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미래한국 발행인 내려놓고 정계 입문하는 김범수 용인발전소 대표
[인터뷰] 미래한국 발행인 내려놓고 정계 입문하는 김범수 용인발전소 대표
  • 인터뷰 이근미 소설가·미래한국 9기 편집위원
  • 승인 2019.12.19 10: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민의 자유와 인권 재산을 지키는 정치 하겠다”

인구 107만의 용인시에 파란을 일으키고 있는 화제의 인물이 있다. 용인발전소의 김범수 대표가 그 주인공. 지난 9월말  용인시 시민들의 자발적인 연대로 결성된 용인동백 세브란스 의료산단 추진 1만명 서명 발대식을 이끈 이는 바로 김범수 대표였다.

IT허브가 될 수 있는 네이버 데이터센터를 놓치고 이제는 아시아 최대 의료허브를 꿈꾸는 용인동백 의료산단 마저 포기하려는 용인시의 무책임한 시정에 맞서 일어선 시민운동이었다.

의료산단 문제는 동단위로는 전국 최대 인구인 동백의 교통난을 해결할 방안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이 운동에 민주당과 정의당 시도의원 전원과 당원들도 함께 힘을 합쳤다.

김범수 용인발전소 대표
김범수 용인발전소 대표

“한국당 당협위원장인 제가 주도했지만 정파를 초월해 모두가 힘을 합친 한국 지자체사의 드문 협치였어요. 이런 것이 진짜 정치고 풀뿌리 민주주의죠.” 김범수 대표의 말이다.

이로부터 한 달 후 김범수 대표가 당협위원장으로 있던 용인정 지역구의 현직 의원인 표창원 민주당 의원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지역 주민들에게 ‘죄송하다’고 말했다.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화제가 됐다. 김범수 위원장은 “반드시 주민들의 힘으로 아시아 최대 의료허브산단을 지켜 내겠다”고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사는 곳에서부터 행복할 수 있어야죠. 정치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민들의 의사가 대의되어서 그 뜻을 국정에 반영하는 것이 주권재민의 원리죠. 정치라는 것의 본질이 시민의 자유와 인권, 그리고 재산을 국가로부터 보호하는 임무라 생각하는 정치인들이 너무 없습니다. 국민이 주인이라는 이 원칙을 우리는 너무 소홀히 해서 결국 여당이든 야당이든 그들만의 기득권 정치를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차세대 정치인으로 그 출발선을 성공적으로 끊어낸 김범수 대표는 언론인이면서 동시에 정책전문가다. 그는 미래한국과 세이브NK를 통해 한국사회에 정책을 제시하고 북한인권 운동을 펼쳐왔다. 이제는 미래한국 발행인 자리를 내려놓고 역동적인 용인시와 함께 도약하겠다는 꿈을 품은 김범수 대표. 정책전문 언론인이자 시민사회 활동가로서 20년간 쌓은 경험을 현장에서 펼치기 위해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2003년 광화문 애국집회에서 만난 20대 기자

2003년 3월 김범수 기자와 거리에서 만났던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는 처음으로 우파의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 시인을 계기로 애국시민단체들을 규합해 해방정국 이후 최초의 대규모 보수집회로 평가받는 시청 앞 ‘반핵반김 자유대회’가 열렸던 것이다.

거대한 태극기와 성조기, 반핵반김 구호, 엄청난 인파는 이전까지 볼 수 없던 것이었고 미국 뉴욕타임스는 이를 두고 ‘역대 최대 규모 보수 집회’라고 보도했다. 이 집회를 미래한국이라는 생소한 언론사가 주최했고 나라 걱정으로 아스팔트로 몰려나온 참석자들은 대개 60대 이상 고령자들이었다. 그 집회에 취재차 갔다가 만난 20대의 그가 당시 반핵반김 집회 실무 담당이었는 점, 미국 아이비리그 출신이 신생 매체에서 일한다는 점 등 여러 면에서 놀라움을 안겨줬다.

