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제원호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 “과학과 신앙은 충돌이 아닌 상호보완적 관계”
[인터뷰] 제원호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 “과학과 신앙은 충돌이 아닌 상호보완적 관계”
  • 박주연 미래한국 기자
  • 승인 2019.12.04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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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나이 140억년은 창세기 태초의 6일에 해당”

제원호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가 최근(10월) 펴낸 책 <과학, 창세기의 우주를 만나다>(패스오버)는 과학자의 관점에서 성경의 천지창조를 해석한 글이다. 시공간과 빛과 땅을 물리학의 법칙으로 설명하며 성경의 6일 창조와 우주의 나이 140억년과의 시간적 간극을 특수상대성이론으로 좁혀나가는 내용을 담았다.

시간의 창조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빅뱅 이론을 활용한다. “관찰자에 따라 시간의 개념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빅뱅 당시의 온도와 시간의 흐름을 각 창조 날짜별로 시간을 계산했을 때 지구에서는 대략 140억년이 흘렀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오직 엿새만이 지났다는 설명이다.

“초기 우주의 팽창 속도가 오늘날의 우주보다 매우 빨랐다는 것을 앞선 비유에 대입해보면 초기 우주를 빨리 움직이는 기차로, 오늘날의 우주를 기차 밖에 정지해 있는 집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절대적 관찰자의 존재 가능성과 무관하게 초기 우주의 시간은 오늘날 우주(지구)의 시간보다 매우 느리게 흘렀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43쪽)

2014년 11월 개봉해 1000만 관객을 넘긴 할리우드 영화 ‘인터스텔라’를 기억한다면 굳이 신앙인이 아니더라도 흥미롭게 다가갈 수 있다.

주인공 쿠퍼가 생존 위협을 마주한 인류를 구하기 위해 우주여행을 다녀온 뒤 딸을 마주하는 극적인 장면을 떠올리는 이가 있을 것이다. 지구를 떠날 때의 모습과 큰 차이가 없던 쿠퍼와 달리 딸은 임종을 앞둔 할머니가 돼 있는 장면이 압권이다. 우주의 한 행성에 있던 아버지의 1시간은 딸이 있는 지구의 7년과 맞먹었다. 아버지와 딸의 시간이 서로 다르게 흐른 셈이다. 이 장면에는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이 반영돼 있다.

<미래한국>은 최근 서울 관악구 대학 연구실에서 제원호 교수를 만났다. 제 교수는 2011년 미국 고든콘웰신학교에서 목회학 석사 학위를 받은 신학도다. 그는 우주의 나이로 고민하는 이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했다. 특히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고민으로 신앙에서 멀어진 기독교인들을 의식했다고 한다.

교회는 창세기 1장 말씀을 근거로 6일간 세상이 창조됐다고 하고, 학교는 과학자의 연구 결과 우주의 나이가 140억년에 이른다고 말한다. 제 교수는 성경과 과학 지식의 충돌은 기독교인, 특히 지성인과 다음세대가 신앙에서 멀어지게 하는 주요인이 된다고 했다.

제원호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
제원호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

- 사람들은 보통 성경과 과학을 분리해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수님은 쓰신 책 <과학, 창세기의 우주를 만나다>에서 이 두 관계가 서로 보완적이고 조화로운 것으로 보셨습니다.

과학과 신앙의 문제는 오래된 논쟁거리입니다. 예전부터 <미래한국>을 비롯해 여러 매체에 글을 써오면서 관련 생각을 발전시켜오다 재작년 미국에 있을 때 다녔던 교회의 목사님과 이런 내용으로 몇 주 동안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때 저는 시간과 공간, 빛, 소리, 물 이 다섯 가지 주제로 교양강좌를 했는데, 그때의 강연 내용을 책으로 엮어 냈으면 좋겠다는 주변 권유가 있었습니다. 마침 제 강의를 듣던 분들 중 한 분이 출판사를 운영하는 분이었고, 그분이 강하게 출판을 권유하셔서 책을 쓰게 된 것입니다.

