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한국 사회에 스며드는 영화 ‘기생충’
[영화평] 한국 사회에 스며드는 영화 ‘기생충’
  • 조희문 영화평론가·조희문영화아카이브 대표
  • 승인 2019.07.05 11:1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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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황금종려상.

영화에 기대며 살아가는 경우라면 분야에 상관없이 누구나 인정하는 타이틀이다. 영화인에게 주는 노벨상쯤 된다고나 할까. 바른손이엔에이 제작, CJ엔터테인먼트 투자·배급, 봉준호 연출의 ‘기생충’은 지난 5월 제72회 칸국제영화제에서 경쟁부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영화제가 끝날 무렵 ‘기생충’의 황금종려상 수상 소식이 전해지면서 국내 영화계는 물론 사회 각계가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국 영화로서는 처음 수상한 것이니 반색을 할 만도 했다.

이후의 반응은 신드롬이라고 할 만큼 여기저기서 온통 소란스럽다. 수상 이후 언론사 영화담당이나 평론가들은 하늘이 내린 걸작이라도 나온 듯 찬양 일색이고, 관객들 또한 예수님 옷 보듯, 부처님 사리 친견하듯 줄지어 몰려든다. 5월 30일 개봉한 ‘기생충’은 6월 25일 현재 전국 923만 1144명의 관객을 끌어들였다. 1000만 명을 넘길 가능성도 높다. 역대 칸영화제 수상작 전 부문을 모두 합친다 하더라도 최고 흥행 기록으로 남을 수도 있다.

한국 영화와 칸영화제

다만 이전, 칸영화제와 이런저런 인연이 있거나 수상기록을 지닌 영화인들 중 봉준호 감독이 ‘황금종려상’ 작품의 연출자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에 대해 외면적으로는 축하를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그 주인공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워할 수도 있다.

‘칸느 박’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칸영화제 수상기록을 가진 박찬욱이나 한국 영화 감독 중에서는 가장 사유적이어서 ‘황금종려상을 받는다면 내가 가장 유력할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을지도 모를 이창동 같은 경우는 뒤통수를 맞은 심정일 수도 있을 테니까.

한국 영화가 칸영화제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84년 이두용 감독이 연출한 ‘여인잔혹사-물레야 물레야’(1984)가 비경쟁부문인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되면서. 그보다 앞서 임권택 연출, 강수연 주연의 ‘씨받이’(1987)가 베니스영화제에 참가해 여우주연상(강수연)을 수상하는 성과를 얻었고 다른 영화제들에서도 몇 가지 수상을 챙기기는 했지만, 칸영화제는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성역으로 여기고 있을 때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 영화의 제작 수준은 국제적 레벨과 겨뤄 편차가 심했고, 국제적 위상도 빈약했다.

당연히 국내 영화계로서는 해외 영화제의 구성이나 운영 방식에 대한 정보에도 어두웠다. ‘주목할 만한 시선’이 어떤 성격인지는 잘 알지 못하더라도 칸영화제에 참가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해당 영화의 감독은 ‘예술가’로 공인 받는 셈이었고, 다른 영화인들과는 위상이 달라지는 듯했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 한국 영화 중에서 경쟁부문 본상을 수상하는 사례들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임권택 감독이 ‘취화선’(2002)으로 감독상을, 박찬욱 감독은 ‘올드보이’(2003)로 심사위원대상을, 이창동은 ‘시’(2010)로 각본상을 받았다. 전도연은 ‘밀양’(2007)으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독일영화 ‘엠마 블랭크’(2009)와 ‘기생충’의 포스터 이미지. 독창성을 의심할 만큼 유사하다.
독일영화 ‘엠마 블랭크’(2009)와 ‘기생충’의 포스터 이미지. 독창성을 의심할 만큼 유사하다.

대통령의 축하 인사의 겉과 속

유럽이나 미국을 제외한 아시아권 영화들 중에서는 1954년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감독이 연출한 일본 영화 ‘지옥문’(1954)이 처음으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카게무샤’(1980),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나라야마 부시코’(1982), ‘우나기’(1997), 고레에다 히로가즈 감독의 ‘어느 가족’(2018)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5편의 수상작을 냈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은 한번 받기도 어렵다는 황금종려상을 두 번이나 받았다.

중국은 1993년 첸카이거 연출의 ‘패왕별희’로, 이란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체리향기’(1997)로, 태국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엉클 분미’(2010)란 영화로 각각 황금종려상 수상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이외에도 단편부문 수상기록을 합치면 명단은 더 늘어난다. 한국의 경우 2013년 문병곤 연출의 ‘세이프’가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기생충’의 수상이 축하할 만한 성과이기는 하지만, 한국 영화만 이룬 성과라고 감격하기에는 앞선 경우들이 적지 않고, 국내 영화인들의 기반 다지기도 보이지 않는 기여를 한 부분이 적지 않다.

