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분석] 나치 민주주의와 희생양 만들기 선거
[심층분석] 나치 민주주의와 희생양 만들기 선거
  • 한정석 미래한국 객원기자
  • 승인 2020.01.22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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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는 자치권을 박탈하고, 각 주의회의 의석을 국회의 의석 배분에 따라 비례로 배분했다. 나치는 지방 의회에서도 자동적으로 다수파가 되었다.
히틀러는 자치권을 박탈하고, 각 주의회의 의석을 국회의 의석 배분에 따라 비례로 배분했다. 나치는 지방 의회에서도 자동적으로 다수파가 되었다.

문재인 정부 하에서 만일 누군가가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면 우리에게 낯선 것일까?

“우리는 오늘날 불공정한 급료로 살아가는 경제적 약자들을 착취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적이며, 책임과 성과 대신에 부와 자산을 가졌다는 이유로 꼴사나운 옹호를 받는 부유한 자들의 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조건의 시스템을 끝장내고야 말 것이다.”

위의 주장은 1927년 아돌프 히틀러가 제국의회 선거 1년 전, 군중을 상대로 한 연설의 한 부분이다. 퓰리처 상을 수상한 역사학자이자 저술가인 존 톨렌드(John Willard Toland)가 쓴 히틀러의 전기(傳記)에 등장한다.

‘불공정한 급료로 경제적 약자를 착취하는 자본주의 시스템’과 ‘책임과 성과 대신에 부와 자산을 가졌다는 이유로 꼴 사나운 옹호를 받는 부유한 자들’의 적이라던 히틀러의 나치는 적어도 1923년 이전까지는 인기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5년 후인 1928년 제국 의회선거에서 나치당은 18.3%의 득표율로 독일 사회민주당에 이어 제2당이 되는 기염을 토했다.

1929년 검은 목요일로 시작된 경제 대공황은 자신을 ‘자본주의의 적’이라 부른 나치당에 더 많은 지지를 안겨 줬다. 기업들이 도산하고, 실직자 수는 600만 명으로 늘어났다.

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에서 사회주의는 몰락했다. 이후 독일 경제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힘입어 느리지만 회복되고 있었다. 자본주의는 독일 국민들에게 사회주의 대안으로서 희망을 안겨 줬다. 하지만 1929년 세계대공황으로 ‘자본주의도 실패했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독일 국민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이 상황을 직접 지켜 본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독일인들이 ‘우리가 자본주의라는 악마를 소환했다’고 믿었다며 그의 책 ‘경제인의 종말’에 썼다.
 

선거로 집권한 히틀러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이 가진 경제적 공포를 이용해 정치적 승리를 거둬 갔다. 다른 정당들은 속수무책이었다. 피터 드러커는 나치당이 그렇게 약진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독일 국민에게 닥친 경제적 공포를 다름 아닌 ‘유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데 히틀러가 성공했던 점을 지목했다. 일종의 ‘희생양 전략’이었던 것이다.

히틀러는 연립내각에 입각해 달라는 제1당 사민당의 제안을 거절했다. 대신에 나치의 단독 집권을 요구했다. 1932년 4월 히틀러는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했지만 1340만 표(36.8%)까지 득표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해 7월 총선거에서는 37.3%를 득표하면서 히틀러는 이듬해 총리로 임명됐다. 히틀러 내각이 성립한 것이다. 이때부터 히틀러는 본격적인 야욕을 드러냈다.

1933년 2월 27일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을 계기로 히틀러는 대통령 긴급 명령을 포고하면서 독일 공산당 간부를 체포하고, 3월 23일에는 ‘민족과 국가의 위난을 제거하기 위한 법률안’(소위 전권 위임법)의 의회 심의를 요구하면서 반대 세력을 배척(排斥)해 나갔다. 핵심은 의회의 권한을 정부로 이양하는 것이었다. 이 법률안은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과 독일국가인민당(DNVP)의 공동 제출이라는 형식을 취했지만 사실상 히틀러의 꼼수였다.

1933년 3월 24일 수권법은 찬성 441표와 반대 94표(출석한 독일 사회민주당 의원의 표)로 통과됐다. 1주일 후 히틀러 정권은 독일 공산당 의원의 전 의석을 박탈했다. 수권법을 적용한 결과다. 여기에 주의회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각 주의회의 의석을 국회의 의석 배분에 따라 비례로 배분했다. 이렇게 해서 나치는 지방 의회에서도 자동적으로 다수파가 되었다. 의회는 히틀러의 독재 앞에 유명무실화 되고 말았다.

히틀러의 독재 하에서도 바이마르 헌법은 폐지되지 않았지만 전권 위임법(수권법)에 따라 사실상 바이마르 헌법은 사문화 되었다. 나치당은 이 법률을 적용해 나치당 이외의 정당을 해산하고, 같은 해 7월 14일에는 합법적으로 일당독재 체제를 확립해 갔다. 대통령의 권한은 불가침이었지만, 1934년에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한 후 국민투표에 따라 대통령의 권한을 겸직하면서 히틀러는 드디어 ‘총통’이라는 이름으로 독재자의 자리에 올랐다.

