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비평] 신의주 학생의거 74주년.... 세계 최초의 반공 항쟁을 기리며
[역사비평] 신의주 학생의거 74주년.... 세계 최초의 반공 항쟁을 기리며
  • 조형곤 역사정립연구소 대표
  • 승인 2019.11.05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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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서 있다. 문재인 정권의 임기 절반도 되지 않아 외교와 안보는 자폐와 자폭의 수준으로 전락했고 경제는 자살하고 있으며 고용은 학살 수준이라는 말들이 무성하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좌파들의 역사관이 매우 자학적이라는 데 있다.

최근 우리는 서초동에서 벌어진 조국수호 촛불집회와 광화문광장의 조국퇴진촉구 10월 항쟁을 목도했다. 그런데 이는 다름 아닌 역사 해석을 둘러싼 갈등의 폭발 그것이다. 국민은 당연히 광화문광장의 10월 항쟁에 손을 들어줬고 조국은 물러났다. 그러나 조국을 둘러싼 갈등은 여전하다. 그 이유는 조국 지지자들의 근현대사 역사 인식에 아주 큰 구멍이 뚫려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제시대 일본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만 강조할 뿐 공산제국주의와의 더 깊은 내전에는 관심이 없고 오히려 이를 숨기려든다.
 

신의주 학생의거의 주요인물(左)과 이를 보도한 1945년 12월 8일자 동아일보 기사(右). 학생의거에서 피살당한 신의주제일공업학교 4학년 박태근 학생의 모친이 아들의 유골을 안고 서울로 왔다는 내용이다.
신의주 학생의거의 주요인물(左)과 이를 보도한 1945년 12월 8일자 동아일보 기사(右). 학생의거에서 피살당한 신의주제일공업학교 4학년 박태근 학생의 모친이 아들의 유골을 안고 서울로 왔다는 내용이다.

이에 자유시참변(1921)과 고려인강제이주(1937) 그리고 신의주학생의거(1945)의 역사적 진실을 제대로 알린다면 요즘 벌어지는 대깨문(대가리가 깨져도 문재인)에 대한 의문점들이 풀리고 역사 문화 전쟁의 중요성이 부각될 것으로 생각한다.

일제시대 3·1독립만세 이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1920)에서 보듯 대한독립군 소규모 부대들은 일제와 싸워 이겼던 소중한 경험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소련공산제국주의와 이들의 앞잡이 노릇을 자처했던 이르쿠츠파 한인공산당 세력이 대한독립군을 궤멸시킨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바로 자유시참변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자유시참변은 일제와 싸워 이겼지만 끝내 공산제국주의에 궤멸당한 안타까운 사건이다.

그 후 16년이 흐른 1937년 소련 공산제국주의 스탈린에 의해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 18만 명이 중앙아시아 등지로 강제이주 당하는 역사적 슬픔을 또 겪게 된다. 자유시참변에서 독립군을 궤멸시키는 데 앞장섰던 한인들은 연해주 지역에서 한인들의 지도자 역할을 하고 살았다. 그러나 이들을 강제이주시키기 위해 스탈린은 한인지도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기에 이른다. 토사구팽이 된 것이다. 지도자들을 잃은 연해주 동포들은 속절없이 끌려갔다.

다시 시간이 흘러 1945년 해방을 맞았지만 38선 이북은 소군정의 통치 아래 가짜 김일성이 독립장군 행세를 하며 나타났다. 신의주 반공학생의거는 이때 일어났다.
 

소련군과 공산주의에 대항에 일어선 신의주 학생들

11월 23일은 신의주반공학생의거 74주기가 되는 날이다. 신의주 반공학생의거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민간이 공산당의 압제에 항거해서 일어난 최초의 성전이다. 신의주 반공학생의거의 전반적 내용을 다음과 같이 축약할 수 있다.

신의주 반공학생의거의 원인은 소련군에 있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북한 전역에는 소련군이 소위 ‘해방군’으로 진주했다. 그런데 소련군은 해방군이 아닌 폭압군이었다. 소련군은 북한 도처에서 살인, 방화, 약탈, 강간 등 온갖 만행을 자행했다. 또한 공산당은 무자비한 탄압과 숙청으로 주민의 자유와 권리를 유린하고 소련의 사주 아래 김일성을 괴수로 한 공산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학생과 주민들을 연일 강제로 동원해 각종 궐기대회를 개최하는 등 대중을 선동함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었다.

이와 같은 소련군과 공산당원의 비인간적 작태와 학정에 대해 각급학교의 학생들로부터 이에 항거하자는 소리가 대두되고 있었다. 1945년 11월 21일 신의주에서 약 80리 떨어진 용암포에서 ‘공산당이 강제로 점령한 용암포 수산학교를 돌려 줄 것’과 ‘인민위원장과 그 주구(走狗)들은 물러가라’고 외치는 사건이 일어났다. 강제동원에 의한 공산정권 수립 찬성대회가 공산당 타도 대회로 변한 순간이다. 이때 공산당은 궐기(蹶起)한 학생과 시민을 폭력으로 강제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100여명의 중경상자가 발생하고 학생 측을 두둔하고 있던 제일교회의 홍석왕 장로가 현장에서 공산당원에 의해 무참하게 타살(打殺)되는 등 유혈충돌 사건이 발생했다.

