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분석] 6·25전쟁의 성격과 과거청산...침략전쟁에 대한 사과가 평화의 조건
[심층분석] 6·25전쟁의 성격과 과거청산...침략전쟁에 대한 사과가 평화의 조건
  • 제성호 미래한국 편집위원·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승인 2019.06.19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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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해 북한이 일으킨 한국전쟁(the Korean War)은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을 가져다줬다. 살·도륙·파괴·약탈·납치·고문·협박·생이별 등 선량한 한반도 인(人)들이 받은 억울하고 원통한 피해는 김일성 집단의 ‘반인륜’과 ‘반인권’을 잘 반영하는 것들이었다.

6·25전쟁은 국토분단(1945년)과 정권분단(1948년)에 더하여 민족분단(1950년)을 심화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따라서 전쟁의 개시 및 수행은 중대한 ‘반민족행위’라고 할 만하다. 반만년 동안 이 강토에서 함께 살아왔던 한민족은 이후 70년의 짧은 시간 동안 과거 그 어느 시기에도 없었던 극도의 이질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것은 김일성 주체사상과 ‘우리식 사회주의’의 강요 때문이었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6·25전쟁은 군사적으로는 북한군에 의한 ‘기습남침’으로 발발했다. 곧 ‘남침전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북한 동조세력(국가·단체·개인 포함)은 한국에 의한 ‘북침’이라고 강변해왔다.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인류 역사에서 전쟁을 먼저 일으킨 나라의 경우 3~4일 만에 자국 수도가 상대방에게 빼앗긴 사례는 없었다.

한국은 전쟁 발발 직후 전선을 뚫고 ‘북으로’ 진격하기는 커녕 80일 간 계속 후퇴만 했고, 개전 후 50일 만인 1950년 8월 4일 국토의 90% 가량을 북한군에 점령당했다. 나라를 잃을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한국 북침론’이 역사적 경험이나 전쟁론의 시각에서 볼 때 억지 주장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여기서 당시 6·25전쟁에 대한 국제사회의 시각은 어떠했고, 국제법적으로 이 전쟁은 어떻게 규정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자. 이는 유엔(국제연합)의 태도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 미래한국 고재영
ⓒ 미래한국 고재영

국제사회가 보는 6·25전쟁의 성격

첫째, 북한의 기습남침을 ‘평화의 파괴’라고 봤다. 1950년 6월 25일(미국 시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는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결의 82호를 채택하였다. 이 결의에서는 북한군의 무력공격(armed attack)을 ‘평화의 파괴(a breach of the peace)’라고 규정하고, 북한 당국에 대해 적대행위의 즉각적인 중단(immediate cessation of hostilities) 및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withdrawal of North Korean forces to the 38th parallel)’를 권고하였다.

‘평화의 파괴’라는 용어는 유엔 헌장 제7장 제39조에 명시되어 있는데, 이는 안보리가 평화 유지·회복을 위해 필요한 ‘권고’나 ‘강제조치(enforcement action)’를 취하기 위한 조건의 하나이다. 한편, 안보리는 이 결의에서 ‘북한군의 무력공격’, ‘평화의 파괴’, ‘적대행위 중단’ 및 ‘북한군 철수’라는 용어 사용을 통해 북한군의 남침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북한의 기습남침을 ‘침략행위’라고 봤다. 유엔 총회는 1951년 2월 1일 제327차 본회의에서 중공 정부의 한국사태 개입에 관한 결의 제498호를 채택하였다. 이 결의에서 중공 정부가 ‘한국에서 이미 침략을 하는 자(those who were already committing aggression in Korea, 북한군을 지칭)’에게 직접적인 원조와 지원을 제공하고 유엔군에 대한 적대행위에 가담함으로써 그 자신도 한국에서 침략을 수행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1950년 6월 27일 유엔 안보리 회의에서 소련 대표가 불참한 가운데 7개 이사국이 손을 들어 한국에 대한사 군지원을 결의하고 있다.
1950년 6월 27일 유엔 안보리 회의에서 소련 대표가 불참한 가운데 7개 이사국이 손을 들어 한국에 대한사 군지원을 결의하고 있다.

이어 중공에 대해 적대행위를 중단하고 철수할 것을 요청하는 한편, 모든 국가와 당국에 대해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침략’을 원조하지 말 것을 요청하였다. 이 결의는 유엔 역사상 최초로 “침략자에 대한 원조 역시 침략을 구성한다”는 점을 천명한 매우 중요한 문건이었다.