관찰자의 입장에 따라 다른 ‘시간’

- 우주의 나이가 140억년인데 이것은 창세기에서 말한 태초로부터 6일에 해당된다는 계산이 흥미로웠습니다. 누구 입장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시간이 다르게 흘러간다고 설명하셨죠.

시간의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극과 극의 생각들, 예를 들면 창조과학이나 유신론적 진화론 등 여러 사람들이 다양한 이론을 주장해왔습니다. 저 역시 믿음을 가진 과학자로서 이런 문제들에 대해 고민을 해왔지요. 제 개인적으로 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우주의 나이가 6000년이라고 하기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많은 현대 과학자들이 받아들이는 빅뱅이론과도 맞지 않는 내용들이 있었기 때문에 저는 과학의 상대론으로 우주의 나이와 성경과의 관계에 접근해 본 것입니다.

결론적인 것은 천동설과 지동설도 결국 누구의 입장에서 보느냐에 달렸다는 것이에요. 상대론이 바로 그런 것이고요. 우리 관점에서 하루는 24시간인데, 성경에도 하루(yom-히브리어로 ‘날’의 의미)라는 단어가 있으니 그때의 하루가 24시간이고 지금도 하루가 24시간이라는 것은 맞다고 받아들여 전제합니다.

왜냐하면 하루라는 같은 단어를 썼으니까요. 만약 ‘긴 시간’ 이렇게 쓰면 굳이 욤(yom)이라고 쓸 필요가 없죠. 창세기 1장 1절의 하루가 오늘의 하루와 같다고 보고 초기의 우주, 빅뱅이라는 시간의 시작이라는 사건을 받아들이면 과학적인 증거로 볼 때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죠. 물론 빅뱅이론이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싫어했어요. 마치 창세기 1장을 증명하는 것처럼 돼 버렸으니까요. 그 전에는 우주관에 있어 ‘시작’이란 게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히 흘러가는 것일 뿐이었죠.

그런데 ‘시작’이 있다고 해버리면 혹시 이게 성경(태초에)과 비슷하게 가는 것 아니냐고 많은 사람들이 싫어했던 것이죠. 그러나 초기 우주의 환경과 지금 우주의 환경은 달라요. 빠르게 팽창하던 초기 우주 상황과 지금은, 물론 지금도 팽창하고 있지만 초기에 비해 속도나 환경이 많이 다른 것을 이해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죠). 그 당시도 하루고 지금도 하루지만, 초기 우주 관찰자와 지금 우주 관찰자가 다른 겁니다. 그 사이 시간의 흐름이 매우 다르다는 거예요.

그 당시 하루가 지금의 하루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당시의 하루를 오늘날의 관찰자에서 느끼는 하루로 해석하면 안 되는 것이죠. 물론 초기 우주 당시에 우리가 있었다면 초기 하루도 지금의 하루와 같겠지만, 우리 관점에서 과거 전혀 달랐던 상황에서의 ‘하루’란 시간을 생각하면 우리가 느끼는 하루가 다르다는 것. 당시는 굉장히 빠르게 흘러가는 하루고, 상대적으로 지금의 하루는 거의 정지 상태라고 보는 것이죠.
 

아인슈타인도 “과학 없는 종교는 장님(Blind)이며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Lame)”라고 말했다. 그만큼과학과 종교는 상호 보완적이다.
아인슈타인도 “과학 없는 종교는 장님(Blind)이며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Lame)”라고 말했다. 그만큼 과학과 종교는 상호 보완적이다.

- 과거의 하루와 현재의 하루라는 것은 ‘하루’이지만 현재 우리 시간 개념으로는 시간의 차이가 엄청나게 큰 것이네요. 특히 성경 창세기에 과학의 포커스를 맞춘 이유가 그것인가요?