이 용암포사건의 참상(慘狀)이 신의주학생자치대 본부에 알려졌고 이에 격분(激奮)한 학생자치대는 즉시 사태수습을 위해 각 학교 대표 2명씩으로 구성한 진상조사단을 현지에 파견하여 용암포 소련군 사령관에게 학생들의 사정을 호소했으나 묵살되었다.

결국 이 용암포 사건이 반공의거의 도화선이 되었다. 신의주학생자치대는 다음날 오전 10시에 각 학교 대표 15명이 참석한 비상대책회의에서 공산 학정(虐政)의 원부(怨府)인 평안북도 공산당본부와 평안북도 인민위원회 그리고 신의주 보안서를 타도하기로 결의하기에 이른다.
 

조형곤 역사정립연구소 대표
조형곤 역사정립연구소 대표

공산 학정에 대한 항거의 도화선이 된 의거

학생들은 1945년 11월 23일 오후 2시를 기해 신의주 시내 6개 중학교 3500여 명 전학생은 비무장으로 투쟁한다는 거사의 방침을 세웠다.

각 학교별로 목표물을 분담 공격하도록 전략을 세웠지만 이 계획은 공산당이 학원 내에 침투시킨 첩자들에 의해 이미 밖으로 알려졌다. 공산당은 수집한 정보로 학생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의거(義擧) 진압을 위해 신의주 소련군 사령부에 연락해 사전에 만반의 대책을 취하게 된 것이다. 거사 당일 각 학교 학생들은 공산당 당국이 사전에 대응 조치를 취한 사실을 알고도 교내에 대기하고 있다가 결행할 시각이 닥치자 미리 준비한 돌멩이를 들고 일제히 각기 목표물을 향해 총공격을 개시했다.

제1진인 동중학교와 제1공업학교는 도인민위원회를 공격했으나 이미 출입문은완전히 폐쇄된 상태였다. 오히려 따발총과 권총으로 무장한 보안대원들을 요소에 배치해 놓고 옥상에 장치해 놓은 기관총과 소총으로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돌멩이를 든 학생들은 그 무력에 대항할 수 없어 많은 사상자를 내고 말았다.

제2진인 사범학교와 제2공업학교는 공산당 본부를 공격하기 위해 이 건물 3층까지 돌진했다. 그 과정에서 소련군과 공산당원들의 총칼에 고작 돌을 던지면서 대항을 하다가 소련군의 대거 출동으로 큰 사상자를 내고 후퇴했다.

제3진인 상업학교와 평안중학교는 시외곽인 남신의주에 위치한 관계로 시내를 향해 제방을 따라 진격했으나 소련군 전투기의 기관총 발사와 공산당원들의 강력한 저지로 역시 길바닥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이 의거로 당일 현장에서 발생한 학생들의 인적 피해는 선두에 섰던 제1공업학교의 박태근을 비롯한 각 학교에서 24명이 순국을 하고 부상자는 제1공업학교의 선우은명을 비롯한 350여 명이나 되며 이 외에 현장에서 1000여 명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주동자로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형(流刑)된 제2공업학교의 황신하를 비롯한 200여 명이 추가로 처형되거나 또는 유형(流刑)되었다. 공산당은 이 의거(義擧)가 종식된 후에도 주동 학생을 색출하기 위해 수많은 학생들을 보안대로 강제로 끌고 가서 갖은 고문과 박해를 가했다.

그 후 김일성이 학생들을 무마하기 위해 동중학교에 와서 강연까지 한 바 있으나 학생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신의주 반공학생의거가 도화선이 되어 그 후 함경북도 길주의 고려학생동맹사건, 평양학생사건, 함흥학생사건, 해주학생사건 등 북한 전 지역에서 요원(遼遠)의 불길처럼 잇달아 공산 학정에 항거하는 공산당 타도와 반소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신의주 반공학생의거는 세계 최초로 민간이 공산당에 항거한 ‘자유의 성전’이다. 북한에서 이를 덮어두려 한다는 점은 이해가 가지만, 자유 대한민국에서도 이를 알리지 못하고 북한과 똑같이 역사 속에 숨기려는 태도는 납득할 수 없다.

그래서 필자를 비롯한 몇몇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2015년 광화문 일대에서 야간 추모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날을 추모하고 기억하기 위해 우리나라는 한때 이 날을 ‘반공학생의 날’로 기념했고 1968년에는 기념우표를 발행하기도 했다. 전쟁 직후 20여 년간 국가가 기념했던 사건이자 온 국민이 알고 있던 신의주 반공학생의거 사건은 좌편향 역사교과서 및 사회교과서에서 모두 다 누락되었다. 단 한 줄도 언급이 없는 상태이다.

