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분석] 국제정치에 희생된 북송재일동포..... 2014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 ‘재일동포 북송은 납치’
[심층분석] 국제정치에 희생된 북송재일동포..... 2014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 ‘재일동포 북송은 납치’
  • 차동길 단국대 교수
  • 승인 2019.12.30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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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북한과 일본은 ‘일조무역회’ 결성 등 경제교류부문에서 가시적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냉전과 남북분단의 고착화라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던 일본 측의 사정상, 북일 관계의 진전은 제한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1959년부터 북한과 일본 사이에 재일동포의 북송사업이 실현되었다.

당시 한일 간 국교 정상화 회담이 진행 중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한국이 아닌 북한으로의 재일동포 송환은 의외의 결과였다. 이는 북한과 일본의 관계 개선 노력이 축적되어 나타난 정상적인 결실이라기보다 한일간의 불협화음이라는 틈바구니에서 북일 양국의 이해관계가 부합하면서 추진된 예외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재일동포 북송은 거주지 자유 선택이라는 인도주의적 명분과 달리 몇 가지 관점에서 원인과 교훈을 찾을 수 있겠다.

첫째, 국가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북한과 일본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는 점이다. 즉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 우월성 선전과 전후 노동력 확보, 일본의 경제적·사회적·정치적 목적의 이해관계가 일치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계급투쟁이론으로 무장된 공산주의 사상과 식민지 해방을 꿈꿔온 한국인들의 피해의식과 저항의식이 연결되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특히 사회주의에 대한 일본 내 지식인들의 선호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셋째, 한국 이승만 정부의 반일주의와 반공의식은 일본이 북한과의 접촉을 촉진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배상을 전제로 한국 송환을 요구하고 미국이 제안한 건설적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넷째, 동북아에서 미국의 전략적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이다.

일본의 입장  ‘한국보다 북한으로 송환 찬성’

일본 정부가 북송에 나선 것은 표면적으로는 인도주의 방침에 의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식민지배의 산물로서 이미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던 치안과 예산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가 작용한 것이었다. 1956년 통계에 따르면 재일 한국인 생활보호대상자는 교포의 24%인 9만여 명으로서 당시 외국인 중 약 90%에 이르렀다.

이로 인한 재정적 부담과 사회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 재일 한국인의 한반도 송환이 필요했던 일본에 북한의 무조건적 귀국 사업 제안은 재일 한국인에게 식민지배와 관련된 배상 및 귀환 비용 등을 해결해주지 않고서도 전후 처리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었다.

당시 일본의 사회적 분위기는 북송사업에 호의적이었다. 일본 국내에서는 적극적으로 북송 희망자를 모집하는 북한과 총련의 움직임에 1958년 10월 초부터 지원단체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1958년 11월 17일 하토야마 전 총리를 비롯한 각계각층 인사 90여 명이 ‘재일동포 귀국협력회’를 구성해 북송문제에 있어 일본 정부에 협력할 것을 요청했고 일본 정부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당시 일본 여론은 자유 진영이나 공산 진영에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미국이 실시한 공공 여론조사에 따르면 일본의 일반 대중은 45%만 반공주의를 찬성했고, 사회경제적으로 성공한 그룹은 50%만 반공주의를 지지했다.

지식인 계층에서는 32%만이 반공주의를 찬성했고, 50% 정도는 아무 쪽도 선택하지 않았으며, 공산주의 지지자도 6%나 되었다. 이를 보면 당시 일본 여론은 공산주의나 반공주의의 비율이 비슷했고, 지식인 사회는 사회주의적 색채가 지배적이었으며, 사회주의에 입각한 담론들이 현실정치의 비판 도구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일본의 진보적 일간지나 지식인에 의한 북송 지지는 재일 조선인 지식인층에도 영향을 줬다. 따라서 일본 지식인들은 재일 한국인이 모국으로 가야 한다면 외교적 관계가 좋지 않은 한국보다는 북한으로 가서 전후 부흥과 사회주의 건설에 참여하게 해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1971년 5월 일본 니가타 항에 정박한 북송선을 경비하고 있는 일본 경찰.
1971년 5월 일본 니가타 항에 정박한 북송선을 경비하고 있는 일본 경찰.

