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수기] 내가 태어나 겪은 북한의 식량난 역사
[탈북수기] 내가 태어나 겪은 북한의 식량난 역사
  • 이민복 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북풍선단장
  • 승인 2019.08.06 10: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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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기억나는 것은 6살 되는 1963년경이다. 얼마나 이팝(흰쌀밥)이 먹고 싶었으면 아침 달리기(아빠의 교육) 때 “강낭밥은 물러가라! 이팝은 오라!” 이렇게 소리 지르며 동네방네 뛰어다니는 아들놈을 보고, 아빠는 기가 막혀서인지 나만은 이팝을 먹여야겠다고 애쓰셨다. ‘늄’이라는 식기에 이팝을 주는데 절반은 아침으로 갈라 먹고 나머지 절반을 점심으로 먹으라고 한다.

아침을 많이 먹으면 점심을 적게 먹게 되는 밥 구조였다. 요즘 아이들과 달리 그때는 아침부터 많이 먹게 된다. 더 먹고 싶은데 점심을 생각하여 숟가락을 억지로 놓아야 하는 어린 마음의 인내력을 상상해보기 바란다. 현재 60이 지나서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데 이 모습을 매일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나는 사회주의 세대다. 농업마저 완전히 국영화된 1958년 태어났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인생인 나로서 결론부터 말하면 언제 한번 배불러 본 적이 없다. 먹는 문제가 오죽했으면 김일성은 ‘쌀은 사회주의’라고 했을까. 의식주란 전통적인 말도 식의주로 바꿔 부를 정도였다.
 

세계식량계획(WFP)을 통해 북한으로 지원되는 대한민국 쌀
세계식량계획(WFP)을 통해 북한으로 지원되는 대한민국 쌀

1965년 8살 때 찰조가 아닌 메조 밥에 상추쌈으로 먹으라는데 모래알 같은 조밥이 흘러내리고 내려 신경질이 나서 집었다 던지며 울던 기억이 또렷하다. 내가 겪은 이 지역은 북한의 대표적 곡창인 황해도였다. 또 아빠가 마을 간부인 집이었다.

북한 정권 역사에서 인민들이 가장 풍요하게 느낀 연대는 1967-1969년이다. 몸으로 내가 직접 겪어본 이야기이기도 하다. 가장 풍요했다는 것이 상점에 들어가면 투박하기 이를 데 없는 생필품과 질질 녹아 들러붙은 사탕이나 과자 등 식품들을 양껏 살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옥수수가 50% 되는 식량 배급이 정상적으로 공급되었다는 것이다.

이 풍요는 그러나 1970년 들어서 급격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식량 배급은 이미 그랬지만 생필품마저 배급제로 넘어갔고 그마저 품귀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70년 10월 5차 당대회 경축을 위해 중학교에서 몇 달 동안 합창 훈련을 마쳤는데 수고했다고 들러붙은 곽 사탕을 깨어 몇 알씩 나눠 먹으라고 한다. 사탕을 자유롭게 살 수 없고 당대회 경축행사용으로 특혜로 나눠 주는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식량 배급에서 쌀과 옥수수 비율이 3대 7로 올라가더니 그마저 전쟁준비용이라며 한 달에 나흘 간 잘라 공급했다. 유일수령화가 완성된 1972년부터 시작된 대표적 현상으로 인민생활과 유일수령화는 반비례관계가 있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궁핍은 지방보다 평양이 늦게 다가온다. 온 나라를 털어 ‘평양공화국’을 위하기 때문이다. 1974년 평남 순천에서 중앙대학인 김책공대에 응시하기 위해 평양에 갔는데 그때는 지방과 달리 식당에서 떡국을 마음대로 사먹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2년 후 1976년에 갔을 때는 줄을 서야 했고 식표 사는 것이 빽을 동원해야 할 정도로 됐다. 1977년 초 평양 출장 시 중앙당 간부였던 작은아버지 댁에 의하면 평양도 시민등록에 따른 생필품 배급제한다고 했다. 북한에서 가장 큰 평양백화점에 들어가도 타지인들은 진열대만 봐야 했다.

평양도 이 정도인데 지방은 말 그대로 초토화되었다. 상점은 텅텅 비었고 살 수 없는 진열대의 전시품만 뎅그러니 있었다. 이 실정은 당시 일기장에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아래 일기장 사진과 내용 설명 참고). 김 부자 생일 같은 특명절에 그래도 변함없이 배급했던 가정 당 돼지고기, 사탕과자 1킬로 미만의 식료품도 사라졌다.
 

인민의 낙원에서 아사했던 진실

1978년 남포와 1979년 원산에 출장을 가봤을 때 식당들에는 인산인해를 이뤄 밀고 당겨 식표를 떼야 겨우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준비한 밥그릇에 비해 항상 손님이 더 많다. 밥이 다 떨어지면 “이젠 끝났습네다!” 냉정한 그 소리와 지금껏 기다린 허기진 손님들의 모습을 상상해보기 바란다. 그러니 식사 질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도 “많이만 주시라요!”가 심정들이다.