상기 결의 외에도 안보리와 총회는 6·25전쟁 기간 중 다수의 결의를 채택하였다. 이들은 모두 유엔 헌장의 해당 조항(제2조 제5항 및 제7항 단서, 제10조 내지 제14조, 제29조, 제39조~제42조 등)에 근거한 것들이었다.

유엔은 ①피침국(被侵國) 대한민국에 대한 필요한(군사적 및 비군사적) 원조 제공 권고(안보리 결의 제83호. 이에 따라 16개 유엔 회원국 군대가 한국에 파견되었다) ②통합군사령부 설치 권한의 미국 위임 및 동 사령부의 유엔기(旗) 사용 허가(안보리 결의 제84호) ③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설치 및 유엔군사령부에 대한 통일·독립·민주정부 수립의 권한 부여(총회 결의 제376호) ④유엔군사령부의 특별보고서 토의와 관련하여 중공 정부의 출석 초청(안보리 결의 제88호) ⑤중공군 개입에 대한 유엔의 조치에 대한 회원국의 협조 및 유엔 총 회의장의 주선(good offices) 노력 요청(총회 결의 제498호)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이들은 하나같이 국제평화와 안전의 유지·회복을 위한 합법적 조치들이었다. 따라서 유엔의 조치에 반하는 행동, 특히 북한을 직·간접으로 지원하는 행동은 헌장의 규정 및 정신에 역행하는 불법행위를 구성하게 된다.
 

유엔, 6·25를 ‘침략전쟁’으로 규정

여기서 두 가지 특기할 사항이 있다. 그 하나는 안보리가 한국에 대해서는 대한민국(the Republic of Korea)이라는 정식 국호를 사용한 반면, 북한에 대해서는 ‘북한 당국(the authorities in North Korea)’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는 1948년 12월 12일 대한민국을 한반도에서 유일합법정부로 승인한 유엔 총회 결의 제195호와 관련이 있다. 전술한 총회 결의 제498호도 북한의 국가성을 인정하지 않는 전제 위에서 작성되었다.

다른 하나는 안보리의 경우 북한의 남침에 대해 ‘평화의 파괴’라고 규정한 반면, 총회는 ‘침략’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이에 대해 유엔이 지금까지 유권적인 설명을 한 적은 없다. 한 가지 가능한 설명은 안보리의 경우 침략행위는 주로 국가 간에 발생(국경선을 침범)하는 무력충돌을 지칭하는 데 반해, 평화의 파괴는 주로 ‘비국제적 무력충돌’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총회 결의 제498호의 경우 이 같은 엄격한 구별을 채택하지 않고 ‘침략’이라는 용어를 일반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어찌됐든 6·25전쟁은 유엔의 입장에 따르면 ‘평화의 파괴’ 혹은 ‘침략행위’였다. 그 결과로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평화의 파괴자’ 내지 ‘침략자’가 간주되게 되었다. 그러면 시제법(時際法, inter-temporal law), 곧 1950년 당시의 법을 기준으로 할 때 북한의 무력 남침은 국제형사법적으로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그러한 남침행위는 1945년 뉘른베르크(뉴렘버그) 국제군사재판소 헌장 제6조 (a)호와 1946년 극동국제군사재판소 조례 제5조 (a)호에 명시된 ‘평화에 대한 죄(crime against peace)’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전쟁기념관 6·25전쟁관련 전시물.
전쟁기념관 6·25전쟁관련 전시물

이 헌장들에서 ‘평화에 대한 죄’는 “국제조약, 협약 또는 확약에 위반하여 침략전쟁 혹은 전쟁을 계획, 준비, 개시 또는 수행한 행위 그 자체나 또는 이러한 행위를 수행하기 위한 공동계획 또는 음모에 참여한 행위”로 정의되었다. 이 중 ‘국제조약 및 협약’에는 전쟁의 개시에 관한 협약, 육전의 법 및 관습에 관한 협약(헤이그 제2호협약), 1928년의 전쟁포기에 관한 조약(일명 不戰條約) 등을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평화에 대한 죄’의 인정 및 처벌은 1947년의 유엔 총회 결의 제177호에 따라 유엔국제법위원회(International Law Commission)가 1950년에 성안해 총회에 보고한 ‘뉘른베르크 원칙(정식 명칭은 Principles of International Law Recognized in the Charter of the Nurnberg Tribunal and in the Judgment of the Tribunal로서 통상 the Nuremberg Principles로 약칭함)’의 제6원칙에서 재확인된 바 있다.

