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홍콩 품을 수 있을까? 중국 공산당, 시장 통제 목적으로 개입한 게 화근
시진핑, 홍콩 품을 수 있을까? 중국 공산당, 시장 통제 목적으로 개입한 게 화근
  • 전경웅 미래한국 객원기자
  • 승인 2019.08.29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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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6일 빅토리아 공원에 운집한 홍콩시민들은 홍콩의 독립을 염원하는집회를 열었다. / 연합
8월 16일 빅토리아 공원에 운집한 홍콩시민들은 홍콩의 독립을 염원하는집회를 열었다. / 연합

지난 5월부터 점점 더 격화되는 홍콩 시위는 중국 공산당이 직면한 현실을 보여준다. 중국 공산당이 홍콩의 ‘경제적 단물’만 빨아먹었다면 유지되었을 상황이 정치·사회적 논리가 개입하면서 무너지게 된 것이다.

홍콩 시위의 표면적 원인은 지난 6월 ‘도주범 조례(註. 홍콩에서 조례는 한국의 법률과 같다)’를 제정하려는 행정 당국의 시도다. 발단은 지난해 2월 홍콩 남성이 대만에서 저지른 살인 사건이다. 피해자는 대만 여성이었다. 가해자는 애인이었던 여성을 살해한 뒤 시신을 유기하고 홍콩으로 도주했다.

대만 정부는 피의자의 송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홍콩과 대만은 범죄인 인도조약을 맺지 않은 상태였다. 홍콩 형법이 속지주의를 채택하고 있어 처벌도 어려웠다. 홍콩 당국은 그러나 살인 용의자를 그대로 둘 수 없었다. 결국 홍콩 측은 피의자를 숨진 피해자의 지갑에 있던 돈을 훔친 문제만 지적, 절도 및 장물거래 혐의로 구속했다. 재판이 이뤄졌지만 피의자에게 내려진 형벌은 징역 29개월 형이었다. 이에 “살인을 용서할 수 있느냐”는 비난이 대만과 홍콩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대만 당국은 피의자에 대한 수배 기간을 37년으로 연장했고, 홍콩 당국은 범죄인 인도조약을 맺지 않은 나라라고 해도 강력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인도할 수 있게 만든다며 ‘도주범 조례’를 제정하려 했다. 이것이 지난 3월 29일의 일이다. 4월 3일 홍콩 입법회(한국 국회에 해당)에서 1차 심의를 거치고, 6월 12일에는 2차 심의를 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 도주범 조례를 두고 다른 데서 문제가 터졌다. 이 ‘도주범 조례’를 홍콩 입법회의 친중 세력들이 적극 지지하며 추진하자 홍콩 시민들 사이에 불안감이 퍼진 것이다. 이후 ‘도주범 조례’가 통과·제정되면 반공 활동을 해 본토에서 도피한 인사나 반중활동을 벌인 사람들이 중국 공산당의 지목만 있으면 본토로 끌려가게 된다는 해석이 나왔다.
 

폭우 속에서도 홍콩시민들은 ‘범죄인 인도 법안’(송환법)에 반대하고 중국의 무력진압 움직임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연합
폭우 속에서도 홍콩시민들은 ‘범죄인 인도 법안’(송환법)에 반대하고 중국의 무력진압 움직임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연합

홍콩 시민들이 기억하는 ‘코즈웨이베이 서점 납치’ 사건

홍콩 시민들 사이에서는 도주범 조례를 중국송환조례라고 부르는 사람이 늘어났다. 특히 중국은 법원의 영장 없이도 강제 구금이 가능하고, 사형이 매년 수천 건 집행되고 있으며, 고문도 빈번히 자행된다는 점 때문에 홍콩 민주화 세력들은 조례 제정을 격렬히 반대했다.

