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100주년] 다시보는 한성정부... 임정의 정통성을 확보하다
[임시정부 100주년] 다시보는 한성정부... 임정의 정통성을 확보하다
  • 박명수 미래한국 편집위원·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 승인 2020.01.06 10:09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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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3·1운동으로 만들어진 임시정부도 많은 주목을 받았다. 당시 만들어진 임시정부는 노령임시정부, 상해임시정부, 한성임시정부가 있다.

이 중에서 상해임시정부만이 주목을 받고 노령임시정부와 한성임시정부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한성임시정부는 3·1운동 이후 한반도에서 세워진 유일한 정부였고 따라서 이것은 한반도에 살고 있는 전체 한국인들의 의사가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한성정부의 역사적인 의의가 있는 것이다.

한성정부 유적지 표지석 (서울 내수동 65)
한성정부 유적지 표지석 (서울 내수동 65)

한성정부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3·1운동을 일으켰던 지도자들은 만세를 부른다고 독립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1919년 3월 3일자 천도교 측에서 발행한 조선독립신문에는 독립운동과 더불어 국민대회를 열어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임시대통령을 선거할 계획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같은 신문 3월 5일자에는 전국 13도 대표자를 선정하고, 3월 6일에는 경성 종로에서 조선독립대회를 열 것이라고 알렸다. 이 계획이 그대로 실천된 것은 아니지만 한성정부는 이 내용을 상당히 반영해서 이뤄진 것이다.

3·1운동 직후 천도교를 중심으로 임시정부 수립 움직임이 있었다고 보인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이 제대로 진척되지를 않았다고 본다. 여기에 비해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된 임시정부가 세워졌는데 이것이 바로 한성정부였다. 한성정부를 조직하는 데 주역을 담당했던 이규갑(감리교 전도사)에 따르면 자신은 이상재나 박승봉과 같은 기독교 명망가들과 함께 3·1운동 이후의 후사를 맡았는데 이들은 현재 진행 중인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는 임시정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홍면희는 법조인 출신으로 이규갑을 도왔다.

이런 가운데 3월 초 어느 날 유교측 인물들이 이규갑을 찾아와 이 문제를 논의했다. 이규갑은 이들과 함께 한성정부의 조직을 조직했다. 따라서 한성정부는 기독교세력이 중심이 되었고, 여기에 유교세력이 참여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교세력이 주도권을 가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한성정부가 발표한 국민대회 취지서나 구성원에서 유교적인 색채가 그렇게 강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대한제국으로 망했으니 제국의 유산을 반영하는 측면에서 최고직의 명칭을 집정관 총재라고 하기로 했다(이규갑, “한성임시정부 수립의 진말,” 신동아 1969년 4월). 하지만 이것은 형식적인 것일 뿐 그 내용에 있어서는 근대식 민주국가를 지향했다.

이들은 3월 중순 준비위원회를 조직해 선포문 작성을 위임했다. 그리고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13도 대표위원들이 모여 임시정부 약법과 조직을 상의하려고 했다. 하지만 여기에 몇몇 사람만 참석했다. 이런 가운데 이들은 상해에서의 진행 과정을 알 필요가 있어 4월 8일 한남수를 상해에 파송하여 사정을 살피게 했다.

한남수는 4월 21일 상해에 이미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음을 알렸다. 이러는 가운데 4월 중순 이규갑과 홍면희는 상해에서 답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답이 오기 전에 한성정부에 관한 문건을 성냥갑에 감추고 상해로 떠났다. 이들은 떠나면서 한성정부의 뒷일들을 현석철과 기타 학생들에게 맡겼다. 이들은 4월 23일 국민대회 취지서를 발표했다.

원래는 대대적으로 하려고 했으나 일제의 감시 때문에 소규모의 대회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4월 11일 상해에, 4월 23일 한성에 임시정부가 각각 따로 수립되었다.
 

국민대회 취지서의 주요 사상과 주요 결의 사항

원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통치자는 피통치자의 동의에 의해서 통치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것을 위해 민족의 구성원이 모여 대회를 열어야 한다. 그래서 일본에서 열린 2·8대회는 민족대회를 소집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원서를 일본 당국에 제출했다.

