지 작성한 20건의 저널(개인기록)의 주요 내용이다.

“북한의 김일성이 1960년 4·19 혁명 직후 북한 주도의 남북통일이 가능하다고 판단, 실제로 대남전략 추진에 들어갔다.”

“김일성이 ‘남한 문제에 대한 발 빠른 정책결정을 위해 남한문제중앙국(CBSKI)을 설립했다’고 말했다” “CBSKI 설립은 남한 내 지하조직을 부활시키고 평화통일 선전작업을 위한 것이다.”

“남한 출신의 인민군 10만 명 가운데 일부를 통일 인력으로 양성하기 위해 공산대학을 설립했다.”

“당시 북한 지도부는 4·19 혁명이 진정한 계급혁명으로 발전하지 않을 것으로 봤지만 학생조직이 약점을 보완하고 있다고 보고 남한 내 진보단체와 접촉을 시도했다.”

“김일성은 당시 북한이 정치·경제적으로 남한보다 안정돼 있기 때문에 북한 주도 통일이 가능할 것으로 자신했다.”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는 4·19 혁명 직후 남북통일이 가능성의 단계가 아니고 실제로 임박한 것으로 판단했다.”

4·19 혁명 이후 7·29 총선을 치른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1960년 8월 15일 김일성은 8·15 경축사에서 지금까지 이어지는 대남전략 상의 매우 중요한 정책 하나를 처음으로 제기했다. 바로 ‘연방제통일방안’이었다. 북한이 남북연방제통일 방안을 내건 것은 이때가 최초였는데 이후 이 연방제통일 방안은 북한의 기본 입장으로 확립되었다.

일찍이 레닌은 민족 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에서 “강력한 공산국가와 비공산 민족국가가 과도적 형태의 연방제를 거쳐 프롤레타리아의 완전 통일국가에로 도달한다“고 규정한 바 있다. 김일성의 연방제 방안은 이를 바탕으로 하여 한반도의 현실에 맞게 구사하고자 한 남한 적화의 실천 수단이었다. 4·19 직후 한반도 정세를 논의하기 위해 1960년 5월 초 북한을 방문한 쿠즈네소프 소련 외무성 부상은 레닌의 지침에 따른 “연방제”를 권유하였다.

일본 대사관 앞에서의 정기 수요집회 모습
일본 대사관 앞에서의 정기 수요집회 모습

4·19 이후인 1960년 7월 29일 행해진 남한의 총선에서 혁신계도 민의원에 사회대중당 4명, 한국사회당 1명, 참의원에는 사회대중당, 한국사회당, 혁신동지 총연맹이 각각 1명씩 총 8명이 진출하게 되었다. 그들의 당초 기대에는 못 미쳤다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놀라운 결과였다. 6·25를 거치는 동안 완전히 사멸한 듯 보였던 좌익 정치세력이 국회에 공식적으로 교두보를 갖게 된 것이다.

남한에서 좌익 정치세력이 다시 의석을 확보한 것은 이후 수 십 년의 세월이 흐른 2004년이었다. 민주노동당 이때 10석을 확보했는데 1960년 혁신계의 의회 진출 이래 이래 실로 44년만이었다. 더욱이 1960년 당시 혁신계는 의석수는 비록 2004년의 민노당에 미치지 못했지만 그 영향력은 훨씬 더 컸다.

그런 상황에서 남한에서는 혁신계와 그에 호응한 학생세력들이 중심이 된 통일운동이 거세게 일어나 1961년 5월 13일 ‘남북학생회담 환영 및 통일촉진궐기대회’에는 수만 명의 학생 시민들이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를 외치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의 체제에 대한 명백한 적신호였다. 더욱이 적신호는 ‘데모’만이 아니었다. 북한의 남한에 대한 간첩침투활동도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었다. 1960년 한 해만 해도 침투간첩이 100명 넘게 체포되었다. 심지어 ‘통일운동’을 한다는 인사들이 월북을 시도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이 흐름이 계속 방치되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북한 김일성의 ‘희망’이 단지 희망으로만 그쳤을 것인가? WWC 보고서는 그에 대해 이렇게 결론내리고 있다. 당시 4·19 직후의 북한의 대남전략 추진은 “결국 남한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반일 민족주의를 앞세운 6.3사태, 그리고 ‘민족 공작’

