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100주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신규식의 국제정세 인식
[임시정부 100주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신규식의 국제정세 인식
  • 박명수 미래한국 편집위원·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연구소장
  • 승인 2019.09.05 10: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현재 한국 사학계에서 임시정부의 배경을 설명하는 데 있어 대종교인이며 민족운동가인 신규식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신규식은 한일병합 이후 일찍이 중국 상해로 가서 손문의 신해혁명의 영향을 받아 공화주의자가 되었다. 철저한 대종교 신자였던 신규식은 이곳에서 동제사를 만들어 대종교활동과 독립운동을 했다.

그는 1915년 이상설과 함께 신한혁명당을 만들어 고종의 복위를 꿈꾸기도 했고, 1917년에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해 황제의 주권 양위설을 중심으로 사회주의적인 국가 건설을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교포들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신규식은 1917년 이후 상해를 떠났다. 신규식이 떠난 자리에 새롭게 등장해 교포사회의 중심으로 등장한 사람이 여운형이었다. 원래 장로교 전도사였던 여운형은 상해 YMCA와 협력해 한인교회를 섬기면서 1918년 여름부터 기독청년들과 함께 독서클럽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했다. 이 단체는 1918년 11월 28일 상해에 온 윌슨 미국 대통령의 개인 특사 크레인을 통해 독립청원서를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한편, 김규식과 접촉해 그를 파리특사로 파송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모임을 신한청년당이라고 불렀다.

철저한 대종교 신자였던 신규식은 상해에서 동제사를 만들어서 대종교활동과 독립운동을 하였다.(왼쪽부터 신성모, 신규식, 신건식)
철저한 대종교 신자였던 신규식은 상해에서 동제사를 만들어서 대종교활동과 독립운동을 하였다.(왼쪽부터 신성모, 신규식, 신건식)

신규식은 당시 국제정세의 변화를 잘 알고 있었다. 1918년 11월 독일은 항복했고,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외치며 세계 질서를 재편하려 했고, 상해의 청년들은 미국과 연락하며 파리에 특사를 파견했고, 이것을 후원하기 위해 국내에 사람을 보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신규식은 1919년 1월 25일 윌슨에게 독립청원서를 작성해 김규식 편에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했다.

이 청원서는 한국독립공화당(Corea Independent Republic Party)이라는 이름으로 보내졌는데 총재는 신성, 사무총장은 김성이다. 신성은 신규식의 중국 이름이지만 김성(金成)이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학자들은 김성을 김규식(金奎植)이라고 보는데, 이 김규식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은 두 사람이다. 하나는 파리에 대표로 간 기독교인 우사(又史) 김규식이 있고, 만주의 독립운동가이며 대종교인인 노운(老雲) 김규식이 있다(신운용, “‘대한독립선언서’의 발표시기와 서명자에 대한 분석,” [국학연구] 22집 (2018), 51-53). 당시 파리 대표 김규식은 자신의 본명을 쓰고 있었으며 그의 중국식 이름은 김자문이었다.

신규식의 이 청원서는 미국 대통령을 수신으로 하고 있으며 당시 파리에서 열리고 있는 베르사유 평화회의에 대한 기대로 시작하고 있다(정병준, “1919년, 파리로 가는 김규식,” [한국독립운동사연구] 60집, 106-107). 이것은 신규식의 인식의 전환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1917년 국제사회주의의 모임임 제2인터내셔날에 참여하려고 했다. 하지만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미국의 승리로 끝나는 것을 보고, 과거 사회주의적인 입장을 버리고 새로운 국제질서에 편승하려고 한 것이다. 신규식은 이런 국제정세의 변화를 다시없는 기회로 인식하고 있었다.
 