이런 정신은 임시정부 선포문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 의하면 우리 민족은 일본의 통치에 동의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이것을 부인하는 의사를 만방에 표시하였고, 이제 전민족의 의사에 의해서 우리가 독립국임과 자주민임을 온 세계에 알린다는 것이다(이규갑, 위의 글 참조). 한성정부는 이런 민주적인 원리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이런 정신은 한성정부 국민대회 취지서에 더 잘 나타나고 있다. 먼저 이 취지서는 이들이 이미 33인이 발표한 독립선언서의 권위를 인정하고, 이것을 보완하기 위해서 시작했다는 것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아마도 33인이 주로 종교대표로 되어 있기 때문에 전민족의 대표로서 부족함을 갖고 있으며, 이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전민족의 일치동작으로 대소단결과 지방대표로 종합하여” 국민대회를 조직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정부는 종교대표를 넘어서서 전 국민의 의사에 의해서 수립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13도 대표의 이름으로 국민대회가 개최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이 취지서가 강조하는 것은 일본의 야만적인 행위를 지적하며 동시에 조선이 새로운 문명에 맞는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 취지서는 일본이 많은 사람들이 세계평화를 논하는 이 상황에서 오히려 세계평화에 장애가 되는 군국주의 국가라는 사실을 지적하며, 동시에 오히려 조선은 “오직 생존 권리를 확보하며, 자유평등을 신장하며, 정의 인도를 옹호하며, 동양평화를 보전하며, 세계 공안을 존중키 위하여 아 조선독립을 주장함이니, 실로 신(神)의 명령”이다. 이들이 꿈꾸는 나라는 새로운 국제질서에 맞는 민주국가이며,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나라였다.

이 취지서는 새로운 나라의 성격을 “약법”의 이름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의하면 국체(國體)는 민주주의로, 정체(政體)는 대의제로, 국시(國是)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고, 세계평화의 행운을 증진케 함”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을 통하여 한성정부가 지향하는 국가는 더 이상 전제국가가 아니라 근대식 민주국가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으며,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에 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임시정부가 내정과 외교의 권한을 갖고 있으며, 국민은 납세와 병역의 의무를 갖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것은 국가의 기본을 갖추기 위한 방책이다.

이 국민대회는 조선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강령을 결의했다. 우선 독립운동을 체계화하기 위하여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총독부와 일본군대의 철수를 요구하며,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우리의 독립을 청원하고, 일본 관청에서 일하는 모든 관리를 사직하고, 더 이상 일본을 국가권력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납세하지 말고, 또한 청원과 소송을 하지 말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것은 실지로 조선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정부의 백성이 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흥미 있는 것은 25명으로 구성된 13도 대표의 첫 번째 인물에 관한 것이다. 사실 13도 대표의 첫 번째 인물은 33인의 대표인 손병희와 맞먹는 중요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첫 번째로 언급되고 있는 인물이 이만식인데 학자들은 현재까지 이만식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밝히지를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규갑은 1969년 4월 신동아에 쓴 글에서 13도 대표의 첫째 인물을 조만식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한 설명은 없다.

사실 당시 이규갑과 홍면희는 다 같이 평양에 살고 있었고, 따라서 평양 출신인 조만식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조만식은 3·1운동의 기독교측 중심인물인 이승훈의 직계인물이다. 당시 이승훈은 오산학교 설립자였고, 조만식은 교장이었다. 따라서 각종 문서에 13도 대표로 나오는 이만식은 사실 조만식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

한성정부의 법통을 체계적으로 강조한 사람은 도산 안창호였다.
한성정부의 법통을 체계적으로 강조한 사람은 도산 안창호였다.

한성정부를 둘러싼 논쟁들

한성정부는 그 최고의 직위로 집정관 총재를 뒀고 여기에 이승만을 추대했다. 그리고 이 소식은 5월 말경 미국에 전달되었고, 이승만은 여기에 근거해서 집정관 총재를 영어로 대통령이라고 번역하여 자신의 칭호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근거로 하여 상해 임시정부에도 그들이 정한 국무총리를 대통령으로 바꿀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나중에 임시정부가 이승만을 탄핵했을 때 이승만은 자신은 한성정부의 결정에 근거해서 여전히 대통령이라고 주장하였다.