이상의 선례들은 1998년 채택된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로마규정(Rome Statute of the International Criminal Court)’의 성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다만 국제형사재판소(ICC)규정 제5조에서는 종래 사용되어 왔던 ‘평화에 대한 죄’라는 표현 대신에 ‘침략범죄’라는 용어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양자는 본질에 있어 큰 차이는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현실적으로는 형사책임 묻기 어려워

위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북한의 남침전쟁이 당시의 국제법(특히 무력충돌법 및 국제형사법)에 정면 저촉되는 위법한 군사행동이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위법성은 전혀 논란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가벌성(可罰性)에는 문제가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2차 세계대전 후 침략행위에 대해 사법적 단죄가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은 당해 전쟁이나 무력충돌이 어느 일방의 승리로 종결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6·25전쟁의 경우 3년 1개월 간 지속된 후 확실한 승자도 패자도 없이 휴전협정의 체결로 정지되었고,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 결과 전쟁책임 추궁, 가해자의 처벌, 피해자 구제(손해배상 포함) 등 과거청산이 미해결로 남게 되었다.

둘째, 김일성 수상 겸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남일 조선인민군 총참모장(대장) 등 6·25전쟁을 직접 기획하고 실행한 자들이 대부분 사망하여 형사책임을 묻는 것은 법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불가능하다.

셋째, ICC는 2002년 7월 로마규정의 효력 발생 이후 발생한 침략범죄에 대해서만 처벌할 수 있다. 그러나 6·25전쟁은 이미 66년 전에 사실상 종결된 전쟁으로 ICC의 관할 대상이 아니다. 별도의 ‘특별 국제형사재판소’ 설치 및 단죄 가능성은 현재의 한반도 현실에 비춰 제로에 가깝다. 따라서 설령 6·25전쟁에 관련된 책임자가 일부 살아 있더라도 이들이 처벌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6·25전쟁과 관련해 북한 정권의 최고책임자인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형사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지 여부를 묻는 사람이 있다. 이는 불가능하다. 형사책임은 어디까지나 범죄사실을 근거로 가해자에게 추궁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1950년 당시에는 태어날 꿈도 꾸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다. 자기가 저지르지 않은 범죄행위(침략전쟁 계획·준비·지시 등)에 대해 형사책임을 지라는 발상은 근대형법의 대원칙인 죄형법정주의에 맞지 않는 것이다.

다만 과거청산 내지 불법잔재 청산의 일부로서 진실규명(흑역사의 올바른 정리 차원)이나 정치적·도의적 책임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전자와 관련해서 6·25전쟁의 발발 배경과 원인, 전쟁의 진행 경과 및 피해 추계, 국제정치적 파급 영향 등에 대해서는 그동안 국제정치학자들과 역사학자 중심으로 많은 연구 업적과 성과가 축적되어 왔고, 학문적으로도 상당한 정리가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6·25전쟁 과거사’에 대한 정부 차원의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진실 규명은 여태껏 이뤄지고 있지 못하다.

단지 2005년 제정된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 따라 6·25전쟁 시기 대한민국 정부가 관여된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에 대해, 그리고 2010년 제정된 ‘6·25전쟁납북피해진상규명및납북피해자명예회복에관한법률’에 따라 전쟁 기간 동안 북한이 저지른 납북 사건에 대해 진상 규명이 제한적으로 실시되어 왔을 뿐이다. 이 밖에도 거창 양민 학살사건이나 노근리 사건에 대해서도 진상 규명이 행해진 바 있다.

그런 반면 가해자로서 북한의 ‘전쟁책임’을 주제로 한 역사적 진실 규명과 총체적인(국제법과 국내법의 측면을 아우르는) 법적 평가는 전혀 실시되고 있지 못하다. 전쟁이 발발한 지 7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이 문제가 국내외적으로 큰 관심을 끌지 못한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이제부터라도 ‘6·25전쟁 시 북한의 전쟁책임’을 대상으로 하는 정부 차원의 포괄적인 진실 규명과 한국의 대응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전쟁책임 규명은 북한이 저지른 모든 가해행위를 침략범죄, 반인도범죄, 집단살해죄, 전쟁범죄 등으로 유형화하여 그 실태를 조사하고 정확한 진실을 규명한 다음, 법적 평가를 하는 방식으로 진행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작업은 ‘과도기 정의’ 내지 ‘이행기 정의(transitional justice)’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다. 특히 한 시대의 역사적 및 법적 정리 차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6·25전쟁 기간 중 점령지 통제와 전시 인력동원 등의 임무를 담당해 북한에서 김일성 최고훈장을 받은 바 있는 전범(戰犯) 김원봉에 대해 최근 시민단체 일각에서 대한민국 정부 서훈을 위한 서명운동을 전개한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들리고 있다.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 같은 국가 정체성 혼란이 아무 거리낌 없이 나타나는 것은 아직까지 6·25전쟁 책임과 관련한 과거사 정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잘못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으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6·25전쟁을 직접 일으키지 않았으므로 그에 대해 형사책임을 추궁할 수는 없을지라도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물을 수는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현 북한 정권의 대표자인 동시에, 이전 북한 정권 수반들(김일성-김정일)의 정치적 계승자이기도 하다. 혈연적으로는 김일성의 직계손자이다.

