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유발 하라리의 르네상스 전쟁 회고록 전쟁...역사 그리고 나, 1450~1600
[리뷰] 유발 하라리의 르네상스 전쟁 회고록 전쟁...역사 그리고 나, 1450~1600
  • 김민성 미래한국 기자
  • 승인 2019.07.22 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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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3부작’을 통해 하라리가 던진 질문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였다. 보잘것없는 존재였던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를 정복한 뒤 이제 스스로 신의 자리를 넘보게 되었다는 대서사는 불가해한 세상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는 탁월하고 대담한 이야기로 각계각층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요컨대 세상의 의미를 구하기 위해 ‘우리’의 역사를 쓴 셈이다. 그렇다면 그 속의 ‘나’는 누구일까? ‘나’의 역사는 어떻게 존재할까? 이 책은 ‘우리’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 전, 하라리가 역사 속 ‘나’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개인의 정체성 문제를 파고들기 위해 하라리가 주목한 것이 바로 르네상스 시대 군인들이 남긴 회고록이다. 그들의 회고록은 17세기 중앙집권적 근대국가가 등장하기 전 역사history와 개인사lifestory 사이의 긴장 관계를 첨예하게 드러낸다. 왕과 민족을 핵심으로 한 ‘역사 만들기’를 추진하기 시작한 국가에 저항한 독립적 개인의 정치적 급진성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주요 연구 대상으로 삼은 군인회고록은 1450년에서 1600년 사이 34명이 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영어 문헌이다. 

르네상스 시대 군인들의 회고록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구색을 갖춘 글이라고 하기 어렵다. 인과관계로 이어진 이야기라기보다 제각각인 에피소드의 건조한 나열이고, 독자를 이해시키려 하지도 않은 채 독자의 기억에 남으려 하고, 역사적 사건과 자전적인 현실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는, 알쏭달쏭한 글이다. 게다가 일상생활은 거의 대부분 무시한 채 전쟁터의 무용담뿐인 기록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기존 이론에는 ‘진실한 목격담’ 가설(회고록 저자가 역사적 사실의 목격자로서 진실성을 담보)과 ‘개인주의’ 가설(회고록 저자가 근대적 개인으로서 개체성을 창조하거나 표현)이 있다. 

그러나 하라리는 당대 진실성의 원천이 목격 등의 경험보다는 귀족의 명예에 더 기대었다는 점을 들어 ‘진실한 목격담’ 가설을 논파한다. ‘믿을 만하다’는 말은 명예와 동의어였으며, 진실은 목격자가 아니라 명예를 지닌 귀족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다. 실은 르네상스 시대 군인은 명예를 목숨처럼 여긴 전사 귀족warrior noblemen이었다. 귀족이 아니면 역사 속에서 자리를 차지할 수도 없었고, 정체성도 빼앗기고 말았다. 한편, 자율적인 내면과 심리 상태를 기술하지 않은 회고록 저자들을 근대적 개인으로 볼 수 없다는 이유로 ‘개인주의’ 가설 또한 기각된다. 물론 그들에게도 생각과 기분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개인적인 내면을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당시는 모든 일이 누구나 볼 수 있는 외적인 현실에서 벌어지는 세계였다. 

그들은 사실을 감정이나 생각이라는 필터를 거쳐 묘사하지 않았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남겨두었다. 비교 분석을 위해 하라리가 인용하는 20세기 군인회고록에서 갈증은 “독물 같은 저 강물도 마실 것”(151쪽)처럼 괴로움을 유발하는 경험으로 묘사되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회고록에서는 “갈증으로 죽을 뻔했다”(152쪽)는 사실만이 건조하게 언급될 뿐이다. 추상적인 경험보다 구체적인 행동이 명예의 준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전쟁은 왕과 국익을 위한 추상적인 투쟁이라기보다 실체가 있는 욕망과 명예를 위해 벌이는 한판 승부였다. 

명예의 동등함 원칙에 따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명예로운 행동을 한 사람은 누구나 동등한 처우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하급 군인도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한 귀족이나 왕과 동등한 위치를 요구하기까지 했다. 일반 병사로 군복무를 시작해 중급 지휘관까지 올라간 페리 드 귀용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와 자신이 역사 속에서 동등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렇기에 “나는 발랑시엔에 한동안 남아 있었고, 황제는 브뤼셀로 떠났다”(20쪽)처럼 황제와 자신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동등하게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 군인들에게 역사는 명예의 전당이었다. 역사는 기억할 만한 것을 기념하는 것이지, 지식을 전달하거나 교훈을 주는 수단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영웅적인 행위, 즉 무훈이었다. 전투의 이유나 영향보다는 개인이 전투에서 세운 무훈이 훨씬 더 중요했는데, 용맹한 행동들이야말로 기념할 만한 가치가 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독일의 직업군인 베를리힝겐은 자신이 참전한 주요 전투와 원정은 간단히 요약해버리고, 자신의 명예를 위해 싸운 일 같은 개인적인 사건들에 훨씬 더 관심을 보였다(253쪽). 