홍콩 시민들도 불안감에 시달렸다. 많은 시민들이 2015년 10월 일어난 ‘코즈웨이베이 서점(일명 퉁러완 서점) 납치’ 사건을 떠올렸다. 코즈웨이베이 서점은 홍콩뿐만 아니라 중국 본토에서도 유명한 곳이었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치부와 공산주의 체제의 모순, 중국에서 일어나는 온갖 인권 유린을 다룬 책들을 전문적으로 파는 서점이었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에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2015년 초 코즈웨이베이 서점에서 ‘시진핑과 여섯 여인들’이라는 책을 출간 준비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이를 가만 둘 수 없었다. 공산당 최고 지도자의 정부(情婦) 등 지저분한 사생활이 만천하에 공개되면 공산당의 권위도 추락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결국 2015년 10월부터 코즈웨이베이 서점의 대주주, 경영자, 지배인, 직원 등 5명이 차례차례 실종됐다.

2015년 12월 코즈웨이베이 서점 관계자들의 실종이 국제적인 문제로 번지자 중국 공산당은 한 명씩 이들을 풀어줬다. 홍콩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실종신고를 취소했다. 그러나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2016년 6월이 되자 서점 관계자들이 하나 둘씩 입을 열었다. 중국 인민해방군 특수부대에게 홍콩에서 납치돼 본토로 끌려간 뒤 고문을 당하고 자백을 강요당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이 알려진 뒤 홍콩 시민들 사이에서는 중국 공산당을 믿을 수 없다는 정서가 급속히 확산됐다. 2014년 9월 시작된 ‘우산혁명’의 주도세력들이 주장했던 말을 믿는 홍콩 시민들도 크게 늘었다. 이런 기억이 남아 있는 가운데 도주범 조례 제정 소식이 전해지자 홍콩 시민들은 언론의 자유가 사라지는 것은 물론 중국 공산당에 ‘지배’를 받으며 보편적인 인권마저 인정받지 못하게 될 것을 우려했다. 결국 도주범 조례의 2차 심의가 있기 전인 지난 6월 9일 103만 명이 참여한 대규모 반중시위가 열렸다. 이후 홍콩 시위는 ‘반중·반공’을 핵심 가치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중국에 홍콩은 ‘세상과 연결되는 문’

한국에서는 1997년 7월 1월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뒤로는 “홍콩은 중국의 일부”라는 정도의 생각만 갖는 사람이 많다. 중국 여행을 다녀온 뒤 상하이, 베이징, 텐진, 광저우 등을 돌아본 뒤 “홍콩이나 중국이나 같다”고 생각하는 한국 사람도 많다. 그러나 실은 홍콩과 중국 본토는 대단히 다르다.

홍콩 반환 당시 장쩌민이 중국 국가주석이었다. 장쩌민 주석과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영국과 ‘홍콩 일국양제’를 약속하면서 어떻게 써먹을지를 고민했다. 그 결과 홍콩을 무역과 금융의 관문으로 이용하기로 했다.

중국 공산당은 본토에서 생산한 제품을 홍콩에 인접한 선전에서 조립, 홍콩을 통해 수출함으로써 ‘메이드 인 홍콩’으로 세계 각국에 수출할 수 있었다. 저가에 저질 상품으로 여겨지던 중국산 제품이 홍콩산으로 둔갑하자 무역량은 급속히 증가했다.

장쩌민에 이어 국가주석이 된 후진타오는 홍콩을 통해 중국 금융망을 확대하고자 했다. 그 계획에 따라 이뤄진 것이 2014년 11월의 후강퉁(홍콩과 중국 상하이 증시 간의 교차 투자 허용), 2016년 12월의 선강퉁(홍콩과 중국판 나스닥인 선전 A증시 간 교차 투자 허용)이다. 실시한 시기는 시진핑 집권 시기지만 그 계획은 오해 전부터 세워놨던 것이다.

홍콩을 통한 중국 본토 주식투자도 늘었지만 중국 공산당 고위층과 국영 기업 경영진들의 홍콩을 통한 해외투자도 대폭 늘었다. 예를 들어 후강퉁을 통한 외국인의 중국 증시 투자금액은 시행 이후 3년 만에 125배나 늘었다. 홍콩을 통한 외국 자본의 중국 본토 투자도 크게 늘었다. 특히 한국과 일본 자금의 유입이 눈에 띄었다.

