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 20세기 최고의 정치 현인 헬무트 슈미트 총리
[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 20세기 최고의 정치 현인 헬무트 슈미트 총리
  • 양돈선 한반도선진화재단 독일연구포럼 대표
  • 승인 2019.11.29 10:4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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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들어 독일은 막강한 경쟁력과 국가 브랜드 파워를 구가하고 있다. 이는 상당 부분 안정된 정치 리더십에서 나온다. 역대 독일 총리들의 면면을 보면 모두가 훌륭한 정치가들이다. 이 중에서도 독일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총리는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t) 전 총리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다른 정치인은 물론 지성인, 종교인, 연예인까지 제치고 종합 평가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재임 중에는 서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손꼽혔다. 슈미트 총리가 어떤 인물이기에 이러한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인가.
 

1979년 의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헬무트 슈미트 서독 총리
1979년 의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헬무트 슈미트 서독 총리

지혜와 포용의 정치 현인(賢人)

헬무트 슈미트 총리는 20세기 후반 독일 통일 이전 서독의 정치가다. 그는 중도 좌파 성향의 사민당(SPD) 출신으로 같은 사민당 출신 빌리 브란트 전 총리 내각에서 국방장관, 재무장관을 거쳤다. 1974년부터 1982년까지 약 8년간 총리직을 역임했다. 슈미트 총리는 냉전 시대 서독의 부흥을 일궜다. 재임 중 두 번의 오일 쇼크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경제성장과 복지체계를 정착시켰다. 또한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선진국 클럽인 G7(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태리, 캐나다, 일본) 회의를 제안해 성사시켰다.

또 1975년 유럽 평화의 상징인 유럽안보협력회의(헬싱키 회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슈미트는 우선 기본 역량이 탁월했다. 지력과 혜안을 겸비했다. 차분한 달변에 날카로운 분석력, 시대의 핵심을 꿰뚫는 카리스마를 지녔다. 그의 단순 명쾌한 언변과 연설은 상대방을 감복시킬 정도로 설득력을 지녔다. 게다가 근면성과 진솔함, 공정성까지 정치인들이 지녀야 할 덕목을 두루 갖췄다. 모든 일은 매우 진지하게 처리했다. 독단(獨斷)을 경계했다. 혼자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내각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충분한 토의와 숙의를 거쳐 결론을 내리고 실천했다.

슈미트는 냉철했지만 균형감을 유지한 객관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보수 우익 성향의 기민당(CDU) 출신인 콘라드 아데나워 초대 총리의 친(親)서방 정책, 브란트 전 총리의 동방정책을 계승·융합하여 발전시켰다. 동서독 교류를 지속적으로 확대하여 통일을 앞당기는 데 기여했다. 전 정권의 정책들이라고 하여 무조건 폐기 처분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는 보수 야당에 대하여도 타협과 포용의 정치를 펼쳤다. 그는 2011년 11월 사민당 전당대회에서 당 원로로서 후배 당원들에게 행한 연설에서 “정적인 기민당의 메르켈 총리를 도와주라”, “주변 국가에 겸허하라”고 설파했다. 이 연설은 금세기 최고의 명연설로 꼽히고 있다.

슈미트의 사후적 지력과 혜안은 철학적 사고에서 길러졌다.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부터 평정심 즉 심리적 냉철함을 얻었으며 독일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로부터 ‘도덕과 정치가 함께 가야 함’을 배웠다. 법치 안에서 자기 이익보다는 도덕적 의무를 충족하려고 노력하였다.

막스 베버(Max Weber)로부터는 정치가의 세 가지 자질 즉 균형, 열정, 책임감을 전수 받았다. 또한 슈미트는 막스 베버가 제시한 두 가지 유형의 정치적 신념, 즉 신념윤리(信念倫理)와 책임윤리(責任倫理) 중 책임윤리를 중시했다. 신념윤리가는 책임은 본인에게서 찾지 않고 남 탓만 하지만 책임윤리가는 자신의 행위로 인한(예상되는) 결과들을 직접 책임진다.

그는 책임윤리에 따라 행동하고 그대로 실천하였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잘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말을 실천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질 줄 알았다. 그는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연설은 아무 가치가 없다”고 믿었다. 그의 책임 정치의 밑바탕에는 도덕과 윤리가 자리 잡고 있다.
 

80년대 서독에 배치된 퍼싱Ⅱ 미사일. 슈미트 총리는 인기에 영합하지 않았다. 당시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위협에 맞서 퍼싱Ⅱ 미사일 서독 배치를 관철시켰다.
80년대 서독에 배치된 퍼싱Ⅱ 미사일. 슈미트 총리는 인기에 영합하지 않았다. 당시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위협에 맞서 퍼싱Ⅱ 미사일 서독 배치를 관철시켰다.

