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분석] 역사학자가 본 ‘강제징용’ 판결의 문제점
[이슈분석] 역사학자가 본 ‘강제징용’ 판결의 문제점
  • 이우연 낙성대연구소 연구위원
  • 승인 2019.08.20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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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당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대해 2018년 10월 18일 대법원은 1인당 1억 원씩을 배상하라고 최종 확정 판결했다.

우선 ‘강제징용’이라는 개념은 성립하지 않는다. 징용 자체가 행정적 사법적 강제성을 갖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징용에 응하지 않으면, 1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엔 이하의 벌금에 처해졌다.

더 중요한 문제는 1939년 9월 이후 이뤄진 조선인의 일본으로의 노무동원을 모두 ‘강제’ ‘징용’으로 과장, 왜곡한다는 점이다. 징용은, 일본에서는 1939년 9월부터 시행되었지만, 조선에서는 1944년 9월에야 비로소 시행되었다.

징용 이전에는 조선인이 노무동원에 응하지 않아도 그를 법적으로 처벌할 방법이 없었다. 일본으로의 징용은 미군이 한일해협의 제공권을 장악하는 45년 3-4월경이 되면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일본으로 동원된 조선인 노무자 73만 4000여 명 중 징용으로 간 조선인은 10만 명 내외, 많아도 20만 명 이하로 추측된다.
 

징용이 실시되기 전에는 ‘모집’과 ‘관알선’이라는 형태로 조선인이 동원되었다. 일본 기업은 모집원을 조선에 파견하고, 총독부 행정조직이 그를 지원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발적 의지였다. 1939-40년에는 흉작으로 인해 모집계획 인원의 몇 배가 넘는 인원이 지원했다.

‘관알선’은 1942년 2월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때는 개인의 의지와 달리 지역 유력자나 면사무소 직원 등에게 떠밀려 일본으로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조선 청년들은 일본을 동경했지만 탄광과 같은 사업장은 기피했기 때문이다.(이때도 목숨을 건 일본으로의 밀항은 성행했다) 조선인 중에는 노무동원의 기회를 이용해 일본으로 비용 없이 합법적으로 안전하게 도항한 후 바로 도망가는 경우도 대단히 많았다.
 

‘미불임금’에 대하여

재상고심 선고를 맞이하는 사람들은 당시 일본제철에서 근무했고 공장은 탄광이나 광산보다 업무 환경이 훨씬 좋았다. 중요한 사실 하나는 그들이 1941-3년간 일했고 이때는 ‘징용’이라는 것이 조선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또 이들에게는 모든 급여가 정상적으로 지급되었다. 하물며 징용된 조선인조차 그러했다. 급여에 있어 ‘민족차별’은 없었다고 누차 주장했다. 다음 항목에서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1939년 9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일본으로 동원된 73만 4000여 조선인 노무자가 일본 기업으로부터 수령하지 못한 ‘미불임금’이 대단히 큰 금액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최소한 실증적으로 규명된 바가 결코 아니다. 하지만 한국의 정부, 연구자, 일반인 모두가 그렇게 오해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이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룬 연구를 나는 하나도 알지 못한다. 실증적 연구 없이, 막연히 그런 환상을 갖고 있는 것이다.

우선 ‘미불임금’은 ‘미불금’으로 칭함이 맞다. 그 속에는 임금만 아니라 저금, 퇴직적립금 등 퇴직 때 조선인 근로자에게 지급해야 할 각종 적립금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불금이 발생한 이유는 일본 기업이 조선인들에게 이들 금액을 체계적, 지속적으로 지급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종전 직후 조선인들이 주고 받을 돈을 미처 정산하지 않고 서둘러 귀국했기 때문이다. 미불금이 대단히 많으리라는 근거 없는 추측의 첫 번째 원인은 이러한 오해였다.
 

에무카에(江迎) 탄광 노무정산표. 노동시간과 임금, 수당, 공제 항목 등이 빠짐없이 적혀 있다. / 자료출처=이우연 연구위원 강연자료
에무카에(江迎) 탄광 노무정산표. 노동시간과 임금, 수당, 공제 항목 등이 빠짐없이 적혀 있다. / 자료출처=이우연 연구위원 강연자료

두 번째 원인은 자료의 방대함과 연구자의 게으름이다. 일본 정부는 이후 발생할 한국인의 채권변제 요구에 대비하기 위해 해당 기업들로 하여금 조선인에게 지급해야 할 ‘미불금’을 모두 공탁하게 했다. 따라서 미불금 문제를 연구하려면 일본 정부의 ‘공탁’ 자료를 봐야 한다. 그 자료는 실로 방대하며 한국 정부에 제공된 자료만도 대단히 많은 분량이다. ‘반일민족주의’에 경도된 연구자들이 많이 있지만 그들은 이것을 분석하지 않은 채 국민에게 그 금액이 대단히 많다는 ‘감(感)’만을 유포해왔다.

