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뷰 -미래한국 공동기획] 어린이 문학에 스며든 ‘이념적 전복’Ideological Subversivism
[월드뷰 -미래한국 공동기획] 어린이 문학에 스며든 ‘이념적 전복’Ideological Subversivism
  • 현은자 성균관대 아동학과 교수
  • 승인 2019.12.19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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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슬란은 네 명의 아이들에게 왕관을 씌워 주었습니다. 그리고 귀청이 떨어질 만큼 기쁨에 넘친 함성 소리 속에서 네 아이들을 왕좌로 이끌었습니다. “피터 왕 만세! 수잔 왕 만세! 에드먼드 왕 만세! 루시 여왕 만세!”

아슬란이 말했습니다. “나니아에서는 한 번 왕이 된 사람은 언제나 왕이다. 그 사실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해 두어야 하느니라” (C.S. Lewis 의 <사자, 마녀, 옷장>)

문명사회에서 어린이가 읽는 텍스트는 삶의 규범과 가치를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해왔다. 물론 이것이 항상 성공했던 것은 아니지만 어린이들은 그들을 위해 쓰인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그 사회가 그들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인문학적 용어를 빌린다면 그것은 ‘인간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그러나 최근 서구의 어린이 문학계에서는 프로이드(Sigmund Freud, 1856-1939) 심리학과 프랑크푸르트학파에 영향을 받은 문학 이론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 어린이 문학의 출발과 그 연구의 역사가 짧은 탓에 국내의 어린이 문학 연구는 그동안 서구의 연구에 크게 의존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국내 연구에서도 어린이 문학의 전통적인 교육적 가치에 관련한 논의는 힘을 잃고 그 대신 유럽과 구미에서 들어온 카니발 이론, 퀴어 이론, 헤게모니 이론 등이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러한 이론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단어 중 하나는 ‘전복’이다. 이는 문화 이론에서 즐겨 사용하는 정치, 사회적인 용어로서 기존의 권위, 질서를 뒤엎는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들은 어린이 문학은 어린이를 향한 성인의 작품으로서 태생적으로 성인과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그들은 성인은 힘 있는 자의 편에, 어린이는 힘 없는 자의 편에 놓고, 어린이 문학은 어린이들이 성인들의 지휘권 안에 머무르도록 하는 목적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들의 비평은 어린이 문학 안에 숨겨진 권력구조를 밝혀내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그들에 따르면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가설은 모든 어린이 텍스트에 스며 있다. 예컨대 캐나다 위니펙대학의 교수이자 어린이문학평론가인 페리 노들만은 <어린이 문학의 즐거움(Pleasures of children’s literature)>(2001)에서 0-2세 영아들을 위해 만들어지는 그림책은 밝고 깔끔한 이미지만을 보여줘 이 세상이 흠 없고 완벽한 세상이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더 나이든 아이들을 위한 정보책들은 이 세상이 희망에 가득 차고 질서 있고 합리적인 세상이라고 믿도록 설득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은자 성균관대 아동학과 교수
현은자 성균관대 아동학과 교수

‘전복의 이데을로기’를 가르치는 어린이 문학

픽션에 숨겨진 문학적 전략을 파헤치기 위해 그들은 좀 더 정교한 이론을 사용한다. 호주 맥콰리 대학의 영어과 교수인 존 스테판스(John Stephens)는 <남성이 되는 길(Ways of being males)>(2002)이라는 편저(編著)에서 헤게모니 이론에 기초해 픽션에 등장하는 남아 등장인물이 어떻게 남성이라는 ‘사회적 성’으로 키워지는가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뤘다.

또한 스웨덴의 스톡홀름 대학 비교문학과 교수와 국제 아동문학연구협회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영국 케임브리지 사범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마리아 니콜라예바(Maria Nikolajeva, 1952~)는 그의 책 <어린이 문학에 나타난 힘과 목소리, 주관성(Power, voice and subjectivity in literature for young readers)>(2010)에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어린이 텍스트를 들어 그 안에 숨겨진 ‘전복적’ 성격을 본격적으로 논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말괄량이 소녀의 기발한 상상과 놀이를 그린 아스트리드 린드그렌(1907-2002)의 <삐삐 롱스타킹>을 평론하면서 그 소녀의 행동이 카니발레스크(carnivalesque)를 보여준다고 극찬하고 있다.

카니발레스크란 러시아 문학 비평가인 바흐친이 사용한 용어로서 전통적인 문학 정전의 권위적이거나 고답적인 가정들을 우스꽝스러운 유머나 무질서를 통해 의도적으로 전복시키거나 해방시키는 문학 양식이다. 즉 이 작품은 실세계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방법으로 어린이에게 권력을 부여해 주고 현존하는 질서와 권력 구조에 질문을 던짐으로써 이 사회를 변혁할 거대한 파괴적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는 어린이들이 판타지 세계를 떠나 현실의 세계로 돌아와 기존의 질서에 합류하는 작품에는 실망감을 감추지 않는다. 예를 들어 주인공 도로시가 두 명의 사악한 마녀와 싸워 이긴 후 캔사스 집으로 돌아오는 <오즈의 마법사>와 네 명의 아이들이 나니아 왕국에서 왕과 여왕으로 다스리다가 영국으로 돌아오는 <나니아 연대기>의 결말은 어린이가 기존의 사회 질서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여주므로 여전히 그들을 교육시키고 사회화시키는 본래의 목적을 드러낸다고 비판한다. 나니아 연대기는 기독인들에게 잘 알려진 텍스트이므로 그 평론을 인용해보기로 한다.