이에 대한 역사적 의의는 백년동안 출판사에서 발행한 대한민국 정체성 총서 제18권 <서북청년회>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이 책의 목차만 봐도 신의주 반공학생의거의 역사적 의의가 크고 현대사에 끼친 영향도 지대하다고 볼 수 있다.

“남한으로 내몰린 북한의 엘리트, 월남해서 빈민이 되다, 보수우익의 전위대, 서북청년회로의 대통합, 서북청년회의 지방 진출, 영남 지방에서의 반공투쟁, 서북청년회의 분열과 재건, 대북 공작, 총선을 통한 건국, 대한청년단으로의 통합과 625전쟁”

이는 도서 <서북청년회>의 목차이기도 하지만 신의주 반공학생의거의 역사적 의의를 간략하게 설명해 주는 대목이다. 이 책의 저자인 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는 신의주 반공학생의거가 북한의 대탈출을 촉진했다고 주장한다.

책에 따르면 당시 남한의 좌익들은 북한이 공산혁명으로 지상낙원이 되고 있다고 선전했는데 공산당을 겪어 보지 못한 남한의 군중들은 이를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이에 북한 공산주의의 폭거를 목도한 서북청년들은 북한 실정 보고대회를 열며 남한 내 좌익들의 선동을 막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서북청년회는 남한 사회에 뿌리가 없는 월남민 청년들의 모임으로 지적 수준이 높은 단체였다. 그들이 신의주 학생의거 이후 대거 남한으로 쫓겨 내려왔다는 것은 북한 측 입장에서는 엘리트를 잃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북한의 인재부족 현상이야말로 오늘날 북한 사회가 낙후된 가장 큰 원인이 되기도 했다.

서북청년회는 남한의 다른 어느 우익청년단체들보다 뚜렷한 이념과 확고한 행동 목표를 가지고 있었으며 강령에서 ‘균등사회’의 실현을 내세운 것은 그들이 소수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는 자본주의나 보수주의를 맹목적으로 신봉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북한에서 유산계급이었을지 모르지만 남한에서 빈민의 신분으로 떨어졌고, 그 때문에 자연스럽게 경제적 평등주의를 내세우게 되었을 것이다.

좌익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서북청년회의 좌익 척결활동이 대한민국의 건국에 큰 기여를 했고 건국이 되자 좌익 타도의 역할은 국가가 맡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서북청년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길은 군대에 들어가는 것이고 그들로 인해 군 입대 ‘붐’이 일어났다. 군대는 고향을 찾겠다는 의지가 강한 서북청년들에게 가장 적합한 일터였을 것이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반격작전으로 대규모 병력을 인천에 상륙시키려 했다. 상륙군의 진로를 유도하기 위해 인천 앞바다 팔미도 등대에 불을 켜는 일이 중요했고 그 임무를 서북청년들이 맡게 되었다. KLO부대에 속한 서북청년회 출신 특수임무대원들은 인천 앞바다의 영흥도를 전진기지로 삼아 덕적도 팔미도 등지를 샅샅이 탐색 보고했다. 이들의 눈부신 활약으로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했지만 영흥도에 남아 있던 서북청년회 출신 KLO 대원 20여 명은 불행히도 북한군과 현지 좌익들에 희생되었다.
 

신의주 학생의거는 세계 최초의 반공 자유항쟁

신의주 반공학생의거가 도화선이 된 후 함경북도 길주의 고려학생동맹사건, 평양학생사건, 함흥학생사건, 해주학생사건 등 북한 전 지역에서 공산 학정에 항거하는 공산당 타도와 반소 운동이 전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련과 김일성의 공산주의에 회의를 품고 대거 남하한 청년들이 조직한 서북청년회의의 모체는 신의주 의거의 학생들이었던 것이다.

적어도 국가적 위기가 있을 때마다 구국의 역할을 한 신의주 의거의 학생들이 있었고 따라서 오늘의 대한민국은 그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는 지난 40여 년간 단 한 차례도 추모대회를 개최한 바 없고 더욱이 신의주 의거에서 해주학생운동까지 역사교과서에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신의주 시민회 혹은 신의주 학생의거기념회가 주최하여 조촐하게 추모대회를 개최하고 있을 뿐이다.

4·19의거나 4·3 혹은 5·18 등에 비해 역사적 의미가 결코 적지 않은 신의주 반공학생의거를 홀대하는 역대 정부의 문제점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추모대회를 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진상을 정확히 파악하는 일이다. 당시 희생자 숫자를 23명 혹은 24명으로 간단하게 언급하는 것도 매우 유감일 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강제노동 수용소로 끌려간 학생이 과연 200명인지 500명인지도 조사해야 될 일이다.

이번 11월 23일 추모대회가 그들만의 추모로 끝나서는 안 된다. 향후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리고 국가적 기념일로 지정하며 모든 학생들에게 교훈이 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에 역사학계는 진정성을 갖고 참여해야 할 것이며 이 일이 반드시 성공하도록 많은 단체들에게 관심과 후원으로 함께 할 것을 촉구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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