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주일 駐英 국제 탈북민연대 사무총장 “천리마 축구단만 알던 영국인의 북한 인식 확 바꿔놨죠”
[인터뷰] 김주일 駐英 국제 탈북민연대 사무총장 “천리마 축구단만 알던 영국인의 북한 인식 확 바꿔놨죠”
  • 박주연 미래한국 기자
  • 승인 2019.11.25 10: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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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박주연 미래한국 기자
사진 권도한 미래한국 인턴기자
 

지난 2011년 3월 28일 3박4일 일정으로 영국을 방문한 최태복 북한 최고인민위원회 의장에게 한 탈북민이 요덕 정치범 수용소 명단을 전달하며 북한정치범들의 생사 확인을 요구한 일이 있었다.

북한 최고인민위원회 의장은 우리로 치면 국회의장에 해당되는 고위직으로, 최태복에게 “최소한 이 명단에 들어 있는 254명의 생사 여부라도 알려주는 것이 인간적인 도리”라고 꾸짖었던 주인공은 김주일 씨. 당시 그는 재유럽 조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으로 유럽에 정착한 1000여명의 탈북민을 회원으로 연합회를 결성한 인물이다.

영국을 거점으로 유럽에서 북한인권운동을 주도하다 이달 한해 돌아온 김주일 씨를 <미래한국>이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김주일 駐英 국제 탈북민연대 사무총장
김주일 駐英 국제 탈북민연대 사무총장

- 국제 탈북민연대 사무총장, 재유럽조선인총연합회 사무총장, 재영조선인협회 감사, 북한민주화재단 준비위원 등 맡고 있는 직책이 여러 개입니다. 주로 유럽에서 활동을 하신 것 같습니다.

2004년 미국에서 북한인권법이 통과된 이후 미국이 탈북민들을 많이 받아주지 않을까 라는 기대심리 때문에 탈북민들의 해외지향성이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북한 난민을 받아주는 조건으로 ‘한국을 경유하지 않은 탈북민에 한에서’라고 선을 그었어요. 그러다보니 미국으로 가려던 탈북민들이 방향을 틀어 유럽 등 각지로 퍼져나가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특히 탈북민들이 영국 등 유럽으로 왕성하게 나가게 된 해가 2006년부터 2011년 사이인데요. 당시 영국은 국적이 북한이면 받아줬습니다. 국제법 기준으로 탈북민의 2개 국가 국적(북한, 남한) 중 오리지널을 인정해 준겁니다.

당시는 조선족, 한족, 몽골족 이런 사람들이 유럽에 많이 유입됐는데 북한이 인권탄압국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이런 사람들이 국적을 북한이라고 속여 망명 신청하고 현지에서 일하는 사례가 많았어요. 한국에선 중국 한족 등과 강제 결혼한 북한 여성 등 중국에서 신분에 이상이 있던 사람들에게 주민증을 주지 않았는데, 그런 사람 그런 사람들이 유럽으로 나간 것이죠. 유럽에선 한살이든 스무 살이든 태어난 곳이 북한이면 국적을 인정해줬으니까요.

한국에 왔는데 주민등록증을 못 받는 이 사람들이 제3의 탈출구로 선진국이나 서양 국가를 선택하다 보니까… 하여튼 여러 케이스로 유럽으로 갔고, 그러다보니 영국에만 탈북민이 2008년 당시만 해도 2000여 명이 됐습니다. 유학이나 자녀교육 목적도 있고, 한국 자체가 싫어 떠난 사람도 있었고, 그리고 한국에서 주민등록증을 못 받은 사람들도 있고, 그러나 해외생활이 쉽지 않죠.

- 본인은 어떤 이유로 영국으로 건너가게 되신 겁니까?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제 아이가 장애가 있어 한국에서 키우는 데 어려움이 있었어요. 더 나은 환경에서 차별 없이 키우고 싶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북한민주화운동을 해야 하는데, 국내에서는 국가 간섭을 받기 때문에 북한민주화, 북한인권 운동하는데 제약이 있었습니다.

