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분석] 군인이 대접받지 못하는 나라
[심층분석] 군인이 대접받지 못하는 나라
  •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9.07.03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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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24년 그리스는 스파르타 동맹군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스파르타 동맹군은 그리스의 테베를 거쳐 델리온으로 진격했고, 그곳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졌다. 열세에 몰린 아테네 군은 공포에 질려 전선이 무너졌고, 퇴각 나팔소리에 대혼란이 벌어졌다.

그때 중년의 한 병사가 자신의 부대원들에게 ‘방패를 붙이고 대오를 갖춰라!’고 외쳤다. 지휘관은 이미 어디론가 내뺀 상태였다. 그 병사의 지휘에 따라 우왕좌왕하던 부대원들은 한 곳으로 모여 방패를 붙이고 질서 있게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추격하던 적군들은 방어가 단단한 이 부대를 포기하고 다른 아테네 부대들을 쫓아갔다. 그렇게 위기 속에서 자신의 부대를 구한 이는 바로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였다.

소크라테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네 번이나 참가했고 여러 번 혁혁한 공을 세웠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에서 이름을 얻기 시작한 것은 그의 철학 강의가 아니라 바로 전투에서 세운 무용담 때문이었다. 훗날 그가 법정에서 심판을 받을 때 배심원들은 소크라테스의 무공을 참작해 그가 반성한다면 살려줄 것을 결의하기도 했다.

소크라테스는 문약(文弱)에 빠진 아테네의 시인들과 귀족들, 그리고 향락에 젖은 시민들에게 ‘가치 있는 삶’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전쟁에 나간 장군들을 조롱하고 아테네의 적을 수호하는 신들을 찬양하는 시인들의 시를 검열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군인에 대해 그들을 ‘수호계급’이라며 철인계급 그 다음으로 높이 평가했다. 플라톤 역시 군인으로 참전했다. 그런 위대한 철학자들에게는 상무(尙武)정신이 있었다.

전쟁사에 해박한 전 육사 교수 온창일 박사는 상무정신에 대해 ‘호전성이 아니라, 위협에 맞설 수 있는 용기와 수단, 그리고 정신’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상무정신은 단지 군인에게만 요청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이라면 누구나 지녀야 하는 덕목 가운데 하나다. 시민들이 먼저 자신의 자유와 소유, 그리고 평화를 수호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고 이를 정치가 뒷받침하는 가운데 체제를 수호하는 군의 상무정신도 고양된다는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은 근본적인 위기를 맞고 있다는 우려들이 제기된다.

행진하는 조국의 간성 육사생도. 그러나 운동권세력이 사회 전반을 장악하면서 군을 업신여기던 조선조의 ‘숭문천무 기’조가 되살아나고 있다.

‘군바리’ 武를 천시했던 민주화 구호

1961년 2월 12일자 동아일보에는 당시 경찰이 범죄자들을 대상으로 한 은어(隱語)조사에서 경찰을 ‘짭새’, 군인을 가리켜 ‘군바리’라고 한다는 보도가 등장했다. 이후 ‘군바리’라는 말은 군인을 비하하는 불온한 속어 정도로 치부되었으나, 소위 80년대 민주화 투쟁기에 이르면 군바리라는 말은 박정희, 전두환 정부를 정치적으로 비난하는 용어로 자리를 잡아갔다.

실례로 1986년 5월 5일 개헌을 주장하던 신민당의 인천지부 행사에는 ‘양키에 빌붙어 노동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군바리들과 자본가들의 불거진 배때기를 보라’라는 원색적인 비난이 담긴 유인물들이 등장했다. 이런 유인물의 작성 단체들은 ‘반제반파쇼민족민주투쟁위원회(민민투)’, ‘서울대학교총학생회’, ‘반미자주화 반파쇼 민주화투쟁위원회(자민투)’, 서울노동자연합회(서노련), ‘민주화청년연합회(민청련)’ 등 운동권 단체들이었는데, 그 가운데는 YS정권의 모태가 되었던 ‘민추협’과 ‘민주산악회’도 있었다.

