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시장경제의 철학적 기초는 민족이 아니라 자유
[논단] 시장경제의 철학적 기초는 민족이 아니라 자유
  •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경제학
  • 승인 2019.09.05 10: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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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나라마다 그 유형을 달리하지만, 어느 유형이든 공유하는 철학이 있다. 그러한 정신적 기초가 없으면 시장경제의 토대라 할 수 있는 사회통합이 성립하기 힘들다. 그런 곳에서 시장경제가 순조롭게 발전할 수는 없다.

모든 유형의 시장경제가 공유하는 철학은 다음과 같다. 곧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로운 존재이며, 그가 보유한 사권(私權)의 기초는 재산권이며, 그가 자기의 책임으로 자유롭게 행동할 때 시장은 다른 어느 경제체제보다 우월한 균형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연적 질서에 대한 믿음을 가리켜 자유주의라고 한다. 자유주의는 서구에서 절대왕정(絶對王政)에 맞서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추구하는 정치철학으로 먼저 성립했다.

뒤이어 아담 스미스와 같은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그것을 시장경제의 합리성을 뒷받침하는 도덕철학으로 발전시켰다. 서구에서 시장경제가 발전해 온 역사는 수많은 시련과 도전에 맞서 자유주의 철학이 성숙해 오는 과정이기도 했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반일, 반미, 통일운동의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었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반일, 반미, 통일운동의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었다.

그런데 자유주의 철학이 우리 한국에서도 성공할 수 있을까. 필자는 그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다. 솔직히 말해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크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대략 세 가지이다. 첫째 자유주의에 대해 적대적이라 할 수 있는 민족주의가 너무 강세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인들의 정신세계에서 가장 넓은 공통분모를 지적하라면 민족주의이다. 민족은 우리는 단군의 자손으로서 하나의 운명공동체라는 역사의식을 말한다. 이미 학계에서는 상식이 된 이야기이지만 19세기까지 이 같은 역사의식은 없었다.

조선왕조의 지배자들이 공유한 세계관은 중화가 세계의 중심을 이루는 가운데 조선은 일등 제후국으로서 소중화(小中華)라는 것이었다. 한국인들이 민족을 알게 되는 것은 20세기에 들어와 일본에서 그 말이 들어오면서부터이다. 이후 일제의 억압과 차별을 받으면서 한국인들은 민족이라는 운명공동체 의식을 공동의 정신세계로 육성했다.

건국 이후의 역대 정부는 민족주의를 국민교육의 최대 이념으로 받들어 왔다. 갖가지 민족 상징이 고안되고 널리 보급되었다. 정치가 국민을 동원하는 주요 수단도 민족주의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일민주의(一民主義)도, 박정희 대통령의 조국근대화도 그 밑바닥에는 민족주의가 있었다. 1980년대 이후 민족주의의 정치적 기능이 변했다. 그 때까지 민족주의는 국민국가의 건설을 위한 동원의 이데올로기였다. 이후 민족주의는 반일, 반미, 통일운동의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었다.
 

변질된 민족주의와 그 부산물

어쨌든 이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민족주의는 오늘날 한국정치에서 좌우가 공유하는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고 있다. 그 민족주의가 낳은 부산물의 상징이 일본과의 역사 논쟁이다. 예컨대 독도와 위안부 문제에 관한 자료를 허심탄회하게 읽으면 이 문제를 가지고 양국이 그렇게 심각하게 얼굴을 붉힐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어느 지식인도, 어느 정치가도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그랬다가는 좌우의 민족주의 언론으로부터 집중 포화를 맞아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민족주의는 자유로운 지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자유주의가 번성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 요건은 어떠한 강포한 권력이나 마성(魔性)의 권위로부터도 자유로운 지성이 아닐까. 이 점이 한국에서 자유주의의 미래를 낙관하지 못하는 한 가지 이유이다.

둘째 한국의 사회와 문화가 지나치게 물질주의적이라는 점이다. 대중의 민족주의 정서에 거슬리는 지적이지만 이 점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2005년 갤럽이 130개국 13만여 명을 대상으로 한 행복 조사에 의하면 한국인은 물질적 가치의 중요성을 묻는 질문(9점 척도)에서 7.24로 미국 5.45나 일본 6.01은 물론 짐바브웨 5.77보다 높게 나왔다. 동년 미국 미시건대의 잉글하트 교수가 행한 주요국의 가치관 조사도 마찬가지 결과를 전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한국인이 부(富)를 중시하는 물질주의적 성향은 대만과 더불어 OECD국가의 평균보다 훨씬 높을 뿐 아니라 멕시코보다 더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소녀상과 반일운동. 극단적 민족주의는 자유로운 지성과 국제협력도 허용하지 않는다.
소녀상과 반일운동. 극단적 민족주의는 자유로운 지성과 국제협력도 허용하지 않는다.