원래 저는 북한에서 장교였지만 시나리오를 쓰고 싶은 꿈이 있었어요. 한국으로 와서도 국방부에 있다가 못다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 서울예술대학에 진학해 공부했고요. 극작가 과정을 수료하고 2004년 당시 한류콘텐츠 부흥정책 분위기 속에서 김종학프로덕션 제작현장에서 일을 했던 경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밤샘 촬영 등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이 많이 부족하더군요. 가정생활에 더 충실하기 위해 개국을 앞둔 케이블방송 복지TV로 옮겼고 거기 편성팀에서 일하면서 개국 콘텐츠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 콘텐츠를 만드는 과정에서 정부 간섭을 느끼다보니 좀 더 자유롭게 만들기 위해 해외로 나간 겁니다. 세 번째는 북한에 가족이 있다 보니 신경을 안 쓸 수 없었습니다. 북한은 탈북자의 남은 가족 처벌 수위가 다릅니다. 북한이 주적으로 간주하는 국가가 미국 일본 한국이에요. 탈북자가 주적국가에 있는 것보다 프렌들리 국가에 있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 들었던 것이죠.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들을 생각해서 영국을 선택한 이유도 있었습니다.
 

마이클 커비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장은 2014년 2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북한인권 관련 최종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
마이클 커비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장은 2014년 2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북한인권 관련 최종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

영국을 거점으로 유럽에 북한인권 중요성 확산

- 그럼 영국으로 이민을 간 것인가요?

이민을 가야 하는데 이민 비자가 없었습니다. 제 출생지가 북한이다 보니 난민 비자를 받을 수 있었죠. 2011년인가 영국 정책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가 이명박 정부 시절인데 정권 초기 외국과 처음 체결한 워킹 홀리데이 비자 문제였어요. 한국 대학생들이 유학 비자를 받아도 현지에 가서 일을 할 수 있게끔 해줬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영국에서는 거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해결이 안 되다가 영국 정부에서 대안으로 제시한 게 있었습니다. 영국이 ‘우리에게 북한 주민들의 지문이 있는데, 이것을 북한대사관에 의뢰해도 확인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당신네들이 확인해 달라’고 마치 워킹 홀리데이 비자와 지문 확인 작업을 맞교환 한 것 같은 외교적 처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탈북자들 지문이 북한대사관에 건네진다는 것은 그 자체로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의 신변이 위험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두 번째 문제는 영국정부가 한국정부에 지문의뢰를 하면 영국에 북한 난민으로 위장 신청을 했어도 한국에 지문이 남아 있지 않은 조선족, 한족, 몽골족 등 아시안은 진짜 북한인으로 인정받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생긴다, 그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질 것이냐 라는 겁니다.

혜택은 북한인이 받아야 하는데,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북한인으로 혜택을 받을 수 있고 그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영국은 인원을 제한하고 더 이상 안 받는 대신 자기네들이 이미 비자를 준 사람들에 한해서 취업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정책으로 바뀐 것이죠. 그렇게 영국 정책이 바뀌면서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 영국에서 북한인권운동을 하셨다는데 어떤 일들을 했습니까.

