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100주년] 대한독립선언서(세칭 무오)와 3·1운동
[임시정부 100주년] 대한독립선언서(세칭 무오)와 3·1운동
  • 박명수 미래한국 편집위원·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 승인 2019.10.14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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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은 많은 독립선언서를 만들어 냈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1919년 3월 1일 선포된 기미독립선언서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학계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는 것이 소위 무오독립선언서라고 불린 대한독립선언서이다.

이 선언서가 학계의 관심을 끈 것은 기미년(1919년) 이전에 이미 1918년 무오년에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 선언서가 3·1운동과 임시정부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 때문이다.

1918년 무오 독립선언서
1918년 무오 독립선언서

대한독립선언서에 대한 오해

먼저 대한독립선언서의 무오년 선포설을 살펴본다. 대한독립선언서는 그 발표문에 단기 4252년 2월 일이라고 되어 있다. 구체적인 날짜는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런데 4252년은 1919년이며, 무오년, 즉 1918년의 음력 마지막 날은 1919년 1월 31일이므로 실제적으로 무오년과는 관계가 없다. 따라서 최근에는 무오독립선언서라는 명칭은 사라지고, 대한독립선언서라고 부르고 있다(송우혜, “‘대한독립선언서’(세칭 ‘무오독립선언서)’”의 실체, <역사비평> (1988)).

그러면 대한독립선언서는 1919년 언제 선포되었는가? 단기 4252년 2월 1일은 양력으로 3월 2일이며, 따라서 대한독립선언서는 3·1운동 이후 발표된 것이다. 이것은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고 알려진 조소앙의 글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당시 만주 길림에 있던 조소앙은 1919년 정월(음력)에 여준, 김좌진 등과 함께 대한독립의군부를 창립했고, 곧 이어 대한독립선언서를 기초했으며, 아울러 국내 대표가 보내온 독립선언서의 초고를 찾아보고 서로 호응할 것을 약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조소앙, “자전”, <소앙선생문집>, 하, 157).

조소앙의 자전보다 더 구체적으로 대한독립선언서의 발표 경위를 설명한 사람은 대종교인이며, 신규식의 제자였던 정원택의 ‘지산외유일기’이다. 여기에 의하면 1919년 1월 28일(양력 2월 28일)에 의군부를 조직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확정했으며, 2월 1일(양력 3월 2일) 조소앙이 선언서를 기초했고, 2월 10일(양력 3월 11일)에 석판으로 독립선언서를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이것을 보면 대한독립선언서는 3·1운동 이후에 배포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왜 이런 오해가 생겨났는가? 송우혜의 연구에 의하면 1948년 7월 <삼천리> 잡지에 실린 조소앙의 회고문 때문이다. 이 글은 조소앙의 구술을 기자가 정리한 것인데 여기에 의하면 대한독립선언서는 3·1운동 전 무오년에 작성되었다고 되어 있다. 그 이후 1949년 채근식이 그의 <무장독립운동비사>에서 이것을 무오독립선언서라고 기술했다. 그 다음부터 이것은 무오독립선언서로 불리게 되었으며(송우혜, 앞의 논문, 163-164), 3·1운동 이전의 독립선언서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지금도 대종교의 일부 학자들은 이런 입장을 갖고 있다.

대한독립선언서와 민족자결주의

다음으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대한독립선언서가 어떤 배경에서 만들어졌는가 하는 점이다. 일부 한국사 학자들은 3·1운동과 임시정부의 배경을 대종교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1917년의 대동단결선언과 1918년(?)의 무오독립선언으로 주장한다. 이것은 3·1운동에서 국제적인 영향력을 축소하고, 민족적인 정통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대종교인 정원택은 1918년 12월 20일(양력 1919년 1월 21일)에 상해의 신규식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그 내용은 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미국의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고, 파리강화회의가 열리고 있으며, 여기에 호응해 상해와 미주의 교포들이 서로 연락해 각지에 대표를 파송해 독립운동을 일으키려 하는데, 길림에서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길림의 대한독립선언서는 바로 이런 상해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운동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정원택, ‘지산외유일기’, <항일운동가의 일기>, 290).