신규식은 윌슨 대통령에게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김규식 편에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기도 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신규식은 윌슨 대통령에게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김규식 편에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기도 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사회주의자 신규식의 독립 인식

이어 이 청원서는 한국은 오랫동안 자주독립국가였으며,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여러 나라와 외교를 맺고 있었고, 대외적으로 주권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힌다. 그러나 대한제국정부의 무능으로 일본에 주권을 빼앗겼다. 그 뒤 일본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한국을 일본화했고 한국민들은 여기에 절대로 찬동하지 않았다. 국제사회는 일본이 강요한 조약을 인준했기 때문에 여기에 간섭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파리평화회의는 “크고 작은 나라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모든 분쟁의 원인을 찾으려 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모든 민족이 자신의 법률과 관습을 따라 살 수 있도록 허용하기 때문에 한국 민족은 미국 대통령에게 자신의 운명을 고려해 주기를 바란다고 밝히고 있다. 아울러 이 청원서는 윌슨이 주장하는 크고 작은 나라가 다 같이 동등한 권리를 가졌다는 ‘국가의 권리’(Right of Nations)를 언급하고 있다. 신규식이 주도한 이 청원서는 명백하게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질서를 수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신규식의 청원서 내용은 그가 주도해 만들었던 1917년 대동단결선언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양 문서가 한민족의 주권은 한민족의 것이라는 근본적인 토대 위에 작성되었다. 하지만 대동단결선언에 나오고 있는 융희황제의 주권 영도설은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대한제국의 패망은 정부의 무능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대동단결선언에 나오고 있는 러시아 혁명에 대한 찬사와 사회주의에 대한 기대는 사라지고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대동단결선언은 슬라브의 혁명과 연합국의 분열은 전 세계의 축복이라고 주장하며, 만국사회당은 인류의 화복을 결정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1919년 신규식의 청원서에는 이 같은 내용은 사라지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의존하고 있다.

신규식은 1월 25일 김규식 편에 이 청원서를 파리에 보내고, 얼마 되지 않은 2월 9일에 국민대회 소집을 요구하는 편지를 하와이 국민보사에 보냈다(정병준, 앞의 논문, 111). 이 편지는 현재 윌슨이 주도하는 파리평화회의는 “모든 한국인이 바라왔던 최고의 순간”이라고 설명하면서, 이 때 파리에 우리 대표단을 파송해 독립을 주장하는 한편, 국내, 국외의 한인 단체 대표의 이름으로 대표단을 구성해야 하며, 이것을 위해 3월 중에 한인국민대회를 소집하자고 주장한 것이다(방선주, “3·1운동과 재미한인,” <한민족 독립운동사: 3·1운동> 3, 487.)

신규식이 언급하는 단체들은 국내의 청년협회(YMCA), 기독교교회, 신도협회(?)와 미국의 하와이, 북미, 남미 국민회, 러시아의 한족연합회, 중국의 북간도, 남간도, 북경, 상해 한인회 등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서 국내에서는 기독교단체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미주에서는 하와이를 우선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네 지역을 다 언급하고 있는 반면에, 러시아에서는 친 파리평화회의적인 한족중앙회만 포함시키고 있다.

박명수 미래한국 편집위원·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연구소장
박명수 미래한국 편집위원·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연구소장

이것은 신규식이 연합국의 입장에서 한인국민대회를 계획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규식은 이 모임에서 최초의 정부 형태가 탄생할 것이며, 이것을 통해 파리평화회의의 문제도 처리할 것을 요청했다.

이 제안서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신규식이 자신의 종교인 대종교를 더 이상 강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과거 러시아 혁명에 희망을 걸었던 그가 이제는 여기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을 꿈꿨던 이동휘의 그룹에 대해서도 아무런 언급이 없다. 오히려 그는 YMCA와 기독교단체를 언급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에 접근하고자 했다. 신규식은 이 같은 제안을 이승만이 중심이 되는 하와이국민회에 보냈다. 이후 신규식은 임시정부 활동에 있어 이승만 계로 분류되며, 공산주의와 대항해 기독교와 공동으로 민족주의 전선을 형성했다.

신규식은 한편으로는 윌슨과 해외동포들에게 호소문을 보내는 동시에 자신이 속해 있던 대종교인들에게도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1919년 봄에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이다. 이 내용은 근본적으로 윌슨에게 보낸 편지와 동일하다. 다만 국내의 대종교인들을 상대로 보낸 선언서이므로 대종교적인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 선언서 역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로 인해 국제사회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