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100주년] 대동단결선언은 3·1운동과 임시정부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을까?
[임시정부 100주년] 대동단결선언은 3·1운동과 임시정부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을까?
  • 박명수 미래한국 편집위원·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 승인 2019.11.08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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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 652호 대동단결선언문서는 신규식·박용만·조소앙 등 해외 독립운동가 14명이 통합 독립운동조직을 결성하려는 뜻을 갖고 민족 대회를 소집키 위해 작성한 문서다.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 652호 대동단결선언문서는 신규식·박용만·조소앙 등 해외 독립운동가 14명이 통합 독립운동조직을 결성하려는 뜻을 갖고 민족 대회를 소집키 위해 작성한 문서다.

1986년 8월 15일과 16일에 한국의 주요 신문들은 새로 발견된 대동단결선언을 특종으로 다뤘다. 이 자료는 독립기념관에 기증된 안창호의 유품에서 발굴된 것이다. 대동단결선언은 1917년 7월 신규식을 중심으로 대종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발표한 독립선언서였다. 여기에는 한민족의 주권이 일본에 양도될 수 없다는 주권불멸설과 고종이 그의 주권을 백성에게 양도했다는 주권양도설이 담겨 있었다.

한국 역사학계는 흥분했다. 그리고 이것을 3·1운동의 기원이라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3·1운동의 기원으로 보아왔던 전통적인 해석 대신에 대동단결선언이 3·1운동의 기원이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대동단결선언으로 시작된 독립운동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게 되었다(조동걸,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1917년의 ‘대동단결선언,’ <한국학논총> 9, 1987, 149-150).

그러면 대동단결선언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한일병합 이후 한국인들은 해외로 나갔고 그 중 1915년 이상설을 중심으로 신규식과 박은식은 상해에서 신한혁명당을 만들었다. 이들은 당시 연합국의 일원인 일본과 대립관계에 있던 독일이 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믿고 독일, 중국(원세개)과 함께 고종을 내세워 독립을 얻으려고 했다. 이들은 고종을 복귀시키려고 했기 때문에 복벽주의자들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일본과 싸울 줄 알았던 중국의 원세개가 일본과 타협해서 연합국에 속하게 되자 이들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1916년 6월 원세개가 죽고, 1917년 3월 이상설도 죽고 말았다. 신한혁명당의 독립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1917년 러시아 혁명과 대동단결선언

1917년 국제 정세는 매우 급격하게 변화했다. 무엇보다 소련을 중심으로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대동단결선언은 이런 국제사회의 변화를 설명하고 있다. 당시 유럽에서는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서로 대결하고 있었고, 오스트리아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던 폴란드 등 슬라브민족의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있었고, 이들은 같은 슬라브민족인 러시아와 손을 잡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슬라브민족들을 비롯한 많은 약소국가들이 독립하게 되었다.

하지만 러시아에서는 1917년 2월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 황제 니콜라스 2세는 물러났다. 신생 러시아는 주변의 약소 민족들의 민족자결을 지지했고, 그 결과 동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독립하게 되었고, 이것은 국제사회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당시 제2 인터내셔널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사회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생 러시아는 연합국에서 탈퇴하게 되었고, 미국은 연합국에 참전해 연합국의 강화를 꾀하게 되었다.

대동단결선언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은 이런 국제적인 환경 가운데서였다. 신규식이 대동단결선언을 만든 것은 사회주의자들이 중심이 된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함이었으며, 실지로 신규식과 조소앙은 대동단결선언을 만든 다음에 1917년 9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만국사회당 대회(제2 인터내셔널)에 참석하고자 했으나 여권이 나오지 않아 가지 못하고, 대신 조선사회당의 이름으로 전문만 보냈다. 따라서 대동단결선언은 1917년 2월 일어난 러시아 혁명에 힘입어 조선 민족의 독립을 추구했던 운동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동단결선언은 매우 강력한 민족주의적인 기반 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선언문을 만드는 데 주역이었던 신규식은 강력한 대종교 신자였고, 다른 발기자들도 철저한 민족주의자들이었다. 대동단결선언은 대한독립운동에 강력한 민족주의적인 기초를 제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한민족의 주권은 한민족에 있다는 주권불멸론, 그리고 한민족의 주권을 갖고 있던 황제가 주권을 포기함으로 그 주권이 한국민에 전달되었다는 주권민유론, 그리고 그 주권을 국내의 국민들이 행사할 수 없기 때문에 해외의 교포들이 대신해서 그 주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교포주권론 등은 매우 창의적인 주권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통해 일본이 한국의 주권을 빼앗아 간 것은 잘못된 일이며, 또한 새로운 독립운동은 해외의 교포들이 담당해야 한다고 하여 해외독립운동의 이론적 기반을 마련한 것은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대동단결선언과 3·1운동: 연속성과 차별성