가장 중요한 문제가 우주의 나이, 시간의 문제였거든요. 그중 핵심이 되는 것은 창세기 1장에서의 6일이죠. 아담 이후부터 나오는 시간들은 현재까지 다 합쳐도 6000년이고, 빅뱅 이론에 따르면 사람이 생긴 이후부터 우주는 이미 지금의 모습과 비슷한 상황이었던 것이죠.

창세기 6일부터 지금까지 사이의 우주는 큰 차이가 없어요. 가장 큰 차이는 첫날부터 여섯 째 날까지이죠. 우주는 첫날부터 굉장히 빠르게 팽창하면서 확 변했다는 거예요. 성경 전체를 볼 때 시간이 많이 변한 상황은 창세기 1장밖에 없는 것이죠. 그 이후로는 아담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은 거의 같은 거예요.
 

- 성경의 시간을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노력을 하신 것인데,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과학으로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모하다고 말합니다. 성경과 과학은 서로 보완관계라고 하셨는데, 그것으로 현상에 대해 100% 설명이 가능한가요?

과학은 시작점이 보이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죠. 사과가 떨어졌다고 쳐요. 그럼 왜 떨어졌는가, 보이지 않는 법칙들을 찾아가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법칙은 찾을 수 있지만, 그 법칙이 어디서 오느냐는 찾을 수 없고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법칙 자체가 신이라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스티븐 호킹 같은 사람은 ‘성경 창세기의 인격적인 신은 필요 없다, 물리법칙이 신이다’라는 식으로, 과학에서 안 보이는 것들을 찾아가면서 법칙을 발견해 내 그것을 신이라고 얘기하는 것이고요. 성경은 그게 아니라 인격적인 신이 있고, 그 존재가 오늘날 우주만물을 신의 심성이 드러난 모습으로 설명하는 것이죠.

그분이 법칙을 통해 자연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에서 우리가 세 가지 요소를 설명할 수 있잖아요? 어떤 이지적인 부분이 있고, 감정적인 부분이 있고, 의지라는 세 가지 요소가 사람 인격의 세 가지 요소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습니까?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생각이 나오고 사랑 등 감정도 나오고 하나님의 의지적인 부분이라 할 행동도 나오죠. 귀신을 내쫓는다거나 하는 것 말이죠. 세상의 과학자들, 특히 믿지 않는 과학자들은 자연과학 법칙에서 신의 존재를 배제하고 싶은 마음이 강한 것 같아요.

어쨌든 이 분들이 궁극적으로 신이라고 생각하는 자연의 법칙은 제가 보기에는 인격적인 신의 지적인 부분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신의 인격의 이지적인 부분을 나타내는 어떤 법칙들, 말씀들, 지혜들 이런 것들이 나타난 것이고 그런 것들이 자연법칙, 자연을 이루고 있는 요소라는 것입니다. 또 그것뿐만이 아니라 감정적인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인격적인 교류가 가능한 것이 또한 성경의 신이죠. 법칙 자체가 신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하는데, 그것이 창조주인 신의 인격의 모든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성경에 보면 감정을 나눌 수 있고 교류가 가능한, 경험이 가능한 신의 모습이 또 있다는 것, 그런 인격적인 모습이 인간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인간과 교류하고 인간에게 그 모습을 나타내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가를 나타낸 것이니까 신에게는 법칙의 모습도 있지만 인격적인 교류가 가능한 신이라는 것이죠.

제가 책에도 썼지만 10여 년 전 도킨스가 쓴 책 (이기적 유전자)이 나왔을 때 신동아 편집자가 과학자들을 불러 모았어요. 저는 믿는 과학자로서 기독교·천주교 측에서는 저 혼자였고 불교를 믿는 다른 과학자, 소위 수학자 등 여러 분이 모였는데, 저를 제외하고 다른 분들 주장은 자연법칙이 신이라는 생각이었어요.