따라서 김일성과 김정일이 집권 시절에 각기 행한 범죄행위나 불법행위에 대해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지는 것이 적절하다. 그 책임 해제의 방법으로는 사과(apology)나 재발방지 보장 등이 고려될 수 있다. 사과는 사죄 혹은 진사(陳謝)라고도 한다.

1970년대 초 빌리 브란트 수상은 동방정책의 일환으로 폴란드와 수교 및 불가침 조약의 체결을 추진했다. 1969년 브란트 수상은 폴란드를 국빈 방문하는 과정에서 전몰희생자 묘역 에서 무릎을 꿇고 절한 것은 희생자들에 대한 예를 표시한 것일 뿐더러 나치 히틀러가 일으킨 폴란드 침공(2차 세계대전의 개시)과 전쟁 중 폴란드 국민들에게 끼친 고통에 대한 사과와 반성을 상징적으로 웅변하는 것이었다.

또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1990년 5월 노태우 대통령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과거사와 관련해서 ‘통석의 염(痛惜の念, 애석하고 안타깝다)’을 밝힌 것은 다소의 논란이 있기도 하지만 일종의 ‘유감 표명’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국제사회에서는 이 같은 사과 내지 유감 표명의 사례가 적지 않게 발견된다.
 

제성호 미래한국 편집위원·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제성호 미래한국 편집위원·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북한에 대해 침략 전쟁 사과 요구해야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우리 정부가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에게 6·25전쟁에 대한 사과 내지 유감 표명을 요구하는 것은 정당하다. 이치에도 맞고 국제 관례에도 부합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남북 화해는 남북한의 정상이 몇 차례 만나 악수하는 것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북한이 진정성 있는 자세로 한국의 실체를 인정·존중하며, 가해자로서 피해자인 우리에게 행한 중대한 잘못(특히 6·25전쟁과 주요 대남 도발)을 시인하고 사과를 할 때 남북한 주민들 사이에 비로소 앙금이 가시고 화해가 싹튼다고 봐야 한다. 이런 점에서 진정한 화해는 남북 정상의 정치적 이벤트에 의해 인위적으로 성립되는 게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지난 6월 4일 청와대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국가유공자와 보훈가족을 초청했다. 이날 6·25전쟁 때 전사한 김재권 일병의 아들 김성택 씨가 참석해 문재인 대통령 앞에서 “화해는 전쟁을 일으킨 침략자의 사과가 전제돼야 한다. 69년이 지나도 사무친 원한이 깊은데, 단 한마디 (북한의) 사과도 없이 평화를 말한다면 또 다른 위선이고 거짓 평화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지극히 당연한 얘기다. 진솔한 사과가 있을 때 진정한 화해가 가능한 것이고, 이런 화해의 토대가 있어야 그 위에 실질적인 평화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런데 청와대는 서면 브리핑을 통해 김 씨의 발언을 전하면서 ‘북한의 사과 필요(요구)’ 부분을 의도적으로 포함시키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저자세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마땅히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라고 하겠다. 또 껄끄러운 것은 피하고 북한이 원하고 좋아하는 것만 추진하려 할 경우 ‘위장 평화 쇼’는 만들어낼 수 있을지 모르나 실질적인 남북관계 개선과는 거리가 먼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형평성에도 맞지 않는 일이다. 일본 정부는 식민지배와 관련해서 지금까지 몇 차례의 유감 표명을 해 왔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와 국민은 “진정성이 부족하다”며 일본 측에 추가적인 사죄를 거듭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북한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북한의 사과’ 문제는 입도 벙긋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 국민들이 전혀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보수와 진보를 떠나 6·25전쟁에 대한 사과는 남북 간 과거사 청산의 출발점이자 남북 화해와 평화의 기초라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아무쪼록 문재인 정부는 이 점에 착안한 입체적이고 종합적인 대북정책을 수립·추진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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