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크탱크로부터 듣는다.... "기업 정책패러다임의 전환 없이 소재·부품산업 경쟁력 확보 어려워"
싱크탱크로부터 듣는다.... "기업 정책패러다임의 전환 없이 소재·부품산업 경쟁력 확보 어려워"
  • 이태규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
  • 승인 2019.09.04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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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연구원

경제 상황이 심각하다. 우리 경제의 성장동력인 수출은 작년 연말부터 부진의 조짐을 보이더니 올해 들어서는 매월 전년동월대비 마이너스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그 와중에 일본의 경제보복이 시작되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중 갈등은 환율전쟁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내수 중심의 경제구조라면 이 같은 대외환경의 급속한 악화로 인한 영향이 크지 않을 수 있겠으나 수출의존형 개방경제 구조인 우리나라로서는 현 상황이 큰 리스크로 다가온다.

특히 당면한 최대 위협요소인 일본의 경제보복에 대해 정부는 소재·부품 국산화를 수년 내 달성하겠다, 중소기업 R&D 지원하겠다 등 다짐을 쏟아내고 있지만 필자에게는 공허하게 들린다. 소재·부품의 대일 의존성 문제는 필자가 경제 용어를 접하기 시작할 때부터 익히 들어온 한국 경제의 취약점이다. 반세기 만에 극빈의 후진국에서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는 기적적 성취를 이룩한 우리 경제도 수십 년 묵은 이 문제만은 아직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빛의 혁명을 이끈 나카무라 슈지. 그는 니치아화학공업에 재직 중 1993년 고휘도 청색 LED 개발에 성공한 공로로 2014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그가 발명한 청색 LED로 오늘날 LED 디스플레이가 보편화 될 수 있었다.
빛의 혁명을 이끈 나카무라 슈지. 그는 니치아화학공업에 재직 중 1993년 고휘도 청색 LED 개발에 성공한 공로로 2014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그가 발명한 청색 LED로 오늘날 LED 디스플레이가 보편화 될 수 있었다.

세계시장에서 일본의 소재·부품산업 경쟁력은 우리나라를 압도한다. 2018년 기준으로 소재·부품 관련 상품群에서 일본과 한국의 수출금액을 몇 가지 비교해 보면 반도체 부품 관련 수출규모는 일본이 한국의 약 2.9배, 기계부품은 3.5배, 전자공업용 화학물질은 3배, 정밀공작기계는 7.7배나 더 크다. 이 같은 차이는 단순히 정부의 정책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일본에는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기업이 즐비하다. 한 연구에 따르면 이들 일본 장수기업의 평균 존속기간은 197.8년이라고 한다.

일본의 과학기술 분야 노벨상 수상자만 해도 20여 명을 훌쩍 넘는다. 우리나라의 최고령 기업의 존속연수는 120여 년이고 과학기술 분야 노벨상 수상자는 아직 없다. 이 차이가 지금의 한일 간의 격차를 만든 것이다. 단기간의 정책 드라이브로 해소될 수 있는 격차가 아닌 것이다. 잠시 시계를 돌려 2013년 11월 어느 신문의 기사를 보자. “소재·부품산업, 일본 제치고 2020년 세계4강 목표”라는 제목 아래 “정부가 2020년까지 소재부품 분야에서 ‘타도 일본’을 선언했다. 소재산업이 튼튼해야...” 라는 내용으로 기사는 채워져 있다.

이렇게 이런 저런 노력을 했지만 2020년이 바로 코앞인 상황에서 기사가 전하는 정부의 다짐과는 달리 우리는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제외라는 충격 앞에 불안해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소재·부품산업의 대일 의존성 해소는 장기적 목표가 될 수밖에 없고 현재의 일본과의 갈등은 외교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바른 방향이다.

소재·부품산업의 경쟁력은 결국 중소기업의 경쟁력과 연결될 수 밖에 없다. 지난 수십 년간 중소기업 경쟁력 제고를 외쳤지만 크게 가시적인 성과를 못 낸 것과 소재·부품산업의 취약성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따라서 소재·부품산업에서의 과도한 일본 의존에서 탈피하려면 지금까지의 중소기업 정책 패러다임에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작업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쏟아내는 각종 정부정책은 대증요법으로 점철되다가 위기요인이 사라지면 다시 흐지부지되곤 했던 과거의 실패 사례를 답습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중소기업 정책의 패러다임 변화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까. 우리나라 중소기업 정책의 중요한 목표 중의 하나는 ‘중소기업 보호’이다. 이 ‘보호’라는 단어가 강조되는 순간 중소기업 정책은 ‘기업복지’ 정책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크며 ‘정책자금 나눠먹기’가 빈번해진다. 경쟁력은 ‘보호’ 보다는 ‘경쟁’이 강조될 때 생기는 법이다. 지금까지의 중소기업 정책은 과연 ‘보호’와 ‘경쟁’ 중 어느 쪽에 초점을 맞춰져 왔을까. 작금의 상황을 보면 최소한 ‘경쟁’ 중심의 중소기업 정책을 펴왔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기업성장은 경제성장의 원천이다