문재인 대통령은 봉준호 감독이 연출한 ‘기생충’ 영화가 칸국제영화제의 경쟁부문 그랑프리 황금종려상을 받은 것에 대해 축전을 보냈다. 지금까지 어느 한국 영화도 거두지 못했던 성과를 얻은 것이니 축하할 일인 것은 분명하고, 대통령이 축전을 보낸 것도 자연스럽다. 다만 축전 문구 중 “수상작 ‘기생충’이 지난 1년 제작된 세계의 모든 영화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인정받았다...”고 한 부분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오해하기 쉬운 편견에 대통령도 홀려 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기생충’의 한 장면.
‘기생충’의 한 장면.

지난 1년 동안 제작된 영화라는 제한이 반드시 적용되는 것은 아닌데다 ‘세계의 모든 영화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칸영화제가 유명한 영화제이기는 하지만 세계의 모든 영화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닌데다 선정 기준도 대중성보다는 실험성, 독창성을 우선하기 때문에 칸의 기준이 모든 영화 평가의 보편적 기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관객들에게 널리 알려진 미국 아카데미 영화상의 선정과 칸영화제의 선정이 확연히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참가 대상과 평가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칸영화제는 여러 종류의 영화를 모아 보여주는 페스티벌(Festival)이고 아카데미영화상은 영어를 사용하는 영화(주로 미국 영화)를 대상으로 각 부문 수상자를 선정하는 시상식(Award)이란 점에서 서로 다르다.

대통령이 보내는 축전은 본인이 직접 작성하는 것인지, 참모들이 적당한 내용을 만들어 제출하면 승인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대체로 참모들의 의견을 받는 경우라고 한다면, 참모들의 인식이 그렇다는 것이고, 속사정을 알지 못하는 대통령 또한 그대로 승인한 결과가 ‘축전의 오류’로 드러난 셈이다. 어느 외국을 방문했다가 현지어로 인사한다는 것이 그 나라 언어인지 아닌지 모른 채, 낮 인사인지 밤 인사인지도 몰라 어이없는 실수를 한 사례와 닮았다.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과 경쟁부문 심사위원장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과 경쟁부문 심사위원장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

칸영화제 참가작은 경쟁부문의 경우 프랑스를 제외한 다른 어느 지역(국가)에서도 공개 상영하지 않은 영화를 대상으로 20편(2019년은 21편)을 선정하는데, 참가 기간은 영화제가 열리기 전이라면 가능하다. 심한 경우 미완성 상태로 영화를 보낸 뒤 이후에 완성본으로 교체한 사례까지도 나왔다. 지난해 이창동 감독의 ‘버닝’은 영화제가 열리기 직전에야 겨우 완성본을 보냈다. 다른 영화제에 참가했거나 상영을 한 경우라면 참가 대상에서 제외된다. 제한적인 시사회를 제외하고는 어디에서도 상영하지 않은 영화에 한해 참가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칸영화제를 향한 영화인들의 관심이 높기 때문에 가능한 경우라면 누구나 영화제에 출품하기를 원한다. 대략 해마다 300여 편 내외의 영화가 영화제에 참가하게 되는데 지원은 3000여 편 이상이 몰려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 각국에서 제작하는 영화 중 수준이나 경향이 확연히 다른 경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화가 참가를 원한다고 봐도 무리가 없는 정도다.

공식적으로는 누구든 영화제에 참가 지원을 할 수 있지만, 어느 영화가 참가 승인을 받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영화제 측으로서는 어느 영화를 초청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몰려드는 영화 중 어느 것을 제외시키는가가 더 큰 일이다. 대부분의 영화제들은 어느 영화를 골라 초청 계획을 세우지만 칸의 경우 굳이 각국을 돌아다니며 영화를 고를 필요가 없기 때문에 프로그래머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눈에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레드카펫 행사에서 취재진 앞에 선 배우들과 감독.
레드카펫 행사에서 취재진 앞에 선 배우들과 감독.