셋째, 자료의 성격이다. ‘공탁’ 관계자료는 1개 기업에서 지급해야 할 금액의 총계와 조선인 총수만 나와 있다. 따라서 이 금액이 어떤 비율로 구성되어 있는지 알 수 없다. 당시 임금과 물가는 통제되었다. 하지만 모든 전시경제가 그렇듯이 암시장의 실제 물가와 임금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 임금이 어느 수준인지, 암시장의 물가 수준이 어떠한지, 그에 대해서도 쉽게 알 수 없다. 즉 총액이 가지는 실질적인 가치를 가늠하기가 단순치 않다는 점이다.

나는 조선인 1인당 공탁금이 어느 수준인지 알고 싶었다. 마침 1944년 5월과 8월의 한 탄광의 임금자료를 획득했고, 그 이후 종전에 이르기까지 물가와 임금은 급등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공탁문서 중 오직 한 항목 예컨대 임금, 저금, 퇴직적립금 등 이들 중에서 한 항목만 있는 기업들의 자료를 선발했다. 그것을 조선인 총수로 나누면 조선인 1인당 미불의 임금.저축·적립금 등이 얼마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계산 결과, 조선인이 남기고 간 금액은 대체로 임금 3개월분 이하였다. 여기에서는 이 정도에 그치고 결과는 논문으로 보고하겠다.

설사 미불금 총액이 엄청남 규모였다고 하자. 하지만 그것을 일본인이 조선에 남겨둔 사유재산의 규모와 비교하면 많아야 수만분의 1에 불과할 것이다.

한일협상 초기에 일본정부는 실제로, 어쩌면 당연하게도 이 문제를 제기했고 한국측은 사실상 할 말이 없었다. 일본 정부와 무관한 개인 소유의 재산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선조들이 대단히 많은 금액을 찾아가지 않고 일본에 놓아둔 채 무조건 귀국할 만큼 어리석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불금’의 규모는 당시 임금, 임금체계, 물가 등을 포괄하는 실증 분석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 더 이상 ‘감’으로 연구를 대신하고, ‘국민정서’와 인기에 영합해 국민을 오도해서는 안 된다. 정부도 마찬가지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인한 개인청구권이 소멸 여부와 공소시효 여하에 대해, 나는 법리적인 판단을 할 수 없다. 다만 그에 앞서 확인되어야 할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이우연 낙성대연구소 연구위원
이우연 낙성대연구소 연구위원

‘손해배상금’에 대하여

한국인이 지금 일본 기업에 대해 ‘손해배상’을 요구할 수 있는가?

첫째, 1939년 9월 조선인 노무동원이 시작된 뒤로 1944년 9월에 징용이 실시되기 이전까지는 물론이고, 1945년 4월경까지의 ‘징용’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로 조선인들은 임금 등 제반 급여를 정상적으로 수령했다. 급여 면에서 일본인과의 차별도 없었다.

저금한 것은 2년 등 계약기간 만료 후 정상적으로 인출되었고 조선으로의 송금도 큰 문제없이 이뤄졌다. 다만 종전 직후 조선인들이 서둘러 귀국하면서 정산하지 않은 돈이 일부 남아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세 번째 ‘미불임금’에서 쓰겠다.

둘째, 박정희 정부는 1975년 뒤늦게 피동원자에게 배상금을 지급했다. 이를 위해 일본에 별도의 재원을 요구한 일은 없었다. 징용의 경우 그 이전의 노무동원과 성격이 다른데 개인의 의사에 반해 동원되었기 때문이다.(물론 이때도 조선 청년들에게 일본은 하나의 ‘로망’이었고, 따라서 목숨을 건 밀항과 그 알선업, 일본 도착 이후의 도주는 여전히 성행했다)

박정희 정부의 배상금 지급은 이들 피징용자에게도 이뤄졌다. 일본의 경제협력자금으로 제공한 무상 3억 달러와 차관 2억 달러 속에 이들에 대한 배상금을 포함하고 있다고 박정희 정부는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셋째, 일본으로 동원된 조선인에게는 일본에서 정상적인 급여를 수령했고 1975년 박정희 정부에 의해서 배상금을 지급받았고 노무현 정부 하에서도 넉넉한 지원금을 다시 받았다. 노무현 정부도 이를 위한 자금을 별도로 요구한 바 없다. 이런 이유로 ‘세 번을 받는다’는 말조차 나왔다.

만약 일본 기업이 이후로 ‘손해배상금’을 지급한다면 네 번째가 된다. 정부가 아니라 개인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이 도덕적일까? 개인에게는 배금주의를 탓하는 데 멈춘다고 해도 이제와서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는 일본 기업과 그 요구를 지켜보는 일본 정부는 무엇이 되겠나? 노래도 있다.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

한국과 일본이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이렇게 불화한다면 한일관계의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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