국가는 과거엔 전쟁을 통해 땅따먹기를 하고 부를 축적해왔습니다. 그러나 현대는 외교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외교전을 통해 국익이 왔다 갔다 하죠. 북한은 미국을 포함한 적대국가의 이야기는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 북한과 외교관계가 설립돼 있거나 북한과 교류하는 북한 프렌들리 국가에서 북한인권 문제를 말하면 더 효과가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비유하면, 나와 싸우는 친구가 말하면 귀를 닫지만 내 옆의 친구가 얘기하면 듣잖습니까. 그런 관계를 잘 설정해서 유럽에서 활동하면 북한인권 개선에 더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전략적인 판단을 하고 2007~2008년부터 북한인권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우선 사람을 모아야 일을 할 수 있으니까 영국에서 재영조선인협회를 설립했고, 또 영국 이외의 다른 유럽에도 탈북민이 있으니까 유럽 각국의 탈북민 단체들과도 협력하자는 뜻으로 2009년 재유럽조선인총연합회를 만들었습니다. 또 범위를 더 넓혀 전 세계 다른 곳에도 탈북민들은 있으니까 2013년 국제탈북민연대를 만들었죠. 재영조선인협회에 대해 소개하자면, 영국에 거주하는 탈북민을 대표하는 단체로서 성공적인 정착을 도모하고, 친목을 도모하고, 북한인권 개선과 북한의 개혁개방을 도모하는 단체입니다.

더 나아가 자녀들을 영국 지역 사회와 글로벌 인재로 키우고 통일 조국의 역군으로 키운다는 목표를 세우고 조직을 운영해 왔습니다. 그리고 영국을 중심으로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이런 나라에서 조직을 만들어냈고, 이를 통해 미국과 일본 한국 등 국제연대를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 영국에는 탈북민이 얼마나 거주하고 있습니까.

옛날에는 한 2000명 정도 있었는데 지금은 700명 정도 됩니다. 숫자가 줄게 된 이유는 체류비자를 안주는 문제도 있고, 현지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한 이유도 있습니다. 언어, 문화 장벽이 있으니까요. 적응하지 못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거나 뉴질랜드, 캐나다, 호주, 미국으로 가거나 반대로 그쪽에서 다시 영국으로 오거나 합니다. 현재 전 세계 기준으로 한국에 탈북민이 제일 많고요, 그 다음으로 영국이에요. 그 다음에 미국 정도 되지요.

- 영국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나요.

사람들이 1차적으로 그렇게 모여 북한인권 문제를 국제적으로 알림으로써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높이는 것이 우리 할 일이라고 봤습니다. 단체를 조직한 다음에 국제사면위원회, 국제엠네스티 인터내셔널, 세계기독연대 CSW 등 그런 NGO들과 같이 연합해서 북한인권 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활동을 진행했습니다.

의회에서 길거리에서, 사진전시회나 영화제를 통해 또 북한인권자유주간 행사들을 통해 활동, 지원했고요.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북한인권조사위원회를 찾아가 북한인권 문제를 알리는 일 그리고 2014년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 COI가 만들어졌을 때 인권보고서를 채택하는 데 도움을 준 것 등입니다.

또 하나, 영국에는 크게 두 가지 국제적인 시장이 존재해요. 첫째는 금융시장이고 두 번째는 국제 언론시장이죠. 언론시장의 대표적인 간판 미디어가 BBC에요. BBC에는 인권이 취약하고 자유가 결핍된 국가에 관해 (알리는) 방송 서비스, 정보투입 코너들이 다 있는데요. 미얀마, 중국, 홍콩, 대만도 있는데 북한만 없었습니다.

저희가 2010년부터 영국 의회 상원 하원 외교부를 두드리고 NGO가 가서 캠페인을 벌여 6년 만에 BBC 코리안 방송을 만들었습니다. 현재 BBC 본사에서 한국어 방송을 총괄하는 국장이 한국인입니다. 어쨌든 영국에서 우리가 했던 대표적인 일 세 가지를 뽑으라면, 첫째 유럽 지역 북한인권 문제를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2007년에 어느 정도였냐 하면 영국에서는 북한하면 인권이 아니라 축구 얘기가 나오는 거예요.

1966년 천리마 축구단이 월드컵 4강에 올랐는데 그것을 기억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지금은 인권하면 북한을 가장 먼저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인식이 바뀌도록 한 게 저희가 한 일입니다. 솔직히 이런 일은 국가도 못하는 일이죠. 두 번째 우리가 한 일은 북한인권특별위원회가 만들어낸 북한 관련 보고서 유엔COI리포트가 나올 수 있도록 활동한 것이죠. 세 번째가 BBC 한국방송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한 것이에요.
 