이들이 현재 DJ로부터 이어지는 민주당과 YS로부터 이어지는 한국당의 정치 세력의 근간들이라 할 수 있다. 소위 ‘문민정부’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던 대한민국 문반(文班)정치 세력은 어쩌면 이전의 안보와 고도성장을 이끌어 온 무반(武班)정치 세력을 대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시작은 ‘87민주화’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역사바로세우기’라는 이름으로 시작됐다. 대한민국 군의 위상과 명예는 낮아지기 시작해 문재인 정권 들어서는 아예 군을 멸시하는 경향이 노골화되었다는 평가마저 듣고 있다.

최근 공관병 갑질 혐의로 기소되었다가 무죄를 판결 받았던 박찬주 장군(예비역 대장)의 경우 문재인 정권은 처음부터 군인으로서 그가 가진 명예를 짓밟았다. 만일 이 문제가 한 개인에 대한 사건이어서 군에 대한 전체적인 명예를 논하기에 부적절하다면 박찬주 장군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지난해 건군 70주년 국군의 날 행사를 축소시켜서 가수 싸이 공연으로 때운 것은 정말로 군을 모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뿐만 아니라 선배 전우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어떤 목적이나 경우에도 군의 기본을 건드리거나 훼손해선 안 된다.”
 

군의 기본을 훼손했던 좌·우의 정치권

정치권이 군의 기본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박찬주 장군의 말은 일본 자위대 항공기 레이더 조사 문제, 그리고 최근 동해 삼척항 북한어선 정박 사건에서 청와대가 어떤 일을 했는지 상기하게 만든다. 청와대 권력이 군의 입을 틀어막고 어떤 교시와 지시를 내렸었는지 언론을 통해 고스란히 밝혀지고 있다.

국방부 장관은 기자 질문 한마디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한마디로 군이 국민에게 보고하고 설명해야 할 것을 청와대가 나서서 국민의 눈과 귀를 가렸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 군은 국민 기만의 수단으로 동원되는 권력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군 통수권을 가진 대통령은 어떤가.

문재인 대통령은 서해교전 기념일이나 현충일에 천안함 용사들이 영면한 곳을 찾지도 않았으며 지난 6·25기념일에는 참전 전몰장병 묘역을 찾아보지도 않았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을 마치 말아먹기라도 한 듯 요란했던 방산비리는 정작 비리 혐의로 기소된 최윤희 전 합참의장에 무죄가 확정된 데 이어 그 아들에 대한 검찰의 기소유예 처분이 헌법재판소에 의해 취소됐다.

문제는 이런 일들이 단지 문재인 정권에서 심각해진 것일 뿐 과거 이명박, 박근혜 정권 시절에도 군에 대한 정치권의 시각과 태도는 군이 체제 수호의 중심이라는 점을 방기하고 ‘무인천시’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일례로 이명박 정부는 임기 초기에 노무현 정부 때 설치된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사무처를 해체하고 자문기구로 전환하면서 사실상 폐지했다. 청와대 외교안보정책조정회의에 모두 6명의 장관급 인사가 참석했지만 이들 가운데 국방장관과 국정원장을 빼고는 모두 외교부 출신이었다. 게다가 회의 의장은 외교통상부 장관이 맡고, 간사는 외교안보수석이 맡았다. 이를 두고 외교부 간부회의인지 청와대 안보회의인지 헷갈린다는 평가들이 터져 나왔다.
 

귀환하는 미군 장병들을 열렬히 환영하는 미국 시민들. 군인을‘군 바리’라고 업신여기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미국에서 군인은 존경의 대상이다.
귀환하는 미군 장병들을 열렬히 환영하는 미국 시민들. 군인을‘군 바리’라고 업신여기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미국에서 군인은 존경의 대상이다.

여기에 NSC의 업무가 외교안보수석실과 국가위기관리실에 분산 배치되면서 유기적인 업무 조율이 이뤄지지 않았고 위기 대응에도 둔감했다는 평가를 받고 말았다. 결국 5년 동안 금강산 관광객 피살,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사건 등 북한의 대형 무력도발이 연달아 터지며 ‘안보에 실패한 정부’라는 비판을 샀다.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와는 달리 안보라인에 한미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균형과 안정성을 확보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정작 박정희 대통령의 5·16혁명에 대해 국민에게 ‘고통을 주었다’고 평가한 점, 중국 전승절 참석, 사드 문제 그리고 한일군사협력과 같은 문제에서는 친중반일에 기우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보를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결국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상무정신 부재, 안보적 맹점은 ‘군대를 가지 않아 군대를 모르는 군 통수권자들’이라는 비판이 훈장처럼 붙었다. 좌나 우나, 진보나 보수나 이러한 정치세력의 갈짓자 안보 행보에 대한 신원식 전 합참차장(예비역 중장)의 시각은 독특하다.