소신과 원칙의 정치가

슈미트는 세계적인 인물이 된 후에도 독일 중산층이라는 뿌리를 잃지 않았다. 함부르크의 소박한 연립주택에 살면서 저술과 강연 등으로 왕성한 활동을 했다. 저서가 10권이 넘으며 대부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90세가 되어서도 세계 각국으로부터 인터뷰, 강연 요청이 쇄도했다. 저술 인세와 강연료 중 100만 유로(13억 원)를 기부했다. 그는 피아니스트다.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정도의 수준을 자랑하고 있으며 바흐와 모차르트 곡으로 CD 음반을 내기도 했다. 2015년 11월 96세의 나이로 작고했다.

슈미트 총리는 강력한 리더십과 결단력을 겸비한 소신주의자다. 국가 위기 관리능력이 뛰어나다. 그의 리더십은 위기 때 더 빛을 발휘했다. 그의 특유의 돌파력과 추진력은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신속하고 대담하다. 그는 국내 테러 위협과 구소련 핵으로부터 나라를 지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62년 엘베 강 대홍수로 함부르크가 물에 잠겼다.

이때 함부르크 주(州)정부 내무국장이던 슈미트는 그에게 없던 권한까지 동원해 경찰과 군 병력을 신속히 투입해 수천 명의 인명을 구해냈다. 이 사건으로 주민들로부터 큰 신망을 얻으며 일약 전국적 스타가 되었다. 1977년 10월 독일 극좌 강경 학생운동 세력들이 조직한 적군파(赤軍派, RAF) 테러리스트들이 독일 루프트한자(Lufthansa) 항공기를 납치했다. 이들은 90여 명의 승객과 승무원을 인질로 잡고 복역 중인 테러범 석방 등 무리한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

국내에서는 “승객의 안전을 위해서는 테러범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슈미트 총리는 이 항공기를 아프리카 소말리아 수도인 모가디슈 공항에 비상 착륙하도록 유인하면서 독일의 ‘GSG-9’이라는 특공대를 급파해 테러범들을 모두 사살하고 인질들을 전원 무사히 구출했다. 사실상 이 인질 구출 작전은 슈미트 총리로서는 정치 생명을 건 일대 모험이었다.

이전에도 적군파는 검찰총장·연방판사·정당 간부·경총 회장 등 요인을 납치·암살하고, 주(駐)스웨덴 독일 대사관을 습격하는 등 수차례 극악한 테러를 자행한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는 슈미트 총리 집 근처에도 출몰하여 살해 위협을 가했다. 그러나 그는 전혀 굴하지 않았다. 적군파 요원 소탕을 위해 대대적 작전을 벌이는 등 이들의 악행에 강력 대응해왔다. 불의에 타협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총리 부부가 살해되더라도 절대 이들과 어떤 교환도 거부한다”는 유서를 써 둘 만큼 강경했다.

결국 이 인질 구출작전이 성공하면서 적군파 핵심 지도자들은 집단 자살하고 조직은 와해되었으며 이로써 적군파 테러의 불안과 혼란은 막을 내렸다. 슈미트의 정치 기반은 진보 성향의 사민당이다. 그러나 같은 진보 성향의 적군파를 끝까지 추적하여 궤멸시켰다. 슈미트는 “만일 이 작전이 실패한다면 총리직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회고한다. 슈미트 총리는 정의와 법치를 존중하는 원칙주의자다. 그는 시류에 흔들리지 않았으며 포퓰리즘적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지도 않았다.

지금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나라 전체의 입장에서 크고 넓고 멀리 보는 정치를 했다. 사리에 맞지 않으면 아무리 당론이라고 하더라도 추종하지 않았다. 정년 연장 반대, 노조 권력 축소 등 당론과는 배치되는 소신으로 당과의 불편한 관계도 불사했다. 환경론자들이 극력 반대하는 원전(原電)에 대하여도 찬성 입장을 고수했다. 이러한 소신과 용기가 그의 정치적 자산이자 성공의 원천이 되었다.

이러한 슈미트 총리가 의회에서 ‘건설적 불신임’을 받아 물러나는 사태를 겪었다. 이 불신임을 당한 연방 정치인은 독일 헌정 사상 슈미트 총리가 유일하다. 슈미트 총리는 당시 연정(聯政) 파트너인 자민당과 국내 정책을 놓고 갈등을 빚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소신을 꺾지 않았으며 총리직에 연연하지도 않았다. 결국 자민당은 사민당과의 연정을 포기하고 기민당과 연정을 꾸렸다. 이에 따라 정권은 기민당으로 넘어갔으며 기민당 헬무트 콜 원내 총무가 총리가 되었다.
 

“핵에는 핵”을 관철한 안보 제일주의자

슈미트 총리는 좌파 진영이 소홀히 했던 안보에 대해서도 좌우 이념 논리에 매몰되지 않았다. 그가 집권하던 시기는 동서 냉전으로 세계 안보 불안이 심각했던 시절이다. 그러나 그는 동서 데탕트를 통해 서독의 안보 위기 해소와 유럽 전역의 평화 질서 확산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그는 자국의 안보에 관한 한 절대 양보를 하지 않았다. “안보는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1975∼76년 구(舊)소련은 구동독과 동유럽에 중거리 핵미사일SS-20을 배치했다.