홍콩이 중국 본토에 도움을 준 건 이뿐만이 아니다. 현재 세계 최대의 온라인 쇼핑몰인 이베이나 아마존에서 팔리는 중국산 제품들은 대부분 상하이나 선전에서 발송된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최근까지는 같은 제품이 홍콩산으로 둔갑해 팔리는 경우가 늘고 있다. 2018년 7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국산 제품에 대해 관세를 대폭 인상한 뒤 중국 본토가 아니라 홍콩산 제품이라는 점을 미국인들에게 어필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처럼 홍콩은 예나 지금이나 중국 공산당에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홍콩 반발 부른 시진핑 세력의 과욕

2012년 11월 집권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집권 1기 때에는 장쩌민·후진타오 계파가 추진해 온 홍콩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는다. 2013년 3월 국가주석에 공식 추대된 뒤에도 ‘일국양제’나 선강퉁과 후강퉁 추진, 홍콩과 중국 본토 간의 사법권 및 행정권 분리 등을 이미 계획된 대로 추진했다.

시진핑은 그러나 장쩌민·후진타오 계파를 계승할 생각이 없었다. 중국 공산당이 당초 ‘일국양제’를 약속한 이유는 세계무역체제와 금융체제에 편입되기 어려웠던 당시 중국 상황으로 볼 때 홍콩의 반발을 억압하며 흡수하려면 50년은 걸릴 것이라고 생각해서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의 좌파 덕분에 2001년 11월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게 되면서 중국은 급속히 발전했다. 그 결과 50년도 더 걸릴 것 같았던 중국 경제 발전은 불과 10년 만에 이뤄냈다.

이미 집권이라는 목표를 달성한 시진핑 주석 입장에서는 더 이상 장쩌민·후진타오가 했던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두 사람 간의 권력투쟁 덕분에 어부지리로 집권한 시진핑 주석은 이들 계파를 혐오스럽게 생각했다. 2013년 9월 시작된 ‘호랑이 사냥’이 그 표현이었다.

당시 시진핑 주석은 공산당 지도부의 부정부패를 척결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은 장쩌민·후진타오 계파의 실력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이를 통해 보시라이를 시작으로 2017년 4월까지 저우융캉, 링지화, 궈보슝, 양충융 등 최고 권력자를 비롯해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29명을 숙청했다. 1921년 중국 공산당이 창당된 이래 2012년까지 숙청된 위원이 모두 4명이라는 점과 비교하면 엄청난 수다.

시진핑 주석은 2018년 3월에는 국가주석의 임기를 두 차례로 제한했던 헌법을 뜯어고치고 종신 집권의 길을 연다. 마오쩌둥 이후 처음이었다. 그 사이에 시진핑 주석은 장쩌민·후진타오를 돕던 조직과 세력들을 숙청하고 권력을 강화했다. 자신의 지지 세력이기도 했던 공산주의청년단 또한 그 세력을 약화시켰다. 시진핑 주석은 홍콩에 대해서도 자신의 본심을 드러냈다. 시진핑 주석이 앞으로 홍콩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는 2017년 7월 1일 행사에서 드러났다.

당시 홍콩 반환 2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시진핑 주석은 홍콩 주둔 인민해방군을 사열했다. 중국 공산당은 이때 홍콩 전역에 테러경계령을 내렸다. 일국양제 준수를 요구하는 홍콩 시위대를 ‘테러분자’로 취급한 것이다. 2014년 9월 우산혁명 당시 중국 공산당이 보여준 태도, 이후 홍콩 행정장관 선거 개입과 민주화 세력들에 대한 탄압을 겪었던 홍콩 시민들은 더 이상 시진핑 주석에게 기대할 것이 없음을 깨달았다.

현재 홍콩 시민들은 시진핑 주석과 중국 공산당이 일국양제를 파기하는 것은 물론 중국 본토에서처럼 자신들을 억압할 것이라는 우려에 시위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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