그날의 만남을 계기로 미래한국 ‘커리어이야기’라는 코너에 소설가로서 소개되었던 나는 김범수 기자가 주도한 젊은 전문가 클럽에 초대되어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다. 김 기자와 어느 정도 친밀감을 쌓았을 때 미국 아이비리그 출신이 박봉과 격무를 아랑곳하지 않고 미래한국에서 일하는 연유를 물어보았다. “메이저 신문에 충분히 갈 수 있을 텐데”라고 하자 그는 “세이브NK를 통한 탈북민 돕기 운동과 우리 사회에 진정한 보수의 가치와 정신을 알리는 미래한국에서 일하는 게 만족스럽다”고 했다.

김 기자는 그 시절 중국과 북한의 접경지역에 가서 탈북자 구출하는 일과 북한 내부로 카메라를 들여보내 공개처형 하는 장면을 건져 특종을 하기도 했다. 세이브NK는 그간 1500여 명의 탈북자를 구출했는데 그 가운데 김 기자가 데려온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

“지금은 그렇게까지 못할 것 같은데 그때는 20,30대였으니 겁이 없었어요. 국경지역에서 만난 탈북자들은 강아지처럼 부들부들 떨었어요. 북한 당국에 잡히면 그대로 죽음이니 사람 발자국 소리만 들려도 공포감과 정신적 쇼크로 경련을 일으킨 거죠. 그런 분들을 만나서 따뜻하게 위로해드리고 구출하는 일에 보람을 느꼈습니다.”

세이브NK에 탈북자 인터뷰 주선을 요청하는 주요 언론들도 적지 않았다. 세이브NK에서 주도하여 1180만 명이 서명한 ‘탈북난민보호를 위한 UN 청원 운동’에도 참여했고 서명지를 미국 유엔본부와 유럽의회 등에 전달하는 일에도 함께 했다. 2001년 완료돼 국제 관계기관에 전달된 1천만명 서명은 이듬해부터 유엔에서 통과된 북한인권 결의안과 미 의회 북한인권법, 그리고 국내외에서의 탈북난민 문제의 이슈화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아이비리그 출신의 북한인권운동가

펜실베니아대학(유펜) 인류학과를 졸업할 때 김일성 신화에 대한 논문을 썼던지라 북한 문제에 더 관심이 많았다.

“잠들 때 꾸는 꿈이 개인의 욕망과 지향을 드러낸다면 신화는 국가의 무의식과 목표를 드러냅니다. 김일성이 신화를 어떻게 활용해서 북한 주민을 통치하는지 관심이 생겼어요. 영웅신화의 패턴은 어린 시절 집을 떠나 죽을 만큼 고생을 하다가 영웅이 되어 돌아온다는 겁니다. 김일성 신화도 이 패턴에 그대로 들어맞아요. 김일성은 고향을 떠나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고 해방 이후 귀국해 권력을 잡고 신화를 만들어 우민화 정책을 폅니다.”

2003년 미래한국이 주관한 역대 최대 규모의‘ 반핵반김’ 보수 집회. 연설 중인 고 김상철 미래한국 회장 앞에 행사실무를 담당했던 20대의 김범수 기자 모습이 보인다.

그는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인턴으로 일할 데를 찾다가 세이브NK와 연결되었다.

“한인사회내 지인으로부터 김상철 변호사를 소개받았고 1999년 여름 서울에서 김 변호사님이 주도하던 한미우호협회와 세이브NK에서 인턴으로 활동했어요. 나중에 롤모델로 생각했던 김상철 회장님에게 결혼 주례를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제 장인이 되셨죠.”

인턴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예일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을 공부했다.

“인류학이 세상의 작동원리와 배경, 문화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라면 국제관계학은 현대 국가사회에서의 시스템을 공부하는 겁니다. 나라끼리 주고받는 관계의 원리를 연구하는 거죠. 어릴 때부터 장차 무엇을 하면 좋을까 생각을 했을 때 정치가 세상에 영향을 많이 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공직자를 꿈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국제정치와 안보에 대해 공부하면서 많은 걸 배웠습니다.”