- 실제 영국과 북한의 관계는 어떤가요?

서양에서 북한과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는 국가 중에서 북한 시각으로 봤을 때 제국주의 국가 중에서 유일한 나라가 영국이에요. 영국은 북한과 관계에서 당근과 채찍의 외교 전략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의 보수적 시각은 북한에 지원하는 것이 전부 북한 정권 유지에 쓰인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영국 보수의 생각은 지원은 해주되 인권 문제를 거론하는 두 트랙입니다. 이런 외교 전략을 구사하기 때문에 미국과는 또 달라요. 미국은 무조건 봉쇄와 차단인데 영국은 지원해줄 때마다 인권개선을 요구하는 식이죠.

영국은 북한과 썩 가깝지도 그렇다고 멀지도 않은데, 즉 북한과는 프렌들리를 유지하되 북한인권 문제도 제기하는 것입니다. 인권 관련 유엔 안보리를 주도적으로 리드하는 국가가 셋이잖아요.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은 자기들 납북자 문제가 있을 때 가끔 그렇죠. 현재 이 세 국가가 주도적으로 하고 있죠.

2011년 영국 정부가 미팅을 주선해 최태복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직접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최태복 씨가 옥수수 좀 달라고 영국에 식량을 구입하러 왔었거든요. 옥수수를 지원받아 갔는데, 하여간 영국 정부는 그 자리에서 최태복 씨를 앉혀놓고 북한인권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그 자리에 탈북민인 제가 앉아 있는데 북한은 그걸 모르고 왔던 것이죠. 북한 입장에서는 처음에 모르고 있다 나중에 탈북민이라고 소개하는 걸 듣고 깜짝 놀랐던 겁니다.

제가 왜 그런 자리를 만들도록 영국 의회 상원에 제의했느냐 하면 이런 겁니다. 영국과 미국이 인권 문제를 자꾸 거론하면 북한 입장에서 짜증날 것 아닌가, 그러니 자리를 만들어 달라, 피해자와 가해자가 만났을 때 양쪽 얘기 듣고 누구 말이 거짓말인지 당신들이 감별해라 그랬던 것이죠. 그랬더니 “굿 아이디어” 하더군요.

그래서 그런 자리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죠. 아마 유튜브에도 그날 만남에 관한 자료가 남아 있을 것입니다. 탈북민이 북한 고위급과 마주 앉아 북한인권 문제를 거론한 일은 아마 유일하게 저 혼자일 겁니다. 하지만 제 힘이 좋아서가 아니라 영국 정부가 그 자리를 주선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 얼마 전 평양에서 남북축구 대결이 있었습니다. 손흥민 선수가 ‘안 다치고 온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말을 해서 화제와 동시에 여권 지지층으로부터 비난이 쇄도해 논란이 됐는데요, 어떻게 보셨나요?

북한이 아무리 저돌적으로, 충동적으로 나오는 국가라 해도 그건 국제경기잖아요. 제가 볼 때 북한이 스타급 선수에 고의적으로 노이즈를 일으켰던 거예요. 그 노이즈를 통해서 한국 정부와 딜을 하려는 계산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북한 입장에서는 지금 미국과도 대화가 안 되고, 미국의 눈치를 보는 남한 정부와도 대화가 잘 안 되죠. 지원을 받아야 하는데 안 되니까 힘들고요.
 

문 정부 남북관계 조급증은 정권 재창출 목표에서 기인

-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을 보면 관계를 주도해간다기보다 계속 북한에 매달리는 모양새입니다. 과거 정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모습인 것 같습니다. 현 정부가 북한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입장을 바꿔 제가 만약 대통령이라면 어떤 조급함이 있을까를 생각해 봤습니다. 문재인 정부 속성은 단순합니다. 이번 뿐 아니라 다음도 좌파 정권이 유지되는 게 가장 큰 바람일거에요. 그래야 자신도 감옥에 가는 일 없이 안전할 것 아니에요? 문제는 좌파가 들고 나올 수 있는 게 남북관계 밖에 없다는 것이죠.