저도 동의는 했지만 그러나 저는 그 점에 더해 법칙은 신의 인격의 한 부분이 나타난 것이고 그것이 드러난 것이 우주의 모습이고 뿐만 아니라 교류할 수 있는 신이 바로 성경의 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분들은 법칙만 있으면 신은 필요없다며 인격성을 배제했고요. 제가 (과학의 법칙은) 또 다른 신의 인격과 교류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했을 때 다른 분들이 굉장히 반발하더군요.

어쨌든 제 이야기는 성경의 신은 그렇게 위대한 것이고, 법칙도 신의 한 부분이라는 겁니다. 우리 인간도 그렇듯이, 그 점에서 볼 때 성경과 과학을 굳이 나눌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과학의 객관성이나 법칙성은 창조주의 지적인 면이고 우리가 그것을 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게(과학의 객관성이나 법칙성이) 전체는 아니라는 것이죠. 과학은 신의 전체에서 부분만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구원에 대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 대한 것이니까 그 동일한 신이 과학을 기반으로 하는 법칙 또한 우리가 경험할 수 있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더 포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제 교수는 빅뱅이론과 창조론이 근본적으로 맞닿아 있다고 주장한다.
제 교수는 빅뱅이론과 창조론이 근본적으로 맞닿아 있다고 주장한다.

과학과 신앙을 모순으로만 보는 것은 인간의 교만

- 신앙과 과학의 문제가 더 철학적으로 느껴집니다.

100년 전에 상대론이 나오고 시간의 개념이 달라졌습니다. 그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그 당시와 지금의 신의 시간 ‘카이로스’(고대 그리스어 ‘시간’ : 의식적이고 주관적인 시간)와 인간의 시간 ‘크로노스’(고대 그리스어 ‘시간’)에 차이가 있을 수 있겠다고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 실은 100년밖에 안 된다는 것이죠. 과학을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우리가 우주의 시간을 통해서도 굳이 창세기 1장의 ‘하루’를 막연하게 ‘긴 시간’이라고 얘기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성경은 정확하죠. 어떻게 보면 시간의 상대성 의미가 담긴 것이고, 과학적 관측과도 서로 맞을 수 있는 그런 모습이라고 생각할 때 놀라운 일입니다. 제 책에도 썼지만 아인슈타인도 “과학 없는 종교는 장님(Blind)이며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Lame)”라는 얘기를 했어요. 그래서 보완적이라는 겁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가진 과학이나 신앙에 있어 인간중심적으로 생각하다보니 이상하게 왜곡된 모습들이 있는 것이죠. ‘지구가 왜 중심이 되는가’ 천동설은 단지 하나의 자기 생각에 불과할 뿐이거든요. 지구가 온 우주의 중심이 돼야 한다는 생각은 성경적이지도 않고 물론 과학적이지도 않은 것이에요.

신앙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 것이죠. 과학도 내 관점에서 생각하니까 오류가 나타납니다. ‘그럼 하나님의 관점에서 시간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 점에서 우리가 하나의 관점으로 접근하면 과학과 신앙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사람들이 어떻게 바라볼지 모르겠지만 어떻든 시간의 상대론으로 우주의 나이를 봤을 때 (성경의 시간과) 모순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에요. 이것을 제가 완벽하게 증명했다고 말하기보다는 이런 과학의 발전에서 시간의 개념, 관점을 과학이 제공했을 때, 그런 관점이 성경을 이해하는 데 모순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죠. 인간으로서 한계가 있는 우리가 무조건 모순으로만 보고 그 둘(과학과 신학)을 갈라놓으려 하고 신을 성경 안에만 갇힌 존재로 만들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교만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 볼 때 생각보다는 가벼운 인문학 서적으로도 읽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책을 그렇게 쓴 이유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21세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앞으로 더 영적인 세계, 보이지 않는 것에 관심을 쏟게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미래에 대한 불안이 늘면서 신이 아니면 채울 수 없는 부분을 다른 것들로 채워오면서 영혼을 채우려는 갈급함이 더 커질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신앙을 갖고 있느냐의 유무와 상관없이 모두가 보이는 세계에만 국한하려는 습성이 있는데 그렇게 하면 인생에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게 됩니다. 살면서 어떤 상황을 맞아 보이는 것으로만 설명하려면 납득하기 어려워지고 그러다 보면 과연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그리고 존재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낙심하게 되고요.