미국의 입장 ‘인권보다 동아시아 전략이 우선’

1950년대 미국의 동북아 정책은 일본을 중국 및 소련의 세력 확장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하루빨리 독립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일본의 경제부흥정책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1949년 대일 강화를 조기에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1959년 재일 한국인 북송 문제는 중국, 소련, 북한지역에 잔류하고 있는 일본인 송환 문제와 연동되어 있다. 일본은 외교 관계를 맺고 있는 대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협상을 통해 재일 화교를 중국으로 보내고, 중국에 잔류한 일본인을 송환했으며, 소련과도 협상을 통해 사할린 등에 잔류한 일본인들을 송환했다.

미 국무부는 1959년 8월 자유의지에 의한 귀국 원칙을 일관되게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그해 9월에 발표된 ‘콜론 보고서’에서 확인되듯이 당시 미국은 이승만 정부의 부패가 미국의 원조를 좀먹고 있으며 이승만의 고집으로 한일국교 정상화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판단하고 이승만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있었다. 반면 일본 정부 지도부에 대해서는 1960년으로 예정된 ‘미일 안보조약’ 개정을 앞두고 힘을 실어줄 필요성이 있었다. 이에 미국은 재일 한국인 북송과 관련해 한국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를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았다.

미국은 북송 문제와 관련해 일본과 북한의 적십자사가 직접 협상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며 서서히 관여하기 시작했다. 즉 미국은 일본이 북송 문제와 관련해 국제적십자위원회를 통해 추진하기를 원했고 국제적십자위원회가 철저한 개별 심사를 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북한은 국제적십자위원회의 심사를 거부했다. 미 국무부는 일본이 총선거 등 국내 정치적 목적을 위해 북송계획을 진행하는 것으로 봤다.

미국은 재일 한국인 북송 문제보다 한일관계를 더 중시 여겼고 북일 간 직접적인 제네바 협상의 지속을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국제적십자위원회의 북송사업 참여를 위해 압박정책을 계속했으며 일본에는 북한에 조종당하지 말라는 조언을 했다.

그 이유는 북한이 국제적십자위원회의 심사를 받아들일 의도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미국의 조언을 받아들이면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미국이 돕겠다고 했다. 미국은 이러한 조언이 일본에 도움을 줬으며 곧 제네바 협상이 결렬될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이러한 미국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다.

북한의 입장  ‘사회주의 선전과 노동력 확보’

북한이 재일동포 귀국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배경은 어디에 있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 선전, 부족한 노동력 보충 등이 그 이유로 지적된다. 북한은 재일동포의 북한 귀국이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 최초의 민족 대이동으로서 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성을 세상에 널리 알린 것이라고 선전했다.

한편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는 1956년 12월 전원회의를 개최해 사회주의 건설에서 ‘혁명적 대 고조’를 일으킬 것을 결의했으며 이에 발맞춰 1958년부터 천리마 운동을 전개했다. 재일동포 중에서 7만 5000여 명(귀국 교포의 80%)은 1959년부터 1961년까지 3년 사이에 집중귀국했다. 그런 점에서 재일동포귀국사업과 1950년대 후반 이후 사회주의 건설과정의 노동력 확보 문제가 서로 연관되어 있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귀국 동포들은 공장, 기업, 협동농장, 과학, 교육, 문화예술기관 등 다양한 분야에 배치되었다. 귀국한 재일동포들이 실제로 북한의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 어느 정도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는 불확실하다. 당시 ‘사회주의 낙원’에 대한 동경심은 양질의 노동력을 가지고 일본에 적응할 수 있었던 동포들보다는 생활보호 대상자 처지인 빈민층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귀국 비용과 정착 비용을 제공하면서까지 이들을 유치한 것이 실제로 어느 정도 북송 효과로 나타났을 것으로 판단된다.

1959년 2월 21일 서울에서 열린 재일교포 북송반대 국민대회.
1959년 2월 21일 서울에서 열린 재일교포 북송반대 국민대회.

한국의 입장  ‘차라리 한국으로 송환해 달라’

북한과 일본적십자사의 협상 타결이 임박하자 한국은 6월 15일 대일무역 금지를 발표하고 같은 날 공식적으로 미국의 중재를 요청했다. 미국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재일 한국인들에 대해 보상(1인 500달러)하고, 그들의 재산 반출을 확실하게 보장한다면 재일 한국인의 집단 송환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표명했다. 그리고 빠른 시기에 한일회담 재개를 일본에 요청했다. 한국 정부는 북송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지만 송환은 연기되거나 최소화 입장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북일 제네바 협상과 국제적십자위원회의 역할에 대해 한국 정부의 입장이 더 현실주의적이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보상 요구가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북송이 실제로 실행되게 되자 7월 1일 한국 정부는 16개 항목으로 정리된 입장을 발표한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재일 한국인 문제는 일반 외국인 추방 문제가 아닌 한일간의 독특한 문제이기 때문에 한일회담을 통해 한일 양국의 정치적인 문제로 논의해야 한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과의 회담을 포기하고 공산주의자들과 흥정을 하는 것이고 일본은 사정이 변했다고 변명만을 하고 있다.