예일대학원을 마칠 즈음 진로에 대해 고민하다가 정치 사회 북한 문제 등과 연결해 일할 수 있는 기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귀국하여 김상철 변호사에게 인사를 하러 왔다가 미래한국에 눌러앉게 되었다.

“앞으로 계획을 물으시길래 기자 얘기를 하자 김 변호사께서 미래한국을 창간할 거라며 함께 하자고 제안하셨어요. 큰 신문사나 방송사를 생각했지만 제가 롤모델로 생각하는 분이 제안하실 때 아직 창간도 하지 않은 미래한국이 크게 다가왔고 저만 아는 보물을 발견했다고 생각했죠.”

미래한국은 2002년 1000여명의 발기인과 주주들의 후원 아래 순조롭게 출발했다. 건강한 보수의 가치,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가치를 담은 기사들을 기획하고 발굴해나갔다. 독자들의 반응도 긍정적이었다. 차원이 다른 뉴스, 대안을 제시하는 칼럼, 시대를 앞선 분석으로 호평을 받으면서 정책전문 매체로서 자리를 잡아 나갔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념 편향의 무리한 정책들이 연달아 나오면서 미래한국은 방향을 재정비해야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의 핵개발 의혹에 대해 “그럴 리 없다”라고 한 데 이어, 노무현 대통령은 북한 핵에 대해 “일 리가 있다”고 했다.

미래한국은 북한 동향과 국제 정세를 면밀히 분석한 결과, 북핵 문제는 ‘북한 정권 교체’외에는 해결 방안이 없다고 판단했다. 대화는 북한의 전술에 말려들어가는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다각도로 게재하면서 종북 논란을 보도하고 국보법 폐지 기도에 쐐기를 박았다.

정곡을 찌르는 강력한 대안을 제시하는 정책정론지에 김범수 기자는 다양한 기사를 게재하면서 동시에 열과 성을 다해 세이브NK 활동을 펼쳐나갔다. 하지만 소위 보수와 진보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당시 그러한 활동은 이념지향으로 왜곡되기도 했고 그는 2006년 재충전을 위해 하버드대학으로 떠났다.
 

미래한국을 맡다

2008년 말 공부를 마치고 그는 학계 등 잠시 다른 진로를 모색하기도 했지만 미래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미래한국과 함께 세이브NK(구 탈북난민보호운동본부), 한미우호협회, 태평양아시아협회, 자유지식인선언 등 굴지의 시민사회 단체들을 사재를 털어 설립해 이끌며 어려움을 겪었던 김상철 회장이 갑자기 쓰러지면서 김범수 기자가 미래한국을 맡게 된 것이다.

“나의 멘토이자 롤모델, 영웅이었던 김 회장님이 쓰러지셨을 때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고 그분의 유지를 받든다는 심정으로 하루하루 버텨왔습니다.”

2009년 초 미래한국이 주간신문에서 격주간 시사잡지로 재출발할 때 그는 모든 걸 오롯이 감당해야 했다. 나는 2009년 초 편집위원에 위촉되면서 김범수 기자와 함께 다양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취재원을 만나기 위해 함께 움직일 때 우리 대화의 대부분은 김상철 회장에 관한 것이었다.

내가 볼 때 그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장인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남자’였고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김상철 회장에 대해 “인권운동과 민주화에 앞장섰으며 정치철학이념으로서의 보수주의자이면서 비전과 함께 추진력을 갖춘 분”이라고 목소리 높여 소개했다. 김상철 회장은 태평양아시아협회를 설립하여 대학생 1만 명을 해외로 보내 견문을 넓히게 했고, 한민우호협회를 통해 한미민간운동을 전개했으며, 미래한국을 창립해 한국사회에 보수이념을 펼쳤고, 세이브NK를 통해 북한구원운동을 개최하며 우리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위해 최전방에서 달린 분이었다.

김범수 대표는 미래한국이 경영난에 봉착하여 어려움을 겪었지만 꿋꿋이 밀고 나갔다.