6·3사태 당시도 민족주의의 구호가 위력을 떨쳤다. 4·19 직후 장면 정권 시절의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가 “우리민족끼리”의 고전 버전이었다면 6·3사태 당시는 반일이 전면에서 위력을 행사했다. 그런데 거기에도 좌익적 흐름이 무관치 않았다.

1964년 3월 24일 한일국교정상화 추진에 반대한 서울대 시위대의 주장에서 이미 그런 점을 엿볼 수 있다. 당시 서울대 시위대는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발표했다.

1. 민족반역적 한일회담을 즉각 중지하고 동경체재 매국정상배는 즉시 귀국하라.

2. 평화선을 침범하는 일본어선은 해군력을 동원하여 격침하라.

3. 한국에 상륙한 일본 독점자본가의 앞잡이를 즉시 축출하라.

4. 친일 매국하는 국내 매판자본가를 타살하라.

5. 미국은 한일회담에 관여치 말라.

6. 제국주의 일본 자민당 정권은 너희들의 파렴치를 신의 앙화(殃禍)를 입어 사죄하라.

7. 朴정권은 민족분노의 표현을 날조, 공갈로 분쇄치 말라.

8. 오늘 우리의 궐기를 역사는 증언하려니와 우리의 결의와 행동이 ‘신제국주의자’에 대한 반대투쟁의 깃점임을 만천하에 공포한다.

3월 24일 시위가 시작되기 하루 전인 3월 23일 서울대 문리대에서 ‘민족주의비교연구회’라는 학생단체 주최로 ‘한일관계 강연회’가 있었다. 그런데 이 민족주의비교연구회(이하 민비연)가 간단치 않은 조직이었다. 민비연은 1963년 10월 서울대 문리대생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되었는데 ‘제3세계 민족주의 운동’을 비교 연구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했다.

당시 한일회담반대투쟁을 주도한 것은 이 민비연이었다. 제3세계 민족주의 운동을 비교 연구한다는 것은 사실 좌익 이론 학습과 무관할 수 없다. 제3세계 민족주의 운동론은 결국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제국주의론’에 입각한 반제투쟁론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1964년 8월 14일 ‘인민혁명당 사건’(1차)으로 도예종, 이재문, 박현채, 김중태, 김정강, 현승일, 김도현 등이 체포되었다. 그 중 김중태는 한일회담반대투쟁을 주도하던 민비연의 회장이었다. 김중태는 인혁당 사건에선 공소 취하되었지만 1965년 9월 ‘민비연 사건’(1차)으로 다시 구속됐다. 이 사건으로 15개월을 복역하고 출옥한 김중태는 1967년 ‘동백림 간첩단 사건’과 관련된 2차 ‘민비연사건’으로 다시 구속됐다.

동백림 간첩단 사건 관련자인 황성모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민비연을 조직하고 이끈 지도교수였던 게 문제였다. 황성모의 행적에는 의심의 여지가 분명히 있었다. 우선 그는 6·25 당시 인민군에 복무하다 낙동강 전투에서 국군에 잡혀 거제 포로수용소에 갇힌 바 있다. 독일 유학 시절에 동베를린을 방문했으며 거기서 서울대 후배인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을 만난 것도 사실이었다.