원래 조소앙은 1차 세계대전의 종식을 보고, 길림에 가서 이것을 전하며 독립운동을 일으키려 했으나 이 지역의 당파성으로 인해 성공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상해로부터 온 신규식의 편지가 계기가 되어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고 대한독립선언서를 만들게 되었다.

대한독립선언서는 당시 국제 정세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다. “보라! 인민의 마적이었던 전제와 강권은 잔재가 이미 다하였고, 인류에 부여된 평등과 평화는 명명백백하여 공의의 심판과 자유의 보편성은… 천의의 실현함이요, 약국(弱國)잔족(殘族)을 구제하는 대지의 복음이라” 이것은 분명 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대한독립선언서 역시 이런 국제적인 정세를 반영하고 있다.

대한독립선언서는 전통적인 민족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먼저 대한독립선언서는 1917년에 만들어진 대동단결선언과 같이 대한의 주권은 한민족의 고유한 것이라는 주권불멸론을 내세우고 있다. “반만년사의 내치외교는 한왕한제(韓王韓帝)의 고유권한이요, 백만방리의 고산려수(高山麗水)는 한남한녀(韓男韓女)의 공유재산”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일본의 주권침탈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기미독립선언서나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이런 민족주의에 근거한 주권불멸론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3·1운동은 개인의 권리에 기초를 둔 서구민주주의에 근거해서 민주시민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기미독립선언서는 우리가 자주민임을 주장하고, 개개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민족의 독립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임시헌장 선서문에는 독립은 전국민의 의사이며, “전국민의 위임에 의하여” 정부가 수립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민족의 고유성 보다는 개인의 권리가 우선적이다.

기미독립선언서와 대한독립선언서

또한 대한독립선언서는 대종교적인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대한독립선언서는 길림의 대종교인들이 주동해서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선언서의 첫 번째 발기자는 나철에 이어 대종교의 2대교주인 김교헌이었다. 이 선언서에는 황황일신(皇皇一神), 단군대황조와 같은 대종교의 용어가 나오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런 대종교적인 요소 때문에 이 선언서가 널리 수용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기미독립선언서는 거의 종교적인 표현이 나오고 있지 않는다. 기미독립선언서는 단지 시대의 변화가 “천(天)의 명명(明命)”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임시헌장에 보면 3·1운동은 신인일치(神人一致)로 일어난 운동이며, 대한민국은 신(神)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세워진 나라이며, 이것은 앞으로 이루어질 신(神)의 국(國)의 기초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대한독립선언서의 대종교적인 표현이 좀 더 보편적인, 혹은 기독교적인 표현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임시헌장을 만든 임시의정원에서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고 있었던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었다.

대한독립선언서는 독립의 방법으로 무력투쟁을 들고 있다. 대한독립선언서는 대한독립의군부가 만들었고, 이것은 무장투쟁의 단체였다. “정의는 무적의 칼이니 이로써 하늘을 거스리는 악마와 나라를 도적질하는 적을 무찌르라…궐기하라 독립군! 제(齊)하라 독립군!…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할 지어다.”

여기에 비해 기미독립선언서와 임시정부는 기본적으로 외교를 통해 독립을 이루려고 했다. 기미독립선언서는 이미 위력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선언하며, 비폭력적인 평화운동을 지향했다. 임시헌장도 대한민국이 국제연맹에 가입해 우리의 독립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려 민족의 독립을 성취하려고 했다. 이것을 위해 대표를 파리에 파송한 것이다.

만주의 길림을 중심으로 발표한 대종교인들의 독립선언서이다. 이 독립선언서는 한민족의 정통성을 강조해 “대한”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무장투쟁으로서 독립을 성취해야 한다고 주장해 기존의 독립선언서와는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3·1운동의 주류인 기미독립선언서나 대한민국 임시헌장과는 상당히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 따라서 3·1운동에서 대한독립선언서를 지나치게 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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