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100주년] 3·1 운동과 33인 민족대표의 ‘독립 통고서’
[임시정부 100주년] 3·1 운동과 33인 민족대표의 ‘독립 통고서’
  • 박명수 미래한국 편집위원·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 승인 2019.12.04 10: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민족대표 33인인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하는 모습(기록화)
민족대표 33인인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하는 모습(기록화)

3·1운동의 절정은 1919년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최남선이 작성하고,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서이다. 그 이후 한국사회는 3·1 독립운동을 기념하면서 이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하지만 최남선이 작성한 문서에는 독립선언서 외에도 일본과 미국 및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독립통고서가 있다. 이것 역시 민족대표 33인의 서명이 첨부되어 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본격적으로 이뤄진 독립운동은 처음에는 독립청원운동으로 시작되었다. 1918년 11월 11일 독일이 항복한 다음, 미국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새로운 국제질서로 등장하는 시점에서 미국에 있던 대한인국민회와 중국 상해에 있던 신한청년당은 각각 미국의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했다. 이것을 계승해 1919년 2월에 일어난 일본의 2·8독립운동은 청원서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만들어 발표했다. 2·8독립운동은 기존의 방식을 바꿔 먼저 일본을 향해 독립을 선포하고 이것을 국제사회에 알려 승인을 받으려고 했다.

1919년 3·1운동은 이런 맥락에서 이뤄졌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소식을 들은 천도교 지도자들은 국제사회에 독립을 청원하기로 하고, 이것을 위해 독립선언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독립청원과 선언서를 최남선에게 작성하도록 했다. 하지만 천도교는 자신들의 힘으로만 이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기독교와 손을 잡았다.

기독교는 별도로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었고 이들은 청원서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었다. 독립선언을 위해서는 많은 사람이 동원되어야 하고, 여기에는 희생이 따르는 반면, 청원서는 그런 대중 동원이 필요 없고, 민족지도자들의 서명만 받으면 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기독교는 천도교의 입장에 동의했다. (하지만 일부 기독교 인사들 가운데는 여기에 반대해서 서명에 참여하지 않기도 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대중들과 함께 독립선언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에 독립을 통고하고, 국제사회에 독립을 청원하기로 한 것이다.

천도교는 일찍이 최남선에게 독립선언서와 청원서를 작성하도록 부탁했다. 그리하여 최남선은 독립선언서 외에 일본 정부와 의회, 미국의 윌슨 대통령 그리고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3개의 문서를 따로 작성했다(최린, 신문조서, 대정 8년 4월 7일). 최남선이 33인의 명의로 작성한 통고문은 기미독립선언서와 함께 매우 중요한 문서임으로 소개하려고 한다. (현재 최남선이 윌슨과 파리회의에 보내는 청원서는 발굴되고 있지 않고 있다.)

원래 최남선은“합병이래의 사정”이라는 제목 아래 이 문서를 작성했지만 임규가 일본 정부와 귀족원 및 중의원에 제출하면서 통고문이라고 표제를 붙였다(최남선, 신문조서(제2회), 대정 8년 9월 2일). 이것은 일본에 독립을 청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독립을 선언한 것을 통고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조선총독부는 이 청원서(통고문)를 독립선언서와 함께 3·1운동의 핵심문서로 취급했다. 그리해서 3·1운동 직후 여기에 관련된 사람들을 체포해 조사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손병희 외 361명의 죄목을 “조선독립선언서 및 청원서에 관련된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사건”이라고 명명하였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집 11권 참조). 이것은 일본이 독립선언서 및 청원서를 같은 비중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면 이 일본 정부에 보내는 통고문에 담긴 민족 대표의 주장은 무엇인가?
 

국내의 독립의지 세계 전파가 필요

1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의 절정은 역시 1919년 3월 1일 일어난 3·1운동이며 그 핵심은 기미독립선언서였다. 우리가 이미 살펴 본 것처럼 독일의 항복 이후 미국, 동경, 상해의 기독교인이 중심이 된 교포들이 우리 민족의 대표를 선정하고 각종 청원서 및 독립선언서를 미국 및 국제사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이 같은 활동은 한계가 있다. 그것은 조선의 독립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국내에 있는 2000만 한국인들이 독립을 원한다는 분명한 의사를 표시하는 일이었다.

