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100주년] 임시정부 비망록 통해 본 해방정국
[임시정부 100주년] 임시정부 비망록 통해 본 해방정국
  • 박명수 미래한국 편집위원·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연구소장
  • 승인 2019.08.23 10: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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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5년 8월 중경의 임시정부는 매우 바빴다. 당시 광복군은 미 전략첩보국(OSS)과 함께 한반도에 침투해 전선의 후방을 교란하려고 했다. 일명 독수리작전이라고 불리는 이 계획을 통해 임시정부는 연합군에 참여하고자 했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8월 5일 중국 서안에서 훈련받고 있는 독수리작전 1기생을 방문했다. 김구는 이곳에서 8월 10일 저녁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연합군에 참전해 승전국의 일원으로 해방을 맞이하려고 했던 김구의 꿈은 망가지고 말았다.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도 8월 10일 일본의 항복에 대한 정보를 들었다. 임시정부는 김구가 없는 사이에도 국무회의를 열고 조속한 시일 내에 귀국해 새로운 국가 건설에 기여할 것을 결의했다. 아울러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은 8월 14일 당시 중경에 있던 주중 미국대사 헐리(Patrick J. Hurley)를 방문해 임시정부는 한반도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증가하는 것을 염려한다고 말하면서 미군과 협력해 전후 한국사회의 재건을 돕겠다고 말했다.

일본 천황은 8월 15일 정식으로 항복선언을 했고 임시정부는 8월 17일 김구와 조소앙의 명의로 미국의 이승만을 통해 미국 대통령 트루먼에게 서신을 보냈다. 이 서신에서 임시정부는 한반도에서 일본의 항복에 따른 전반적인 업무를 수행할 것이며 한국인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위원회에 임시정부 요인을 참가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임시정부는 해방 직후 자신들이 미국과 함께 한반도의 주역이 되고자 한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의미하는 ‘종전 조서’를 발표하고 있는 히로히토 일본 천황. 임시정부는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하면서 미국에 적극 협조한다는 서신을 이승만을 통해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냈다.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의미하는 ‘종전 조서’를 발표하고 있는 히로히토 일본 천황. 임시정부는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하면서 미국에 적극 협조한다는 서신을 이승만을 통해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냈다.

임시정부 내 좌익들의 파괴 공작

8월 17일 임시 의정원이 개회되어 18일부터 본격적인 회의에 들어갔다. 임시 의정원에는 국무회의에서 결의한 내용이 제안되었다. 그것은 27년간 임시정부가 대행하던 정권을 귀국해 국내 인민에게 봉환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좌익들의 생각은 달랐다. 좌익들은 인민이 임시정부에 정권을 부여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임시정부는 불법이며, 따라서 지금 당장 임시정부의 간부들은 모두 사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논란이 일어나자 임시정부 부주석이었던 김규식이 이 문제는 김구 주석이 귀환한 다음에 함께 의론해야 한다고 하면서 휴회를 유도했다.

김구가 서안에서 돌아 온 것은 8월 18일 토요일이었다. 김구는 휴식을 취하고, 8월 21일 국무회의를 소집하고, 귀국 방침을 논의했다. 김구는 이 자리에서 총사직에 반대한다는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 임시의정원 회의는 8월 22일 재개되었다. 이 자리에서 김구는 임정을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했다.

김구는 임시정부는 임의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3·1운동 이후 전국 13도의 대표가 한성에 모여 시작되었는데, 국내에서 활동할 수 없기 때문에 상해에서 시작되었다고 밝혔다.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밝힌 것이다. 아울러 김구는 “하여튼 이 시기에 총사퇴는 불가합니다. 총총하고 일이 많고 보따리 쌀 이 때에 총사직 문자가 나는 것은 불가합니다”고 못 박았다. 부주석 김규식도 김구의 주장에 힘을 보탰다.

임시정부 총사직 문제는 8월 23일 임시의정원에서 표결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표결에 들어가자 좌익정파들은 모두 퇴장해 버리고 말았다. 결국 총사직 문제는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임시정부의 외무부장 조소앙은 8월 30일 다시 주중 미국대사관의 헐리 대사를 만나 임시정부의 입장을 담은 비망록을 남기고 이것을 미 국무장관에 전달해 달라고 요청했다. 헐리 대사는 이것을 곧 바로 미 국무장관 번스에게 타전했다. 이 비망록을 보면 우리는 해방 정국에서 임시정부가 어떤 입장을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첫째, 임시정부 내의 공산주의자들은 임시정부를 전복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1940년대 초 임시정부는 좌익을 포함해 하나의 민족전선을 형성했다. 하지만 소련이 일본에 전쟁을 선포하고, 소련군이 북한에 들어가자 좌익들은 임시정부 파괴공작을 시작했다. 이들은 임시정부가 국내의 한국인을 대표하지 못 한다는 이유로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했다.
 

임시정부 요인들의 지향점은 미국식 민주주의

또한 이 비망록은 이런 임시정부 내의 좌익의 활동은 “한국 내의 사태에 호응할 목적”이었다고 지적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국내의 사태는 서울에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건국준비위원회가 설립된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만일 임시정부가 정부의 형태로 귀국하면 국내의 건국준비위원회는 그 입지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임시정부를 해산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둘째, 공산주의자들은 한국에 공산주의 이념을 따르는 정부를 수립하려고 입국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비망록은 러시아와 중국 연안의 공산주의자들이 한국으로 입국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연안 독립동맹의 대표인 김두봉은 자신의 목표가 한국에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밝혔다고 전한다. 임시정부는 공산주의자들이 먼저 입국해 한반도의 정치 지형을 먼저 선점할 것을 매우 염려했다.

셋째, 임시정부의 요인들은 지난 40년 동안 미국식 입헌주의를 신봉했으나 현재 이들이 자신들의 이상을 구현할 수 있는 기회를 점점 잃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임시정부 요인들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의 도움을 받아 북한에 들어가 공산주의 국가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데 비해 소위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민족주의자들은 고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음으로 민주국가 건설에 큰 지장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박명수 미래한국 편집위원·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연구소장
박명수 미래한국 편집위원·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연구소장

넷째, 임시정부 요인들은 미국이 빨리 임시정부 요인들을 귀국시켜 주기 바란다는 것이다. 이들은 미 점령군과 협력하기를 원하고 있으며 국내에 친미 여론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이들은 공산주의자들에 비해 더 높은 지명도를 갖고 있으며 존경받고 있다. “한국이 민주국가로 발전할 것인가 아니면 공산주의 국가로 발전할 것인가의 문제는 지금 당장 미국이 무엇을 하는가에 달려 있다.”

다섯째, 임시정부는 지금 당장 북한에 미국 선교사들을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북한은 미국의 선교사업의 중심이며, 또한 이 지역에서의 선교활동은 배척될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 임시정부의 많은 인사들은 기독교인들이다.” 임시정부는 이미 북한에 들어가 활동하고 있는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서는 미국 선교사들이 입국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섯째, 미국이 임시정부의 지도자들을 입국시켜 준다면 미국의 의사에 반하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일곱째, 임시정부는 미국이 특정단체에 특혜를 주지 않고, 동등하게 대우하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공산주의자들은 이미 외부 세력을 등에 업고 자신들의 정치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에 주의를 기하기를 요청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해방정국에서 임시정부가 어떤 나라를 만들려고 했는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자신들이 40년 동안 미국식 민주주의를 신봉해 왔으며 해방된 다음에는 한반도에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미국은 임시정부 요인들과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만일 미국이 여기에 협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반도를 공산주의에 넘겨주는 것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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