필자는 한성임시정부가 주목을 받지 못한 이유는 아마도 이승만 박사가 한성정부의 법통성을 주장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승만은 한성정부를 근거로 하여 자신이 대통령임을 주장하였고, 이승만이 제헌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이 31운동으로 세워진 나라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바로 3·1운동 이후 13도 대표들이 모여 만든 한성정부를 말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한성정부를 부각시키는 것은 바로 이승만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반 이승만의 입장에 있는 많은 학자들은 한성정부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박명수 미래한국 편집위원·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박명수 미래한국 편집위원·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하지만 한성정부는 이승만만 강조한 것은 아니었다. 한성정부의 법통을 체계적으로 강조한 사람은 도산 안창호였다. 그는 노령정부와 상해정부를 연합하는 과정에서 한성정부를 매개로 내세웠다. 1919년 4월 11일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진 다음에 상해 임시정부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당장 러시아와 만주에 근거하고 있는 노령정부와 연합하는 것이다. 사실 당시 연해주와 만주에 가장 많은 한인들이 살고 있었고, 이들을 근거로 해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주장이 많았다.

여기에 비해 상해에서는 연해주는 국제적으로 활동하기 좋지 않은 장소이므로 상해에 임시정부를 둬야 한다고 봤다. 이 두 정부를 합하는 임무를 맡은 것이 바로 안창호였다. 안창호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상해에도, 노령에도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한반도에서 13도 대표가 세운 한성정부에 있다고 봤다. 따라서 한성정부의 정통성에 입각하여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1919년 9월 통합임시정부였던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이 정부가 과연 한반도의 전체 국민을 대표하는 기관인가 하는 점이다. 국제사회는 임시정부가 한반도의 전체 국민의 의사를 대표하는가 하는 점이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해방 직전 중경에서 만들어진 건국강령은 임시정부가 바로 13도 대표가 모여 만든 의정원에 기초한다는 것을 밝혔다. 따라서 이 13도 대표의 국민회의는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입증해 주는 전제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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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20-01-06 21:05:32
한국사와 세계사의 연계가 옳음.한나라이후 세계종교로 동아시아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잡아온 유교전통.

해방후 유교국 조선.대한제국 최고대학 지위는 성균관대로 계승,제사(석전)는 성균관으로 분리.최고제사장 지위는 황사손(이원)이 승계.한국의 Royal대는 성균관대. 세계사 반영시 교황 윤허 서강대도 성대 다음 국제관습법상 학벌이 높고 좋은 예우 Royal대학. http://blog.daum.net/macmaca/2575

윤진한 2020-01-06 21:04:51
일본은 막부시대 불교국이되어 새로생긴 성씨없는 마당쇠 천민 천황이 하느님보다 높다고 주장하는 불교 Monkey나라.일본 신도는 천황이 하느님보다높다고 주장하는 신생 불교 Monkey임.한국은 헌법전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보장되어, 일본에 선전포고한 상태가 지속되는 나라임.생경하고 급격하게 새로 생긴 마당쇠 천민 천황이 세운 일제 강점기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한국에 남겨진 패전국 일제 잔재며, 마당쇠 천민 학교며, 부처 Monkey.일본 Monkey를 벗어날 수 없는 불교.일본Monkey 천민학교로, 한국 영토에서 축출해야 되는 대상임. 한국 영토에 주권이나 학벌같은건 없이 대중언론에서 덤비며 항거하는 일제 잔재에 불과함.

http://blog.daum.net/macmaca/2632

윤진한 2020-01-06 21:04:10
한국인은 행정법상 모두가 유교도임. 주민등록에 조선성명인 한문성씨와 본관을 의무적으로 등록해야 하는 나라. 중요한것은 동아시아 유교국가(중국,한국,베트남,몽고. 그리고 2차대전이후의 대만.싱가포르 및 전세계 화교들)에는 하느님(天),계절의 신,산천의 신,조상신,공맹숭배,한문성씨.본관, 한자,삼강오륜,인의예지신,충효,관혼상제,한자,명절이 수천년 체화된것.




한국은 수천년 세계종교 유교나라.불교는 한국 전통 조계종 천민 승려와 주권없는 일본 불교로 나뉘어짐.1915년 조선총독부 포교규칙은 후발 국지적 신앙인 일본신도(새로 만든 일본 불교의 하나).불교.기독교만 종교로 인정하였는데,일본항복으로 강점기 포교종교는 종교주권 없음.

부처는 브라만교에 대항해 창조주를 밑에 두는 무신론적 Monkey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