당시 일본은 자신들의 식민지 정책에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만족하고 있다고 선전했다. 그리고 해외 조선 사람들의 청원서는 국내 사정을 잘 모르는 해외 한인들의 잘못된 견해라고 공격했다. 따라서 해외의 민족 대표들이 국제사회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국내에서 전 국민의 뜻을 온 세상에 알리는 일이며 이 같은 일을 할 것을 국내에 전했다. 그래서 이미 미국의 이승만과 대한인국민회, 중국의 신한청년당 그리고 일본의 조선독립청년단은 국내에 연락을 해서 대규모의 독립운동을 일으킬 것을 요청했다.

국내의 독립운동은 주로 네 단체에 의해 시도되었다. 첫 번째는 이승훈을 비롯한 평안도 장로교세력이다. 이들은 일찍이 선교사들을 통해 국제 정세를 알고 있었고 1919년 9월 장로교 총회가 평북 선천에서 열렸을 때 상해선인교회의 여운형과 피치와 접촉하고 있었다. 그 후 신한청년당의 선우혁을 중심으로 보다 구체적인 접촉이 이뤄지고 선우혁은 길선주 등 기독교 지도자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논의하고 있었다. 두 번째는 박희도를 비롯한 서울 감리교와 학생세력이었다.

박희도는 정춘수를 비롯한 감리교 그룹과 연락하는 한편 자신이 속해있는 YMCA를 통해 학생들과 접촉하고 있었다. 세 번째는 천도교 세력이다. 일본의 유학생들로부터 소식을 들은 최린은 이 소식을 손병희에게 알렸고, 그는 이미 기독교가 독립운동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천도교도 참여할 것을 결정했다. 그리고 최린은 최남선의 권고에 따라 이승훈과 상의해 함께 거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네 번째는 불교세력이다. 하지만 불교는 집단적으로 참여하지는 못했다.

이렇게 형성된 민족 대표들이 1919년 3월 1일 발표한 것이 바로 기미독립선언서이다. 기미독립선언서는 손병희의 측근이며 3·1운동의 실무를 담당하던 최린의 부탁으로 최남선이 작성했다. 최남선은 당시 서양문물과 전통학문을 겸비한 문재(文才)였다. 최남선은 원래 천도교와 가까운 사람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는 천도교가 독립운동을 일으키려 했을 때 송진우와 함께 기독교와 같이 이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제언했던 사람이다.

그는 국제 정세를 알고 있었고, 기독교의 도움이 없이는 이 일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독립운동을 준비하는 천도교 측 인사인 최린에게 이미 기독교인들이 이 일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고 최린은 손병희에게 만일 천도교가 여기에 가담하지 않으면 천도교는 민족종교로서 간주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해방 후 최남선은 전택부와의 대담에서 기미독립선언서는 기독교적인 정신에 의해 작성된 것이라고 고백했다.

이승훈은 원래부터 최남선을 알고 있었다. 이승훈은 최남선을 만난 다음에 천도교와 함께 하려고 했다. 그리고 최남선의 안내로 이승훈은 최린을 만나게 되었고 여기에서 이들은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최남선은 비록 당시에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지만 당시의 국제 정세를 잘 알고 있었고 기독교와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있었다.
 

박명수 미래한국 편집위원·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박명수 미래한국 편집위원·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민족과 개인의 독립이 핵심

기미독립선언서의 핵심은 선언서 첫 줄에 잘 표현되어 있다. 여기에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핵심인 민족의 독립과 민주주의적인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여기에서 이 선언서는 두 가지를 선언하고 있다.

하나는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조선인은 자주민이라는 것이다. “독립국”이란 조선은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나라가 아니라 독립주권을 가진 국가라는 것을 말하며, “자주민”이란 조선인은 더 이상 전근대적인 신민(臣民)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주적은 판단을 할 수 있는 근대적인 시민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기미독립선언서는 일본을 향해 독립을 주장하는 문서를 넘어 근대 시민국가를 만들려는 민주공화국의 선언서인 것이다.