많은 학자들은 대동단결선언에서 황제의 주권이 국민에게 넘어왔다고 주장하는 것에 근거해서 대동단결선언에서 복벽주의적인 전제주의가 종결되고, 이제 새로운 공화제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사실 대동단결선언을 주도한 신규식은 이미 손문의 신해혁명을 지지했고, 따라서 공화제를 추구했다. 조소앙 역시 일본에서 근대민주주의를 공부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대동단결선언에서 공화제적인 요소를 찾는 것은 의의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런 대동단결선언이 다음의 몇 가지 점에서 1919년 3·1운동과 임시정부가 추구하는 점과 달랐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첫째, 3·1운동의 문서에는 한민족의 주권이 고유한 것이며 또한 그 주권이 원래 왕에게 주어졌다는 주장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3·1운동은 한 공동체의 주권은 그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피통치자의 동의 아래 이뤄져야 한다는 보편적인 주권론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3·1운동의 기본 전제는 한반도의 운명은 한반도에 살고 있는 피통치자인 조선인들의 의사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3·1 독립만세가 국내에서 일어난 근본적인 원인이다. 국제사회는 한반도에 사는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가 있는 가를 알고 싶어 하며, 이것을 알리기 위해 국내에서 3·1독립만세를 불렀던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의 주권을 해외의 동포들이 행사한다는 대동단결선언의 주장은 3·1운동 이후 국제사회의 정치사상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이 같은 대동단결선언은 당시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사실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혁명은 당시 한국인들에게 별로 매력적이지 못했다. 19세기 후반 이후 러시아는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것은 러일전쟁으로 인해 분명해졌다. 이런 러시아가 민족자결주의를 말했을 때 사람들은 이것을 믿지 않았다.

박명수 미래한국 편집위원·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박명수 미래한국 편집위원·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따라서 러시아 혁명을 배경으로 하는 대동단결선언은 신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몇몇 사람들 외에 다른 사람들의 호응을 얻지 못했고 단지 하나의 선언서로 남게 되었다. 지금까지 대동단결선언이 어떻게 한국 교포들에게 구체적인 영향을 미쳤는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많은 학자들은 이 대동단결선언이 해외 동포들을 하나로 묶어 최고 독립운동 기관을 만들려고 했다는 점에서 임시정부의 기원이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대동단결선언은 해외의 교포들이 하나의 최고기관을 만들어 독립운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해외 독립운동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었던 미국에 기반한 대한인국민회는 이런 대동단결선언의 주장에 대해 매우 냉담했다.

이미 미국에는 대한인국민회가 있고 여기에는 미국 본토, 하와이, 중남미, 노령, 중국을 지방총회로 하며 그 대표가 도산 안창호였다. 따라서 이들이 새로운 기관을 만든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신한민보>, 4250, 9월 20일). 조소앙은 “각자 영웅으로 할거한 각 단체는 하나도 여기에 호응해 오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조소앙, ‘3·1운동과 나,’ <조소앙선생문집> 하권, 67). 사실 상해 임시정부의 창설을 실질적으로 지지하고 후원한 것은 바로 미주의 대한인국민회였다(강덕상, <여운형 평전> 1, 2007, 220).

한국사학자들은 3·1운동의 기원을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인 요소에서 찾으려고 한 나머지 3·1운동과 임시정부를 형성하는 데 미친 국제적인 영향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했다. 1917년 작성된 대동단결선언은 당시의 국제적인 정세와 민족의 정기를 잘 보여주는 문서이지만 1919년 3·1운동과 임시정부는 1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중심으로 변화된 국제 정세를 반영해 새롭게 일어난 운동이다. 대동단결선언이 매우 중요한 문서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3·1운동과 임시정부에 미친 영향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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