기업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핵심 플레이어(player)이다. 흔히들 현대 자본주의의 핵심요소로 시장경제를 들곤 하지만 자본주의를 한 단어로 정의한다면 ‘시장경제’가 아니라 ‘기업경제’라고 정의되어야 마땅하다. 근대적 자본주의 이전에도, 멀리는 수천 년 전부터 상품의 자발적 거래가 이뤄지는 ‘시장’은 항상 존재해왔다. 하지만 200여 년 전 유한책임회사(limited liability corporation)가 서구사회에서 제도적으로 안착한 후에야 자본주의의 발전이 본격화된 점을 생각하면 기업 없이는 현대 자본주의를 정의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농토가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원천이었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기업이 그 역할을 담당한다. 따라서 기업이 성장한다는 것은 부가가치 생산능력이 향상된다는 것이다. 경제성장의 측정단위인 국내총생산(GDP)은 한 경제가 생산하는 부가가치의 총합이므로 기업의 성장은 부가가치의 증가를 통해 경제성장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기업의 성장 정도를 살펴보면 GDP 집계 없이도 경제성장의 정도를 알 수 있다. 지난 50년 간 우리나라 전체 기업의 자산증가율과 그 추세를 보면 근래의 추세는 저성장이 고착화된 우리나라의 경제 상황과 부합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기업이라는 조직을 통하지 않고 개인의 경제활동을 통해 부가가치가 창출되기도 하지만 기업이 만들어내는 부가가치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하다. 또한 기업은 개인이 할 수 없는 일을 해 낸다. 한 개인은 반도체를 만들 수 없지만 기업은 만들 수 있다. 그것도 대량으로 말이다.

자영업자로만 이뤄진 반도체 산업을 상상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기업은 인적 및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결합해 개인이 결코 성취할 수 없는 경제적 성과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한 산업이 발전한다는 것은 해당 산업의 기업이 성장한다는 것이다. 어떤 산업이든지 고도로 발달된 산업에는 대기업이 존재한다. 중소기업으로만 이뤄진 발달된 산업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서비스산업의 경쟁력이 제조업에 비해 매우 낮은 이유도 서비스업에서 자영업자의 비중이 지나치게 높기 때문이다.

일본 소재산업 기술력에는 노벨상 수상자들의 연구가 녹아들어 있다.
일본 소재산업 기술력에는 노벨상 수상자들의 연구가 녹아들어 있다.

요즘 새로운 한류 전성기를 이끌고 있는 K-POP의 사례에서도 기업의 중요성이 확인된다. 국내 가요가 K-POP으로 인식되면서 해외의 주목을 이끌기 시작한 것은 국내 음악시장이 엔터테인먼트 기업(소위 기획사)을 중심으로 재편되면서부터이다. 이들 기업이 내부자원(in-house)과 외부자원(outsourcing)의 효율적 결합을 통해 아티스트의 발굴, 육성, 콘텐츠제작, 마케팅 등의 상품 제작의 全 과정을 담당함으로써 국제경쟁력을 갖춘 음악산업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과거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신인 등용문 역할을 하던 대학가요제 형식은 이제 찾아 볼 수도 없게 되었다. 세계 대중 음악시장의 경우 기본적으로 미국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며 그 가운데 개별국가의 음악시장은 주로 미국 음악과 자국 언어의 음악으로만 이뤄져 있었다. 이 견고한 시장을 한국어가 주(主)인 K-POP이 뚫은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 엔터테인먼트 기업이 세계 시장에 어필할 수 있는, 과거와는 질적으로 다른 음악 콘텐츠를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경제성장은 산업의 성장이 있어야 가능하고 이는 기업의 성장을 통해 이뤄진다. 즉 기업의 성장이 경제성장의 원천인 셈이다. 우리나라 주력 제조업이 국제경쟁력이 있는 이유는 관련 산업에 국제경쟁력을 갖춘 대기업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농업이 산업으로서 국제경쟁력이 낮은 이유는 대규모 기업농이 존재하지 않아서이고 기업농의 탄생과 성장을 가로막는 명시적·암묵적 규제 때문이다.

어떤 산업이 고도화된다는 것은 해당 산업에서 선도적인 대기업이 등장하면서 산업의 성장을 이끌어 간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대기업 중심의 경제구조’가 문제이므로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구조’를 지향해야 한다는 일부의 주장은 성장의 역사를 거슬러 퇴보하자는 말과 같다. 따라서 진정으로 ‘생산적이며 진보적인’ 기업정책의 방향은 기업이 성장해 규모가 커질수록 더 많은 규제의 부담을 지우는 현재의 규제체제와는 정반대이어야 한다.
 

성장하는 기업에 더 많은 기회를 주는 것이 ‘진보’

필자가 참고한 몇몇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중소기업 R&D 지원사업의 개발성공률은 95%인 데 비해 사업화율은 20~40% 중반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중소기업의 R&D 성공이 사업화와 연결되지 못하는 프로젝트에 많은 중소기업 R&D 지원금이 낭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소기업에 대한 R&D 지원 과정이 보다 ‘경쟁적’이어서 실제 사업화의 성과를 내는 기업에 지원이 집중되는 과정이 상당기간 지속되었더라면 중소기업의 기술경쟁력은 지금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을 것이다.

성공하지 못한 과거의 패러다임을 유지한 채로 소재·부품산업 육성에 자금을 쏟아 붓는다 한들 수년 뒤 기대한 성과를 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랜 기간 누적된 기술격차를 따라 잡으려면 단순히 투자확대로만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며 투자의 효율성을 높이는 패러다임 전환이 있어야 그나마 그 격차를 좁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인식의 전환 없이 소재·부품산업의 취약성을 대기업의 책임으로만 돌리려 한다면 소재·부품의 높은 대일 의존도는 한국경제의 상수(常數)로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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