칸영화제의 경우 평판이 높은 만큼 낯가림이 유달리 심한 경우로 꼽기도 한다. 영화제 측이 관심을 보이는 감독이 따로 있고, 그들이 만든 영화는 우선적으로 참가를 허락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대체로 상업적인 경향의 감독 영화보다도, 주최 측의 취지에 어울린다고 보는 경우들에 집중한다. 룸살롱 마담이 눈여겨보는 여종업원들을 관리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러면서도 영화제 흥행을 위한 스타 유치 전략도 병행한다. 세계적 흥행을 일으킨 ‘어벤저스’류의 미국식 오락영화는 개막작이나 폐막작으로 배치하는 경우가 흔하고, 심사위원들의 구성도 미국 배우나 감독 등을 포함 시키는 사례도 잦다. 그도 저도 아니면 영화제 게스트로 초청하기도 한다. 칸영화제 기간 동안 미국 영화계의 스타들이 자주 소개되는 것은 흥행을 위한 영화제 측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스타들 입장에서도 비행기표나 숙식을 비롯한 경비 일체를 제공 받고, ‘품격 있는 행사’의 게스트로 미디어에 오르내리는 일은 결코 손해 보는 일이 아니니 이를 두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으로 칠 만하다. 겉으로는 화려한 잔치처럼 보이게 만들고, 각 경쟁부문의 선정은 ‘예술적’ 영화를 고르는 척하는 ‘전략적 2중 플레이’는 칸영화제의 특징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느 해인가 미국 배우 겸 감독 조디 포스터를 심사위원장으로 초청하려 했지만, 포스터 측이 ‘다른 일정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하는 바람에 머쓱해진 경우도 있었다. 언뜻 보면 세계 최고의 예술영화제이고 누구에게나 문이 열려 있는 잔치 같지만, 실제로는 넘기 힘든 옹벽을 친 채 ‘그들만의 리그’로 움직이는 행사라고 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6월 23일 서울 용산구의 한 극장에서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 ‘기생충’을 관람하고 있다. / 연합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6월 23일 서울 용산구의 한 극장에서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 ‘기생충’을 관람하고 있다. / 연합

결국 특정 영화제에서 주요 상을 수상을 했다고 그 영화가 특별히 뛰어나다거나 상을 받지 못한 다른 영화들의 수준이 형편없다는 식의 평가도 무리다. 수준 차가 눈에 보일 정도로 분명하다면, 그해 참가작들의 수준 차가 유난스레 심해 적당한 영화를 찾기 어려웠거나 취향에 맞는 영화를 고르려다 실패한 경우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 않은데도 참가작의 높낮이가 눈에 뜨일 정도로 심하다면, 영화제 측이 수상작 한 편을 미리 내정하고 다른 영화들을 들러리로 내세웠다는 의심을 피하기 어렵고, 그런 일이 반복되면 영화제의 신뢰나 권위는 흔들릴 수 밖에 없다. ‘칸영화제 경쟁부문 본선에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영예스러운 일’이라는 영화계의 일반적인 평가가 여전히 유효한 것은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권위를 인정 받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화의 우열은 기록을 다투는 스포츠와는 다르다. 보는 사람의 취향과 트렌드, 문화적 요인 등에 따라 평가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의 축하인사는 그저 ‘수상을 축하한다’는 정도만 하면 되었을 것을, 한마디 덧붙이는 바람에 영화에 대한 이해가 극히 빈약하거나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말았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적 감각이 특출하다는 사실에는 이의가 없다. 사건을 구성하는 서사적 역량, 시나리오의 디테일, 구성을 끌고 가는 장악력 등 영화 연출가로서 갖춰야 할 감각과 재능 면에서 당대의 감독들과 견줘 충분히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재능의 진행 방향을 제대로 잡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적지 않다. 사회구조를 계급적 대립 관계로 보거나 군림하는 권위에 종속 또는 추종하는 노예 관계로 설정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좌파적 세계관의 표현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의구심이다.
 

‘기생충’의 불편한 시선

봉준호 영화의 대표작이자 흥행 대박의 사례로 꼽는 ‘괴물’(2006)에서 한강 괴물의 출현과 그로 인한 여러 가족의 피해, 재난 수준으로 이어지는 소동의 원인을 한강 인접의 미군 부대로 설정한 경우는 공공연한 반미를 부추긴다. 부대 내 영안실에서 사용하다 남은 프롬알데히드 성분이 독극물인 줄 알면서도 미군 장교는, 위험하다고 지적하는 한국인 장교의 경고를 무시하며 막무가내로 폐기를 명령한다.

결국 돌연변이로 생겨난 괴물은 한강 주변에서 매점 생활을 하는 강두 가족을 풍비박산 낸다. 피해자 가족은 괴물에게 시달리는 것은 물론 재난을 다루는 정부 측의 엉터리 대책에 이중으로 혼이 난다. 오히려 피해를 당한 시민들이 자위적 대응에 나서서 응징할 뿐이다. 무고한 시민을 위험에 빠트리고, 재난이 닥치는데도 시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행정당국은 당시 주한미군과 정부를 향한 의도적 비난으로 읽힌다.