북송계획은 처음부터 일본의 외무성, 법무성, 후생성 관리들에 의해 추진되었기 때문에 국제적십자위원회를 내세운 인도주의 원칙은 일본 정부의 진의를 감추려는 도구이다. 전쟁포로 송환의 경우도 자유의사에 의하지 않고 공산국가로 송환을 금지하는데 거주지 선택 자유 원칙이라는 이유로 북송을 하는 것은 부당하며 집단 북송은 북한군의 병력을 강화하는 것으로 자유 진영의 안보를 위협하는 것이다. 일본의 추방계획은 한국 정부의 주권을 부정하고 북한을 승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맥아더 대사는 일본적십자사와 북한적십자사의 제네바 협상이 이미 공식적으로 국제적십자위원회에 제출된 상황에서 김동조 외무부 차관의 한국 송환 제안을 한국 정부가 채택할 경우 북송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김동조 차관이 ‘건설적 계획’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제출했으나 답변을 받지 못했다.

국제적십자위원회 입장  ‘적십자기구의 정치적 이익이 우선이다’

국제적십자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다.

첫째, 한국의 북송 반대를 위한 무력적인 위협은 현 시점에서 가장 방해되는 문제이다.

둘째, 만약 국제적십자위원회가 비록 공산국가라도 더 좋은 삶을 위해 참을 수 없는 환경에서 벗어나려는 재일 한국인들의 계획을 포기하도록 압박한다면 이것은 철의 장막 뒤에서 현재까지 만들었던 국제적십자위원회의 존재가치를 위협할 것이다.

셋째, 북한과 같은 공산주의 국가로 난민을 보내는 것을 국제적십자위원회가 도와주지 않아야 한다는 한국 정부의 주장은 소련이 모든 러시아 혁명에 반대한 사람들에 대해 사법권을 주장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넷째, 소련은 북송 문제에서 국제적십자위원회의 불참을 원하고 일본적십자사와 북한적십자사에 의해 진행되기 원한다고 확실하게 밝혔다.

만약 국제적십자위원회가 한국 정부에 의한 북송계획으로부터의 철수를 위해 비타협을 강행한다면 공산주의자들을 기쁘게 할 뿐만 아니라 동유럽에서 장래 국제적십자위원회의 일을 행할 때 재앙이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제적십자위원회는 만약 미 국무부가 한국 정부의 방해 활동을 그만두게 한다면 아주 고맙게 생각할 것이라고 했다.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북송사업은 ‘납치’

북송사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최소한 두 번의 기회가 있었다. 첫째는 일본이 북한에 국제적십자위원회의 관찰자·조언자 역할이 아닌 심사자 역할을 강력히 주장했다면 북송사업 취소 또는 개별 심사에 의한 자유 선택이 이뤄졌을 것이다. 둘째는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조건 없는 송환에 나섰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북송사업의 실현은 북일 관계의 정상적인 개선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한미일 3국 간 균열의 틈에서 북한과 일본의 이해관계가 일치해 예외적으로 실현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식민지배와 연관된 사안에서 사죄, 배상(보상) 문제가 전혀 거론되지 않고 처리됨으로써 북송사업은 동북아시아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문제가 있는 선례로 남게 되었다.

일본과 북한 그리고 국제적십자위원회가 인도적 조치로 추진한 재일동포 북송사업은 결과적으로 비인도적이고 송환자 대대손손 절망적 삶을 벗어나지 못하게 한 끝나지 않은 잘못된 정책이었다. 송환자들은 지상낙원이라는 거짓과 기만적 선전 선동에 현혹되어 북송의 길을 택한 자들로서 북한과 일본이 1차 책임이 있고, 미국과 한국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2004년 기밀 해제된 국제적십자사 문서에 따르면 북송사건은 인도적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져 있다. 그리고 2014년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최종보고서에서는 북송사업을 납치로 규정했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관련국들이 책임을 이행하는 길은 납치된 동포들과 그 후손들을 귀환시키는 사업을 전개하는 것이다.

차동길 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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