“경제기사와 기업기사를 쓰면서 협찬을 받아야 하는데 우리는 주로 정치기사만 싣다 보니 협찬을 받을 길이 없었어요. 기업들은 친기업 관련, 시장경제에 관한 기사보다 비판하는 기사에 더 반응을 보이죠. 미래한국 발간 취지에 동참하시는 편집위원들께서 원고를 많이 써주셨고, 김상철 회장님을 기억하는 분들이 계속 응원해주셔서 어렵게 끌고 왔어요. 무엇보다 아내와 가정의 희생이 가장 컸죠, 그만 접자고 재촉할 만큼…”

김범수 대표는 일당백의 몫을 해내느라 늘 바쁘게 뛰어야 했다. 힘들었지만 강인한 신앙과 정신력을 갖춘 데다 롤모델인 김상철 회장과 미래한국을 지원해준 주주들의 공든탑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의지가 있었기에 이어올 수 있었다.
 

조금은 특별한 학창 시절-유학과 투병

준수한 외모만 보면 어려움이 없이 자란 것 같지만 그는 학창 시절 병마로 인한 고난의 긴 터널을 통과하기도 했다. 서울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그는 친구들과 어울려 잘 노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을 마쳤을 때는 미국 유학을 결정하고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냈다.

“당시는 조기유학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어요. 이대로 친구들과 놀기만 하면 안 되겠다는 자각이 컸고 부끄러운 얘기지만 당시 아버지께 ‘지금부터 열심히 공부할 텐데 이왕이면 서울대보다 하버드에 들어가겠다’고 설득했지요. 그래서 하버드가 있는 보스턴으로 갔고 하버드예비학교로 출발한 캠프리지스쿨에서 기숙사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동부의 보수적인 명문학교와 키팅 선생님을 그리며 유학을 갔건만 캠브리지스쿨은 미국내에서도 가장 진보적인 학교였다. 교장선생을 “하이 마이클!”이라고 부르고 동성애자들이 스스럼없이 커밍아웃을 할 정도였다.

“동양 학생이 거의 없어서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한창 사춘기인 데다 문화적 충격이 너무 컸어요. 혼란을 극복하고 싶었고 하버드를 가려면 준비를 더 해야 할 것 같아 고등학교 3학년 때 휴학을 결정합니다. 미국 유학과 휴학 결정이 당시로서는 내게 상당히 어려운 결단이었고 인생의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되었습니다.”

김범수 대표는 올해 1월 용인정 한국당 당협위원장으로 임명됐다.
김범수 대표는 올해 1월 용인정 한국당 당협위원장으로 임명됐다.

휴학을 하면서는 나름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많은 책을 읽고 매일 새벽예배를 나가며 공부를 시작했는데 뜻하지 않은 복병을 만났다.

당시 60㎏ 정도이었던 몸무게가 갑자기 80㎏이 되면서 몸이 퉁퉁 부어올랐다. 큰 병원에서 급성 신장염이라는 진단을 받고 입퇴원을 되풀이했지만 차도가 없었다. 소금기가 전혀 없는 음식과 병원에서 주는 많은 약을 계속 복용해야 했고 아파서 앉아 있기도 힘들 정도가 됐다. 고등학교도 마치지 못한 데다 군대도 갈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주위에서 보기에 저는 유학 간다더니 병들어서 돌아온 낭인이었죠. 몸과 마음이 다 절망이었죠. 처음엔 구도자처럼 살면서 내가 지금은 고난을 겪지만 나중에 정금같이 될 거다, 깨달음과 성공을 위한 연단의 과정이다 라는 믿음을 가졌지만 시간이 가면서 그러한 생각도 희미해졌죠. 다만 한가지 분명하게 깨달은 건 내 생각과 의지, 그리고 내 신앙의 한계였죠.”

몸은 수년간 긴 투병 기간을 거쳐 서서히 회복됐고 그러면서도 꿈은 줄어들지 않고 점점 커져갔다.