이 핵무기는 사거리가 5000km로 서독을 포함한 전 서유럽을 사정권에 둔, 핵탄두를 3개 탑재할 수 있는 공포의 무기였다. 당시 소련과 미국은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을 통해 서로를 겨냥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 등 전략무기 사용을 자제하고 있었으나 이 협정 내용에 서유럽은 빠져 있어 사실상 서유럽 전체가 무방비 상태에 있었다.

이 무기가 언제 서독 상공에 떨어질지 모를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했다. 슈미트는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동분서주 고군분투했다. 소련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핵 감축을 요구하는 동시에 서방측에는 재무장 카드를 내밀었다. 그는 서방의 방위기구인 나토(NATO)에 ‘이중 전략(Doppelbeschluss)’카드를 제의했다.

이중 전략이란 ‘동유럽에 배치된 소련 핵무기가 폐기될 때까지는 서유럽에도 동일한 수준과 규모의 핵무기를 배치한다’는 의미다. 나토는 슈미트의 제안을 받아들여 4년 내에 상호금지에 이르지 못하면 서유럽에 퍼싱II 핵미사일을 전면 배치하기로 결정했으며 슈미트는 이를 서독 영토에 허용하는 결단력을 보였다. 퍼싱II는 7분 만에 모스크바를 타격할 수 있는 가공의 무기다.

이 퍼싱II 배치 계획은 서독 내 평화주의자와 환경주의자들의 극렬한 반대를 불러왔다. 반전(反戰) 반핵(反核) 단체들과 일부 극좌 대학생들은 연일 데모 시위를 열었다. 이들은 “소련과 동독은 핵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면서 슈미트를 전쟁광이라고 비난했다. 자신의 정치 기반이자 핵을 반대하고 평화를 주장해 온 사민당 내에서도 강렬한 반대에 직면했다. 이런 반전 분위기에 편승해 1980년에는 당내 환경주의자와 평화주의자들이 녹색당을 창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슈미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나토의 ‘이중 결정’ 없이는 소련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낼 수 없다”면서 당원들과 당내 인사들을 설득하고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실제로 소련은 대화에 응하기는 커녕 오히려 1979년 11월 아프카니스탄 침공을 단행해 국제사회의 긴장 완화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 여기에 미국, 서독, 캐나다 등 자유진영에서도 소련에 대응해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 불참하면서 국제 정세는 냉전을 이어갔다.

슈미트는 핵의 서독 배치 계획에 대한 국내외 반발에도 불구하고 서독 국민들의 강한 안보 의식, 자신에 대한 높은 신뢰도 등에 기반해 1980년 총선에서 사민당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로써 퍼싱II의 서독 배치에 대한 당위성과 정치적인 추진동력을 갖게 되었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자세를 가진 정치 현인 출현 기대

그 후 1982년 기민당으로 정권이 교체되어 헬무트 콜 총리 시절인 1983년 연방의회의 의결을 거쳐 서독에 퍼싱II가 실전 배치되었다. 정권이 바뀌어도 국가 안보 정책은 지속적으로 일관성 있게 추진된 것이다. 그동안 꿈쩍도 안하던 소련이 퍼싱II 배치에 놀라 위기를 느끼고 양보를 하면서 초강대국간의 긴장이 완화 기조로 돌아섰다. 결국 미국과 소련은 1987년 중거리핵미사일폐기협정(INF)을 체결했다. 이로써 서독을 포함한 서유럽은 소련의 핵 위협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역사는 말한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대의명분만을 앞세워 허풍을 떨거나 ‘거짓 평화 쇼에 속으면 재앙을 맞는다’는 것을. 춘추전국시대 송(宋)나라 양공 때 일이다. 초나라 군사가 송나라를 치기 위해 강을 막 건너오려던 참이었다. 송군 지휘관들은 양공에게 “초군이 강을 건너오기 전에 먼저 초군을 쳐야 한다”고 아뢰었다. 그러나 양공은 “공격을 먼저 하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다”고 거드름을 피웠다. 결국 강을 건너 전열을 정비한 초군에 대패하고 세상의 비웃음만 샀다.

여기에서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 이는 동서양이 마찬가지다. 1938년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독일 히틀러와 평화협정(이른바 뮌헨협정)을 체결하고 “평화가 찾아왔노라”고 환호하고 안심하고 있는 사이에 히틀러는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힘의 균형만이 유일한 대응전략’임을. 평화는 겉치레 ‘평화 쇼’가 아니라 힘으로 지키는 것이다. 국가 안보에 있어서 불필요한 양보나 근거 없는 자만은 위험한 장난이다. 국가 안보는 장미빛 낭만이 아닌 엄중한 현실이다.

서독이 비록 자국 핵이 아닌 미국 핵이었지만 핵에는 핵으로 맞서 승리했다는 점에서 북핵 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리며 경제적 자원과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에서도 앞으로 헬무트 슈미트와 같은 정치 현인이 나와 난마처럼 얽혀 있는 문제들을 해결해 주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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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캐너비스 2019-12-05 15: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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