기미독립선언서는 이런 새로운 세계사에 새로운 흐름 가운데 등장하는 것이다. “아아, 新天地(신천지)가 眼前(안전)에 展開(전개)되도다. 威力(위력)의 時代(시대)가 去(거)하고 道義(도의)의 시대(時代)가 來(내)하도다.” 이것은 기미독립선언서가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국제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과거 힘이 지배하는 제국주의 시대가 지나가고 각 개인이나 각 민족의 고유성을 존중하는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일본이 힘으로 우리를 침략해 식민지로 삼은 것은 “구시대의 유물”이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민족의 가장 중요한 당면 과제는 민족의 독립과 개인의 자유를 확실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지난 날의 억울함과 현재의 고통, 그리고 미래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개개인의 인격과 국가의 체면을 지키고, 자손의 미래를 위해 해야 할 “最大急務(최대급무)가 民族的(민족적) 獨立(독립)을 確實(확실)케 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기미독립선언서는 우리가 왜 독립해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국가라는 공동체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개개인이 인격을 갖고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금 독립국과 자주민은 서로 상보하고 있는 것이다.
 

국제 정세를 정확히 파악했던 기미독립선언서

이제 우리의 가장 큰 과제는 남을 비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데 있다. 이 독립선언서는 일본이 우리 민족에게 행한 잘못된 일들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있다. 일본은 여러 번 우리 민족을 속였으며,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무시해 야만인으로 취급했고, 그들의 잘못을 은폐하기 위해 각종 통계를 조작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것인 이런 일본과 싸워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데 매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所任(소임)은 다만 自己(자기)의 建設(건설)이 有(유)할 뿐이오, 決(결)코 他(타)의 破壞(파괴)에 在(재)치 안이하도다.” 여기에서 말하는 국가는 당연히 민주국가이며, 이것은 비폭력적이며, 평화적이 되어야 한다. 독립이 일제와의 투쟁이라면 새로운 국가의 건설은 우리 내부와의 투쟁이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결국 세계 평화를 위한 것이다. 다시는 전쟁이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주장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미독립선언서는 조선의 독립은 아세아의 평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본의 조선 지배는 조선인을 원한의 구덩이에 들어가게 하였으나 조선의 독립은 양국의 관계를 정상적으로 회복하게 할 것이며, 현재 중국은 일본의 침략을 염려하여 “危懼(위구)와 猜疑(시의)를 갈스록 濃厚(농후)”케 되어 가고 있으니 조선의 독립은 이것을 해소하여 “東洋(동양)의 永久(영구)한 平和(평화)를 保障(보장)”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결국 조선의 독립은 일본과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평화에 기여할 것이다.

우리가 이 기미독립선언서를 살펴보면 이것은 전 세계를 향하여 우리 민족의 독립을 외칠 뿐만이 아니라 “此(차)로써 子孫萬代(자손만대)에 誥(고)하야 民族自存(민족자존)의 正權(정권)을 永有(영유)케 하노라.”고 되어 있다. 이 독립선언서는 한편으로는 세계만방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일본에서 독립하며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후손들에게 앞으로 우리 민족이 지향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여 인류의 평화에 기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기미독립선언서는 세계만방에 우리의 자주독립을 선언하는 동시에 앞으로 이 나라를 이끌어 갈 후손들에게 한국인이 지향해야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말해 주는 것이다.

같은 각종 청원서와 선언서에 나타난 국가 건설에 대한 생각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세계는 미국 중심의 민주주의의 새로운 질서에 들어서고 있다는 점, 둘째, 일본은 이런 민주적인 질서에 맞는 국가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 셋째, 한국은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가들을 모방해서 새로운 국제 질서에 맞는 국가를 건설하려고 한다는 점, 넷째, 새로운 정부는 개인의 인권을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될 것이라는 점, 다섯째, 이런 나라는 세계 평화에 기여할 것이라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국가를 만드는 데 있어서 기독교정신이 기초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