남북관계에서 빨리 성과를 내고 싶은 거예요. 막말로 김정은 구두를 닦아주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죠. 북한은 그것을 알고 철저하게 이용하려는 것이고, 문재인은 김정은이 고립된 상황에서 하면 안 되는 짓까지도 하는, 어쩌면 크게는 통일을 외치겠지만 중심적인 면에서는 자기네 권력의 연속성을 위해 김정은의 구두라도 닦아주고 싶어 하는 그런 마음이 있지 않느냐, 그래야 남북관계 성과를 내고 다시 또 지지를 얻을 수 있으니까요.

정부 차원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속성이 있는 것이겠죠. 저희 얘기는 이것이죠. 북한 정권이 아니라 북한 주민과 대화를 하라는 겁니다. 그래야 북한 주민이 깨어나고 인도적 지원이든 남북교류든 이산가족상봉이든 어떤 방법으로든 북한 주민에게 외부 세계 노출 기회가 많아지는 거예요.

단적인 실례로 북한에서 1997년에서 2000년 사이에 고난의 행군을 했잖아요. 이전에는 북한 사람들이 한국의 국호가 대한민국이라는 것도 몰랐어요. 그 이후로 대북지원이 이뤄지면서 장마당에 대한민국이라고 써 있는 쌀 포대가 발견됩니다. 북한에서도 중간에 새치기를 해서 시장에 몰래 파는 사람들이 생기잖아요.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통해 알려지면서 유통 경로도 하나의 전파 통로가 되는 것이죠. 물론 대북지원이라는 자체는 체제 유지라고 비판은 합니다만 실제로 뜻하지 않게 그런 효과도 있는 것이죠. 대북정보투입 사업은 한 가지만 가지고 고민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라디오, 대북풍선, 신문, UBS 등 한 가지만 고집하면 안 되는 것이죠. 다양한 루트를 통해 다양한 계층이 접할 때 가능한 겁니다. 제가 국제사회에 나가 전문가들과 세미나 할 때마다 외국인들이 항상 제게 물어봅니다. “그렇게 되면 왜 그게 필요한가”, “왜 다매체인가”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북한에 USB가 들어간다고 칩시다.

그럼 USB를 볼 수 있으려면 컴퓨터가 있는 사람이 봐야겠죠. 그럼 그 계층은 못 사는 계층인가요, 좀 사는 계층인가요? 좀 사는 계층이죠. 그럼 좀 사는 계층은 현상을 유지하려는 계층인가요, 아니면 동요하고 변화를 바라는 계층인가요? 그 사람들은 우리가 정보를 들여보내도 유행으로 보는 거예요. 자, 라디오 들어갑니다. 라디오가 있는 사람이 들어야 되잖아요. 그래서 저는 라디오가 필요한 계층에겐 라디오를 보내고 USB가 필요한 계층에겐 USB를 보내더라도 밑의 군중을 깨울 수 있는 것도 보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군중은 라디오도 없고 컴퓨터도 없어요. 혁명은 배고프고 굶주린 군중이 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상위층에게는 왜 (정보)투입 사업을 계속해야 하느냐, 군중이 일어났을 때 정권을 지키는 충견이 되지 말라는 겁니다. 눈감고 귀 막고 있으라고요. 그 계층이 그것만 해줘도 혁명은 성공하는 거예요.

그래서 다매체가 필요한 겁니다. 일반 전기도 필요 없고, 기계 수단도 필요 없는 하층을 위해선 삐라나 신문을, 정권을 장악한 계층을 위해서는 DVD나 라디오 이런 매체를 통해 알리는 것이죠. 다매체를 통해 북한 변화를 시도해야지 한 매체로는 어렵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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