“우리는 조선시대로부터 효율과 무관한 권력 장악으로 승부를 내는 방식이 오랫동안 진행되면서 정치인들이 박정희, 전두환이라는 군인 대통령이 예외적으로 경제나 안보에 성과를 냈던 점에 불편해 한다고 봅니다. 머슴이 갑자기 일을 잘하니 양반이 시샘하는 식의 그런 분위기와 맞물려 있다고 보는 것이죠. 사실 우리는 1990년 이후 즉 김영삼 정권 이후 과거에 빠져 있던 그런 무인천시 사상으로 빠르게 돌아간 것이라고 봅니다.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던 과거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문무가 굉장히 불균형해지고 있는 것이죠.”(미래한국 좌담 中)

신원식 장군의 해석은 우리 사회에 군을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하는 풍조가 정치권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해석하기에 따라 ‘숭문천무(崇文賤武)’의 오랜 유교 당파적 고질병이 다시 부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되는 것이다.과거 조선 건국에 반대했던 사림파(士林派)는 당쟁 사화(史禍)를 통해 나름 호방했던 훈구파를 내몰고 권력을 잡은 후 조선왕조를 극도로 문약한 국가로 만들었다.

그런 역사의 데자뷰를 지난 80년대 ‘민주화 운동’이라는 이름이 소환해 내고 90년대 공산주의 몰락과 2000년대 소비경제의 발달 속에 국민의 상무정신은 희박해진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 결과 이제는 군대에서 주적의 개념이 사라지고 ‘민주군대’라는 이름으로 군인정신이 박제화 되는 그럼으로써 ‘죽은 무인(武人)의 사회’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우려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려 말 문약에 빠져 희망이 보이지 않던 시대에 새로운 국가혁명을 꿈꾸고 새로운 왕조의 시대정신을 찾던 목은 이색의 말은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저서<중방신작공해기에서 이색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유와 소유, 회복해야 할 상무정신

“내가 생각건대, 문(文)과 무(武)는 국가의 쓰임이 됨에 있어서 인체의 두 팔과 같고 수레의 두 바퀴와 같으니, 어느 하나를 일방적으로 무시해서는 물론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시대의 치란(治亂)에 따라 쓰이는 면에 있어서도 경중(輕重)이 있는 법이니, 지금 이처럼 어려운 일이 많은 때를 당해서는 나와 같은 문관(文官)들은 높은 다락 위에다 묶어 두어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무관(武官)들이 간성(干城)이 되고 용감한 장수(爪牙)가 되어 나라의 운명을 제대로 떠맡게 되리라는 것을 또한 알 수가 있다.”

이색은 조선 개국 공신 정도전, 남은, 조준의 스승이었다. 그의 가르침이 무인이었던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바탕이 되었지만 정작 이색은 이성계의 혁명에 동참하지 않았다. 이색이 비록 상무정신을 강조했다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문무겸비를 지혜로 여겼던 것이고 그런 이색의 눈에 무인 이성계는 적임자가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역설적인 것은 위화도회군으로 역성혁명을 완수한 이성계는 자신과 같은 무인들을 억압했다. 자신의 권력을 보호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이 전통이 조선조에 ‘숭문천무’의 기조가 되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런 ‘숭문천무’의 전통이 오늘 대한민국에서 ‘崇민주법치, 賤자유안보’라는 코드로 유전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격동하는 동북아 질서 상황에서 대한민국 국민들의 상무정신은 부활해야 한다. 자신의 자유와 소유를 지키려는 용기와 시민정신이 바로 상무정신이라는 점에서, 이 정신을 잃으면 ‘죽은 무인의 사회’가 도래하며 그 결과, 누구도 자신과 가족을 지킬 수 없게 된다는 것은 이미 역사의 수많은 사례들이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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