이렇게 무력의 내재적인 가치를 역사적 맥락에 우선하는 역사 인식으로 인해 르네상스 회고록은 명예로운 행동을 일화 중심으로 건조하게 나열한 사실의 기록이 되었다. 자연히 하라리가 ‘왕조-민족의 위대한 이야기’라고 이름붙인 근대국가의 중앙집권적 이데올로기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왕조, 민족, 국가를 중앙에 둔 역사는 인과관계에 따라 서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과관계에 따라 중요한 순서대로 사건들이 재배열되고 나면, 카를 5세는 귀용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인물이 된다(316쪽).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 군인회고록이 묘사한 역사적 현실은 그런 인과관계와 영향력을 무시함으로써 왕조-민족 이데올로기를 위협한다. 

인간의 현실 중 ‘역사적인’ 일부가 먼 과거에 속할 때는 ‘역사’라고 불리고, 가까운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 속할 때는 ‘정치’라고 불린다. 역사적 현실의 경계선이 어디인가 하는 문제는 학문적인 질문이라기보다 정치적인 질문이다. 경계선 안의 사람과 사건들에서 새로운 권력과 역할이 생성된다. 반면 역사적 현실에서 밀려나면 정치의 세계에서도 밀려난다(310~311쪽). 

하라리는 르네상스 시대 군인회고록이 역사적 현실을 묘사하는 방식을 역사와 개인사의 동일시로 고찰한다. 일화 중심적인 역사는 기록 하나하나가 의미를 가지며, 언제라도 추가할 수 있게 결말이 열려 있다. 각자가 인과율의 억압 없이 자유로운 글을 쓸 수 있다면, 삶 또한 의미를 가지며, 닫히지 않을 것이다. ‘왕조-민족의 위대한 이야기’는 개인사는 분리되어 떨어져나간 ‘우리’의 역사다. 르네상스 시대 군인회고록은 역사와 개인사가 일치하는 ‘나’의 역사다. 물론 당대 회고록 저자는 귀족 남성으로 정체성이 한정되었고, 역사의 내용은 명예로운 행동으로 국한되었다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역사와 개인사의 긴장 관계를 보여주는 잣대로는 손색이 없다. 

하라리는 맺음말에서 현재 역사가 결말을 열어둔 일화 모음으로 회귀하고 있다고 점친다. 르네상스 군인회고록이 개인사와 역사를 동일시했던 것을 넘어서서, 이제는 개인사가 역사보다 우위를 점하려 한다는 진단이다. 역사가 개인사와 개인의 경험을 기반으로 해야 제대로 기능할 수 있다는 주장에 근거한 것이다(“흑인 레즈비언 여성만이 흑인 레즈비언 여성의 이야기를 쓸 수 있다”, 364쪽). ‘나’의 의미가 확장되고 있음을 본 하라리는 7년 뒤 《사피엔스》를 출간하며 ‘우리’의 역사를 살펴본다. 하지만 역사의 흐름과 개인의 행복 사이에는 아직 커다란 공백이 남아 있음을 확인한다(《사피엔스》 19장). 

중세 전문가인 박용진 서울대 교수(인문학연구원)의 해제는 지적 도전을 즐기는 독자에게 매우 유용한 가이드가 될 것이다. 해제는 하라리가 구분하고 있는 ‘역사’와 ‘개인사’라는 용어를 이해하기 편하도록 다음과 같이 바꿔 생각해보자 제안한다. ‘역사’는 ‘우리’가 기억할 만한 것들의 이야기로, ‘개인사’는 ‘내’가 기억할 만한 것들의 이야기로. ‘우리’와 ‘나’의 긴장 관계가 조금 더 선명하게 보인다. 하라리가 이미 《사피엔스》에서 밝히고 있듯이 “우리는 이 공백을 채워나가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 공백을 메우려는 노력의 첫걸음으로 《유발 하라리의 르네상스 전쟁 회고록》은 훌륭한 선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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