‘설국열차’는 인류 문명이 사라진 미래의 어느 시기를 무한궤도로 순환하는 열차의 구성을 빌려 계급과 계층으로 나뉜 사회의 풍경을 묘사한다. 각각 분리된 차량은 같은 기관차에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자유롭게 오갈 수 없는 금지 공간으로 기능한다. 같은 세상에 살면서도 넘나들기 어려운 계층 간 구분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의도했는지 아닌지는 감독의 설명을 듣지 않고서야 모를 일이지만, 영화가 개봉되던 당시의 우리 사회를 향해 시니컬한 비판을 던지는 것으로 보인다.

‘기생충’에서도 부자를 조롱하고, 가난한 가족을 멸시하는 듯한 암울한 설정을 재연한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잣집에 기생하는 백수 가족은 우리 사회의 루저들을 상징한다. 처음부터 가난뱅이로 태어난 것은 아닌 것 같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현재는 바깥이 내다 보이는 반지하 셋방에 ‘바퀴벌레처럼’ 모여 산다. 남편, 아내, 아들, 딸 등 식구 구성원 모두 한결같은 백수들이다.

우연한 기회로 발을 들이게 된 박 사장 집은 모든 것이 차고 넘치는 극한의 부자로 설정한다. 차례차례 빈틈으로 스며드는 바퀴벌레 가족은 발 디딜 자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거짓말과 위조, 모함과 사기를 서슴지 않는다. 부자는 그런 줄도 모르고 가난하고 사악한 일당들의 숙주 노릇을 한다.

영화에서는 계단, 비, 지하실, 냄새, 인디언 같은 공간과 코드를 상징처럼 배치한다. 바퀴벌레 가족이 사는 반지하 셋방에서조차 남의 집 와이파이가 잡히는 곳과 아닌 곳으로 나뉘고, 부잣집은 아래 위층, 지하실로 이어지는 계단이 이어진다. 갖가지 엽기적인 방법으로 부잣집에 발을 들이지만, 아무리 계단을 오르내려도 그들의 신분은 달라지지 않는다. 집주인 가족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바퀴벌레 가족 일행은 걸판지게 술자리를 즐기지만, 쏟아지는 비는 그 상황을 일순간에 뒤집어 버린다.

조희문 영화평론가·조희문영화아카이브 대표
조희문 영화평론가·조희문영화아카이브 대표

예정에 없이 되돌아온 쫓겨난 가정부, 캠핑 계획이 중단되는 바람에 예정보다 빨리 돌아오는 중인 집주인 일행... 그 과정에서 부잣집이 1,2층으로 구성되어 있을 뿐 아니라 주인도 모르는 지하실이 있고 그 지하실 밑에 또 다른 공간이 있다는 상황이 나타난다. 그 속에 또 다른 바퀴벌레 같은 존재가 웅크리고 있다는 상황으로 이어지면서 영화는 반전을 거듭한다.

정원 풍경이 환히 내려다 보이는 2층 거실, 자신의 존재를 결코 드러내지 못한 채 몸을 숨기고 있는 지하 공간의 대비적 배치는 ‘설국열차’에서 구성이 다른 세계를 병렬 배치한 것처럼, 넘어서기 어려운 계층 간 격차를 드러내는 구성이다. 부잣집에 스물스물 기어드는 백수 가족들의 행태를 슬픈 코미디처럼 보여주며 웃음을 끌어내던 영화는 전반부와 달리 후반부로 진입하면서 처참한 비극으로 돌변한다.

감독은 관객을 향해 ‘영화가 이대로 끝날 줄 알았어?’라는 농담을 하듯 분위기를 바꾸는 구성이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서로 근접할 수 없었던 부자 가족과 ‘바퀴벌레 가족’은 어떠한 소통이나 이해를 향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채 극한의 상황으로 내몰릴 뿐이다. 현재를 극복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미래를 향한 일말의 화해도 비추지 않는다. 부자는 조롱의 대상일 뿐이고, 가난한 백수 가족은 비에 젖고 물에 빠져 허우적댈 뿐이다.

봉준호의 영화적 시선은 미국 영화 ‘양들의 침묵’(1991)에 등장하는 엽기적 살인마 한니발 렉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의사 출신의 한니발은 그 빛나는 재능을 치료에 사용하는 대신 잔혹한 연쇄 살인에 동원한다. 부유한 집안의 귀한 도련님으로 태어나 여유로운 청년 시절을 보내고, CJ나 넷플릭스 같은 대자본의 지원으로 만드는 영화들의 근저에 좌파적 시선을 깔고 있는 봉준호 감독의 겸손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얼굴에 한니발 렉터의 이미지가 자꾸 겹쳐지는 것은 영화적 상상력일까? 이래저래 ‘기생충’은 한국 사회의 한 부분으로 스며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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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2019-09-13 03:11:05
아이고 조희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