1980년 6차 당대회를 연후 더 이상 대회를 열 수 없을 만큼 북한 생활은 극도에 다가간다. 잠시 숨통이 트일 때도 있었다. 1983년 인민소비품생산운동으로 단체별로 장사하도록 허용했을 때 그래도 풍요 기운이 감돌았다. 이 분위기 하에서 개인 뙈기밭과 개인 장사가 은밀히 성행해 풍요 기운이 높아져 갔다. 1985년이 되자 시중에 콩과 옥수수 여분이 생겨 평시 먹기 힘든 귀한 두부와 밀주가 성행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다음해인 1986년 김일성의 논문 <사회주의 완성을 위하여>가 발표되자 상황이 바뀌었다. 요지는 개인 뙈기밭 농사와 장사를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 논문 발표 이후 뚜렷하게 나타난 증상은 국가의 식량 배급이 몇 달씩 밀렸다는 것이다. 100% 옥수수 배급만 줘도 또 제 달에 받으면 감지덕지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1987년 라진선봉지구 출장길에 굶어 쓰러져 죽은 여인을 목격하기도 했다.

몇 달씩 밀려 주는 식량 배급을 기다리다 못해 배급소 가는 언덕에서 기진맥진해 절명한 것이다. 당시는 몇 명 안 되는 아사여서 덮을 수 있었다. 인민의 나라에서 굶어죽는다는 것이 말이 안 되기에 급병으로 죽었다고 하라고 지시했다. 통상적으로 북한의 아사는 1990년대라고 하지만 농업전문연구기관에 있던 우리로서는 1980대 말부터라고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큰일나겠다고 느껴 1990년 5월 31일 개인농 시험자료를 중앙당 1호 편지로 올렸던 동기의 배경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앙당 1호의 수신자 김 부자는 요지부동이었다.

로마니아 챠우쉐스크 처형과 천안문 사건, 동구권 붕괴 조짐은 절대 불가의 정세였다. 하지만 선전은 더 찬란했다. 특히 차우쉐스크가 처형된 1989년 말에는 급기야 각 마을에 선전간부들을 파견해 ‘인민생활 3개년계획’이 발표되었다. 3년 안으로 인민생활이 획기적으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그 밑천은 수령님의 크나큰 배려에 의해 주석자금 9300만 달러를 푼다는 것이다. 추상적인 지난 기간의 선전이 아니라 이번에는 매가정당 콩기름 몇 리터, 사탕과자 몇 킬로 등 차례진다며 아주 구체적인 숫자로 담보하듯 말한다.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그러나 현실은 극도의 식량난 입구에 들어서 있었다. 이제는 식량 배급을 밀려 주는 것이 아니라 아예 몇 달씩 못 주는 정도에 이른 것이다. 오랜 만에 식량이 온 배급소에 가면 지난 기간 못 탄 배급을 달라는 것은 이상한 자로 되었다. 못 타서도 그동안 살아 있었는데 당장 급한 자가 수두룩한 형편에 뭘 또 달라는 양심 없는 인격자인 것이다.

식량을 밀려 배급했던 1980년대 후반에 이어 식량을 몇 달 씩 아예 못 주는 1990년 초반, 그러다가 완전히 식량배급이 끊긴 것이 1994년이다. 이 해는 획기적인 ‘인민생활향상 3개년계획’이 끝난 다음해이며, ‘인민의 어버이’가 죽은 해이며 그 후계자는 ‘사회주의는 과학이다’ 논문을 발표한 해이다.

이제 더는 아사를 숨길 수 없을 만큼 ‘고난의 행군’이 본격화되었다. 당시 황장엽 중앙당 비서는 1995년 50만, 1996년 100만, 1997년 200만 명의 아사통계를 받았으며, 도합 350만 명이 아사되었다고 증언했다.

산 사람 입에 거미줄 쓸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다. 수 천 년 경험이 담긴 말이지만 현대의 북한에서만은 통하지 않았다. 자유 속에서만 그것이 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식량이 없다! 알아서들 살아라! 라고 솔직하게 말했다면 대량아사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지도 못하면서 이 말을 하지 않은 것이 범죄이면 가장 큰 범죄이다. 또한 알아서 피타게 사는 인민의 노력물을 3번의 화폐개혁으로 맹물화 시킨 것도 그렇다.

북한 인민은 수백만 아사와 화폐교환을 통해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 있다. 이젠 수령님이 아니라 내가 살아야 하는 구나! 이젠 누구도 믿을 수 없다!
 

북한에는 엄연하게 두 개의 경제가 존재한다.

식량 배급이 완전히 끊긴 1994년부터 25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렀다. 25년 동안 배급도 없이 어떻게 살아남았단 말인가. 수령님의 은혜인 식량 배급이 아니라 북한 인민 스스로 살아남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개인 뙈기밭과 개인 장사로 말미암아서이다. 이것을 가로 막아온 암적 존재가 사회주의였다. 천만다행으로 그 사회주의가 배급을 못 줘 간섭을 못한다. 설사 국가에서 배급을 준다고 해도 이젠 본능적으로 싫어진다. 그 배급 때문에 아사될 만큼의 극치의 고통을 몸으로 체험했기 때문이다.

하나는 수령의 국가경제이고 또 하나는 주민경제이다. 갈수록 주민경제가 수령경제를 압도해가고 있다. 아무리 포악해도 주민경제를 이길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누구의 편에 들어야 할까.

이민복 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북풍선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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