“미국은 여전히 기독교 문화가 살아 있는 곳입니다. 미국에 살다 보면 그 문화 안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자기가 좋아하는 걸 찾게 하는 시스템입니다. 저는 내 인생이 너무나 불확실하고 절박해서 열심히 공부했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나, 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생활했죠.”

김범수 대표는 이제 발행인을 내려놓으면서 20년간 몸담은 미래한국을 ‘보수정론지이면서 정책 잡지’였다고 총평했다.

“보수냐 진보냐, 우파냐 좌파냐는 이분법적 구분보다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모든 걸 바라보고자 했습니다. 가정과 교육과 노동의 가치를 역설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람을 격려하고 세워주며, 진리에 입각하여 비난이 아닌 긍정적인 시각으로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기독교 세계관으로 정책을 세우고 신앙과 문화를 바라보았으며, 언론이면서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무브먼트였죠. 굳이 미래한국이 지향하는 정치 이념적 가치를 들라면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입니다. 미래한국은 외부로부터 오피니언 리더들의 필독서이면서 기자들이 참고하는 잡지라는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위정자들에게 영혼을 불어 넣다

“미래를 바라보는 긴 호흡으로 달려 왔습니다. 특히 국제 정세 쪽은 다른 곳에서 보지 못하는 것을 보도했습니다. 일례로 지난 미국 대선 때 다른 언론들은 다 클린턴이 당선된다고 했지만 유일하게 우리는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을 주목했습니다. 국내 언론들이 국제뉴스에 약한 편입니다. 우리나라는 국제사회에서 주류 플레이어가 된 적이 없어요. 변경의 외부인의 시각으로 국제 문제를 보기 때문입니다. 중심에서 미국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지를 잘 모릅니다. 미래한국은 국제 시각을 더 강화해 앞으로도 정확한 뉴스를 전할 겁니다.”

김 대표는 앞으로 미래한국이 제호대로 미래세대와 함께 하길 원한다는 바람을 표했다.

“미래한국은 청년세대를 양성하는 요람이 되고, 많은 보수 인사를 배출하고, 보수진영이 통합하고 보수가 나아갈 방향을 잡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앞으로 더 잘 해야겠지요. 탄핵 이후 보수가 갈기갈기 찢어져 이 사람은 되고 저 사람은 안 된다는 말들을 하는데 그 점은 역사의 판단에 맡기고 큰 줄기를 봐야 합니다. 20년의 저력을 바탕으로 미래한국은 미래세대를 양성하는 진지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앞으로 청년세대를 더 많이 양성하고 더 풍성한 주제를 다뤄나가길 바랍니다.”

언론인이자 시민활동가로 활동하던 그가 정치를 하겠다고 결심한 한 건 탄핵이 계기가 되었다.

“탄핵이 기각될 거라고 예상했는데 현실과 괴리가 있는 희망사항이었던 거죠. 탄핵을 계기로 ‘진영에 갇혀 있으면 안 되겠다, 옳고 그름의 시시비비보다 설득과 결과가 중요하겠다, 언론이나 시민사회활동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진입 과정의 불편이나 심지어 부당함이 있더라도 더 늦기 전에 정치 제도권 안에 들어가 실질적 결과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한 거죠. 작년 말에 자유한국당에 입당했고 금년 1월에 용인시 정 지역의 당협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행복하자”

용인에 오자마자 연구단체인 용인발전소를 개소하고 2019년 한 해 동안 주민들과 많은 교류를 했다. 어린 시절 봤던 1980년대 북적이던 강남의 모습과 흡사하다는 용인은 어마어마한 개발 가능성을 지녔다는 점에서 가슴이 뛴다고 한다.

앞으로 여의도면적만한 플랫폼시티가 지역구내에 들어서는 만큼 기업들과 연계하는 게 중요하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일부 주민의 반대로 네이버 제2데이터센터나 아모레퍼시픽 연구소 등을 놓친 것을 매우 애석하게 생각하는 그는 부가가치 있는 산업단지를 조성해 플랫폼시티와 연계하는 일을 이미 주민들과 함께 진행해 나가고 있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