무슨 이유로 한국인이 세계에서 가장 물질주의적인가는 쉽게 대답하기 힘든 문제이다. 한국의 역사학자나 철학자들은 그들의 전통문화가 정신적으로 매우 수월하다는 민족주의 정서에 젖어 있기 때문에 이 같은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본 적이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대답은 일제와 군사독재의 지배가 그런 천박한 문화를 낳았다는 것일 터이다. 필자가 보기에 한국사회의 그러한 비교적 특질은 15세기 이래 오랫동안 인간들의 정신을 하나로 묶는 종교의 역할이 부재한 가운데 사회조직에 있어서 크고 작은 공(公)의 세계를 개발하지 못한 탓으로 보인다. 어쨌든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겠다.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점은 두드러지게 물질주의적인 사회에서는 자유주의가 뿌리를 내리기 힘들지 않을까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의 원리에 따라 시장경제가 발전하면 필연코 빈부의 격차가 발생하는데, 이것을 정당화하거나 중화시킬 정신문화가 빈약하기 때문이다.

물질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그들이 가난한 이유를 그들보다 부유한 사람의 탓으로 돌리기 쉬운데, 그것은 성공한 사람들의 부는 그들의 창의성이나 근면성의 결과라고 설명하는 교육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도 그들의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경우가 드문데, 그것은 사회가 인간들이 공유하는 정신이나 공의 질서로 감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물질주의 사회의 경제발전은 어느 수준에 이르러 그 사회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갈등을 증폭시키기 마련인데, 이 점이 한국 자유주의의 미래가 밝지 않은 또 하나의 이유이다.
 

자유 지성의 힘 회복해야

마지막으로 셋째는 자유주의 철학을 위한 지성의 리더십이 여전히 취약하다는 이유이다. 자유주의는 한국의 전통사상이 아니다. 자유주의는 서구 근대에서 생겨난 정치철학과 도덕철학으로서 19세기말이 되어서야 한반도에 도착했다. 유감스럽게도 자유주의에 기초한 시장경제와 근대사회의 성립은 일제의 지배체제에 의해서였다. 이 같은 지적에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은 거부감을 느낄 터이지만 아무래도 외면하기 힘든 역사의 진실이다. 그에 대한 민족주의적 반발은 한국에서 자유주의와 시장경제의 정신적 헤게모니가 여전히 취약하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결국 한 국가와 사회를 발전의 길로 이끄는 것은 지성의 힘이다. 한국의 자유주의가 봉착하고 있는 어려움은 철저히 역사적이다. 민족주의가 강세를 이루고, 물질주의의 연원이 깊고, 자유주의의 역사가 일천한 것은 단기간에 쉽게 극복하기 힘든 문제들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지성은 역사의 제약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그래서 때때로 역사를 비약과도 같은 발전으로 이끄는 리더십이 생겨나는 법이다. 예컨대 이 나라의 사회와 경제를 이 정도라도 이끈 것은 자유를 근본적 가치로 받드는 나라를 건설하자고 했던 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리더십 덕분이 크다. 그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동시대의 평균 수준을 초월한 지성의 힘이었다.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경제학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경제학

자유주의 철학이 한국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갈등이 증폭하는 속도 이상으로 경제가 재빨리 성장해 갈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모종의 한계에 봉착했다는 느낌이다. 민족주의와 물질주의가 빚어낸 거미줄과 같은 유무형의 규제에 걸려 시장은 활력을 잃어 가고 있다. 우리보다 5-10배 큰 일본과 중국 경제의 틈에 끼여 살아남고 또 선진화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파격의 개혁이 필수적이다. 사회를 교역항(交易港) 수준으로 개방하고 그에 걸 맞는 사고와 행동 규범을 국민적 교양으로 훈련하는 등 한 마디로 말해 자유주의적 국가개조(國家改造)가 당면한 역사적 과제이다.

그런데 누가 그것을 감당할 것인가. 그런 정치적 리더십은 어디서 생겨나는 것인가. 그런 갈구에서 우리의 지성사회를 돌아보면 역시 초라하기 그지없다. 대학의 인문·사회과학은 아직도 선진학문의 수입시장이거나 전통에 대한 민족주의적 반추(反芻)에 머물러 있다. 굳건하게 이 땅의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있지 않은 것이다. 자유주의를 강의하기 위해서는 꼴통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쓸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속으로는 자유주의자이면서 입까지 자유주의자인 교수는 대학에서 희귀한 존재이다. 지적 풍토가 이러해서는 이 사회를 얽어매고 있는 역사의 굴레를 벗기면서 또 하나의 비약을 이끌 리더십이 생겨나기 힘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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