이런 생각의 한계 속에 갇히다 보면 내릴 수 있는 결론이란 ‘아, 신은 없구나, 혹시 있는지 모르지만 나하고는 상관없구나, 신은 나에게 관심이 없구나, 그런 신을 내가 굳이 믿을 필요가 있느냐’ 이런 결론으로 가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이는 세계(물질)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저는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생각을 열어주고 싶은 마음이 강했습니다.

이 책은 보이는 세계에서 시작했지만, 시간에 대해서도 보이는 물질적인 시간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시간을 얘기했죠. 하늘과 땅도 보이는 하늘과 보이지 않는 하늘, 땅 즉 공간의 문제도 마찬가지고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빛을 볼 때도 빛만 보는 게 아니라 담긴 영혼을 볼 수 있도록 말이에요.

이 책을 통해 창세기 1장 1절에서 3절까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동시에 있는 것,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오해가 있을 수 있는데 그 부분을 성경적으로 분명히 해주면 보이는 세계도 더 잘 이해가 될 수 있고요. 연결돼 있으니까요. 이 땅을 사는 데 더 온존하게 살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죠.
 

- 그렇다면 교수님은 과학자로서 신앙인으로서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내적 충돌, 갈등이 없으셨나요?

저는 한 번도 신의 존재를 의심해 본 적이 없어요. 어릴 때는 믿지 않는, 그냥 나쁜 짓 하지 않고 열심히 살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살던 평범한 사람이었다가 대학 1학년 때 어머니 손에 이끌려 우연히 교회에 나간 뒤, 하나님 입장에서는 뜻하신 대로, 교회에 나간 이후부터는 하나님에 대한 의심은 한 번도 하지 않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제 입장에서 과학은 더 열심히 알아야 하는 것이었지요. 지금은 더 가까워지기를 원하고요. (하나님을 믿으면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이해가 더 넓어지고 사람을 대할 때도 그 사람의 영혼을 인식하게 됐습니다.

이런 것들에 관해서 다음 세대를 위해 꼭 전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이죠. 사람들은 논문 쓰기도 바쁜데 책은 언제 쓰냐고 했지만, 결국 쓰게 돼서 이 책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교보문고 서평을 쓴 것을 보면 독자들이 ‘이런 책이 미리 나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글도 보게 되어 반갑고요. 각자 인생에서 세계관을 융합하고 균형을 잡는 데 책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융화와 교류를 말씀하시니 문득 궁금해집니다. 지금 세상은 하나님과 잘 교류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태초부터 하나님은 변한 게 없어요. 그러나 사람은 변하죠.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게 있는데 실체보다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고 물질적인 것으로 채우다 보니 해결이 안 되어 더 그쪽으로 빠지든가 아니면 포기하는 상황입니다. 우리나라는 너무 잘 살고 있어요. 교회도 그렇고요. 지금은 그렇게만 살아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는 시대가 아닌가 싶어요.

그러다 보니 교회에서 온전한 기도가 사라지게 되고, 민족적으로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고요. 내 안에 영적인 공간이 있잖아요? 성령이 아니라 이 세상의 것으로 채워져 있을 때가 문제이죠. 실상을 보려면 영적인 눈이 떠지지 않으면 계속 방황하게 됩니다.
 

21세기 불확실성의 시대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감을 잡아 하나님의 모습을 부분적으로나마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 교회 안에서도 육적으로 사는 사람들, 육과 영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이 하나의 시작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기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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