가난한 후진국에서의 민족주의 정서는 일반적 경향이다. 러시아 혁명에 성공한 레닌은 초기부터 국제적인 반자본주의 투쟁의 일환으로 반제국주의 민족운동을 강력하게 지원했다. 이후 특히 식민지 경험이 있는 제3세계 후발국들에서 민족주의가 좌익의 정치적 도구가 되는 상황이 일상화되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부터 1948년 8월 15일 건국에 이르기까지 3년 간 한반도에선 ‘민족’이라는 구호는 일단은 우익진영의 것이었다. 그런데 분단이 현실화되면서 ‘민족’에 서서히 좌익적 관념이 침투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건국을 앞두고 한때 민족진영의 거두로 자리매김했던 김구, 김규식 등이 민족 단일정부 수립을 내세우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고 김일성을 만난 것이 바로 그 단적인 경우였다. 김구 등의 ‘이탈’은 단순히 ‘민족적 열망’만으로 이뤄진 게 아니었다. 1950년 2월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남북협상파와 임정 계열 일부 출마자들을 지원하던 중 경찰에 검거된 거물급 간첩 성시백이라는 인물의 공작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건국과 6·25 전쟁은 공존할 수 없는 이념과 체제의 선택의 결과였다. 남과 북은 이제 단순히 같은 민족이 아니라 상이한 이념에 입각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적대적 체제였다. 이 본질을 간과하면 위험에 빠진다.
 

대한민국과 우리 국민이 위험하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자기 정체성의 정립에서 가장 중요한 촉매는 타자다. 자기 정체성이란 곧 그에 상응한 타자를 갖는 것과 같다. 민족과 국가도 마찬가지다. 타자로서의 다른 국가(혹은 민족)는 대개 아니 거의 절대적으로 적대적 관계로 등장하여 아(我)의 정립을 매개한다. 만약 적대성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그 타자는 아(我)를 흡수 통합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 한국인의 자기 정체성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이 중화로부터 풀려나면서, 그리고 동시에 일본과의 적대적 조우를 하면서였다. 이후 일본의 제국질서 안에 편입돼 있던 상태에서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가야 했던 한국인은 일본을 적대적 타자로 하는 논리를 만들어가게 되었다. 반일은 그렇게 하여 한국의 정체성으로 숙명적으로 내재화(內在化)하게 됐다.

그러나 그 적대적 타자로서의 일제는 1945년 8월 15일 이후부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존재하지 않는 허구를 타자적 대상으로 한 자기 정체성이란 퇴행적 질곡이 된다. 뿐만 아니라 새로이 맞게 된 명백한 적대적 존재를 타자로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자기 정체성도 위기를 맞게 된다.

대한민국은 1948년의 건국과 6·25를 거치면서 북한이라는 명백한 적대적 타자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 적대적 타자를 그렇게 인식하지 못하고 이미 사라져버린 과거의 적대적 타자를 계속 현재의 적대적 타자로 되새기고 있다. 착란 상태다. 4·19 직후와 6·3사태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우리민족끼리”라는 기만적인 구호에 현혹당하는 착란을 반복하고 있다.

반일·친일 문제는 단순히 일본에 대한 태도 문제만이 아니다. 일본에 대한 과도한 거의 시대착오적인 태도는 말할 것도 없이 매우 소모적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현재 우리 대한민국의 자기 정체성의 문제다. 지금 문재인 정권이 벌이는 친일잔재 소동과 반일 캠페인은 과연 어떤 것인가? 독립문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무식함의 문제와는 별도로 어떤 의도를 품은 정치적 행위가 아니라 할 수 있는가?

우리 근현대사의 일본 관련 사안들에는 채 정리되지 않은 문제들이 있으며 착오도 있다. 이 틈을 파고든 고의적인 정치적 착란이 끊임없이 조장되고 있다.

북한은 ‘민족’이라는 논리의 차원에서도 스스로를 김일성민족이라고 칭한 지 오래되었다. 대한민국 국민은 김일성민족이 아니다. 문재인 정권은 이것을 고의적으로 가리고 있다. 문재인 정권의 이 같은 행태가 그들의 이념적 정체와 속성에 대해 끊임없이 제기되는 의문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누가 적인지를 구분 못하는 퇴행적 착란에 빠지면 ‘국가’가 위험해진다. 그리고 국가가 위험해지면 그 안의 ‘국민’도 위험해진다. 지금 대한민국과 우리 국민은 그런 위험천만한 상황으로 끌려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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