“피터와 그의 형제들은 나니아의 중세 시대에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면서 결국에 왕위에 오르지만, 왕의 자리는 일시적일 뿐이다. 주인공들은 나니아에서 오랜 기간 행복하게 지낸 후, 자신들이 있었던 원래의 세계로 되돌아오며 이 때 다시 어린이의 모습이 된다. 또한 나니아에서 얻었던 힘 뿐만 아니라 그들이 얻은 지혜도 모두 사라진다. 후속편에서도 나니아는 성인 통치자(예외 없이 남성임)를 둔 보편적 질서로 돌아오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나니아에서 아슬란에 의해 왕위에 오른 첫 번째 왕은 성인이었는데, 그들은 <마법사의 조카>에 등장하는 프랭크라는 마부였다.” (pp. 68-69)

그가 이 작품에 대해 드러내는 실망감과 비판은 저자인 C.S. 루이스와 그의 기독교 세계관을 이해하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터무니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글의 서두에 인용하였듯이 나니아에 다녀온 아이들에게는 영원히 나니아의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대중문화 비평가인 컬트 브루너(Kurt D. Bruner)와 짐 웨어(Jim Ware)는 <나니아에서 만난 하나님> (2005)에서 이 부분의 해석을 돕기 위해 시편을 인용한다.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으니(시 8: 5-6).”

이상의 논의는 이데올로기 이론의 문제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명확히 드러낸다. 그들은 작가의 의도를 존중하거나 작품 자체를 총체적으로 해석하려고 하지 않고 정치적 텍스트로서 읽으려 한다. C.S. 루이스의 용어를 빈다면 이러한 읽기 태도는 텍스트를 존중하거나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에 맞게 ‘이용’하는 것에 가깝다. 니콜라예바(Nikolaeva)는 <나니아 연대기> 외에도 G. P. 테일러의 <섀도우맨서: 천사들의 전쟁>과 같은 기독교적 텍스트들에 대해서도 드러내놓고 반감을 표시하는데 그 이유는 높은 권력을 상징하는 성인 남성이 어린이로부터 자유 의지와 독립심을 빼앗고 복종과 신의를 요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교회는 언제나 문학이 갖는 힘을 알고 있었다고 꼬집는다.
 

어린이 문학 속의 기독교적 세계관 파괴

이렇듯 어린이 문학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접근은 어린이 문학 또한 정치적 사회적 산물로 보고 어린이와 성인 간의 권력구조를 확인하거나 혹은 부정하기 위해 그 작품이 사용한 서사적 전략을 탐색하고 분석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어떤 작품에서 전복의 목소리를 발견하게 되면 더없이 기뻐하고 축하한다. 그런데 그들의 목적은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어린이 안에 있는 풍부한 상상력과 전복적인 에너지를 일깨워 사회 변혁을 위한 행동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렇듯 어린이 문학을 성인과 어린이의 힘의 관계로만 해석하려는 태도는 어린이 문학을 이념의 장으로 변질시키는 한편 그것의 본질과 가치를 도외시할 수 있으므로 매우 위험하다. 이데올로기 학자들이 주장하듯 성인이 어린이에 비해 우월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인에게 부여된 힘은 어린이들을 착취하고 억압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지식과 경험을 가진 자로서 그들을 잘 양육하고 더 좋은 인간이 되도록 행사되는 것이며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한다. 어린이 문학의 가치는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이자 작가인 미야자키 하야오가 말한, “어린이 문학이란 ‘태어나길 정말 잘 했다’ 하고 아이들에게 응원을 보내는 것이다”로 요약할 수 있다(그의 추천도서 목록인 <책으로 가는 길> (2013)의 서문에서 발췌).

그러나 오늘날의 다원주의 사회에서 상식적 차원에서의 논의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어설프게 접근했다가는 그들 나름의 탄탄한 이론 체계와 방법론에 부딪혀 곧 한계를 드러내고 배척당하기 십상이다. 특히 기독 비평가들에게는 도덕주의자라는 딱지가 붙여지기 쉽다. 따라서 그 어느 때보다도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하되 정교한 이론 체계를 갖추는 것이 시급하다. 거룩하고 초월적이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기독 공동체에 부여된 책무는 어린이 문학 연구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의 학계와 비평계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 이론 앞에서 기독인들은 종종 위축되곤 한다. 그러나 기쁜 소식도 있다. 우리에게는 구름처럼 둘러싼 허다한 신앙의 선배(히 12:1)들이 남겨놓은 풍부한 지적이며 영적인 유산이 있으며 지금도 각자의 학문 영역에서 하나님 자녀의 소명을 다하고자 분투하는 기독 언론인, 법률가, 교사, 목사 등 많은 지성인들이 있다. 그리고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이 계시다.

우리는 신앙 공동체의 지체(肢體)로서 대화와 협력을 통해 통합적이며 학제적 연구를 실천할 수 있으며 서로의 통찰을 나눠 각자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세우고 미래를 향한 매력적인 비전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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