히틀러의 집권 과정은 독일 국민들의 갈채 속에서 합법을 내세워 이뤄졌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문제는 그렇게 이상적(理想的)인 법치 논리를 갖췄다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현실이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은 정치적 내분 뿐만 아니라 경제적 위기도 만연해 있었다. 프랑스와 벨기에 군대는 라인란트를 점령했고 곳곳에서 파업과 시위가 1923년에 있었다. 분리주의와 테러가 기승하는 가운데 치솟는 인플레이션은 독일 국민들로 하여금 검소·절약의 미덕과 사회보장체제를 송두리째 무너트렸다. 19세기부터 주류를 차지했던 보수주의, 자유주의, 가톨릭, 사회주의는 지지 기반을 잃어가고 있었다. 한마디로 중심이 없는 혼란의 시대가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에 나치세력은 ‘게르만 민족공동체’라는 비합리적인 집단주의로 대중들의 관심을 끌었다. 독일 민족주의는 사실 나치보다 오래고 튼튼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는데, 분열된 독일을 통일하고자 하는 열망이 ‘게르만의 혈통과 대지’라는 낭만주의로 싹텄고 여기에 1808년 나폴레옹의 독일 점령을 계기로 독일 민족주의 각성을 촉구한 철학자 피히테의 ‘독일국민에게 고함’은 그러한 독일 민족주의 열망의 정점에 있었다. 히틀러의 나치는 바로 이 점을 이용해 방황하는 독일인들을 파고 들 수 있었다. 일단 그렇게 대중들을 사로잡은 나치는 사회 경제 문제에 본격적인 포퓰리즘을 전개해 나갔다.

나치의 공식 정당 이름은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NSDAP)이었지만 나치는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했다. 동시에 나치는 기업가와 자본가들도 탄압했는데 피터 드러커는 ‘경제인의 종말’에서 ‘나치 하에 자본가들이 이익을 봤다는 것은 착각이며, 가장 큰 피해는 바로 대기업과 자본가들이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나치에 협조한 기업인들은 실질적으로는 나치당에 충성하는 대가로 경영권 유지를 보장받은 자들 뿐이었기 때문이다.독일 나치의 파시즘을 경험한 피터 드러커는 ‘경제인의 종말’이라는 책을 쓰면서 ‘전체주의의 기원’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드러커는 독일에서 나치가 대중들을 상대로 어떻게 경제 문제를 선동하는지 면밀히 관찰했으며 나치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를 거부하면서 빵을 파는 이에게는 빵값 인상을, 농부에게는 밀값 인상을, 소비자에게는 낮은 빵가격을 약속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한 나치의 약속을 믿는 독일인들에 대해 드러커는 이성적 성찰을 포기한 ‘경제인의 종말’이 파시즘의 배경이 되었다고 분석했다. 그 심리적 원인은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더 이상 독일을 구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었다는 것이다.

독일 나치의 경제이념에 대해 ‘중산층 사회주의(middle class socialism)’라는 개념을 도입한 학자들이 있었다. 그러한 이념은 나치당의 공식명칭인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의 ‘25개조 강령(25-Punkte-Programm)에 잘 나와 있다. 나치는 ‘계급차별 없는 사회’를 주장하면서 독일의 시민은 모두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갖게 될 것임을 강조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국가가 경제적 약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다음과 같은 원칙들을 내세웠다. 이러한 원칙들은 현재 대한민국 문재인 정부의 정책과 비교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우리는 대기업의 이익 분배를 요구한다.(7조)

- 우리는 국가가 가장 먼저 국민의 생활 수단에 대해 배려할 것을 요구한다.(14조)

- 우리는 건전한 중산층의 육성, 대규모 소매점의 즉시 공유화, 소규모 경영자에 대한 염가 임대, 모든 소규모 경영자를 최대한으로 고려한 국가, 주 및 지방 자치체에 대한 납품을 요구한다.(16조)

- 우리는 공공의 이익을 해치는 활동에 대한 가차 없는 투쟁을 요구한다. 고리대금 등 민족에 대한 범죄자는 종파나 인종에 관계 없이 모두 가차 없이 처벌한다.

- 우리는 국가와 의회, 조직 일반에 대한 절대적 권위를 요구한다. 우리는 국가의 법안을 각 연방주에 실시하기 위한 계급 및 직업별 위원회를 결성한다.(25조)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SDAP의 25개조 강령(25-Punkte-Programm 中)

나치의 이러한 ‘중산층 사회주의’는 한마디로 포퓰리즘이었다. 당시 독일은 불황으로 인해 경제적 불안이 확산되고 있었고, 외부적으로는 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주변 강국들의 독일 영토에 대한 야심과 전쟁 배상금 문제로 독일 국민들의 공포와 불만이 극에 달하고 있던 시기였다. 여기에 유태인은 나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희생양이었다.

당시 독일의 유태인들은 독일 자본주의를 장악한 세력으로 이해되었다. 유태인들이 주로 금융과 무역에 종사했기 때문이다. 독일 유태인들은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남들보다 더 노력했으며 유럽의 유태인들과도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실력을 닦아 엘리트층에 많이 진출했다. 피터 드러커는 나치가 유태인들이 독일인들의 일자리와 부를 빼앗고 있다고 선동했던 부분을 자세하게 지목한다. 그러면서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밝힌다. 하지만 이미 괴벨스의 말대로 ‘선동은 한 줄이면 충분하고 반박은 수십 장의 문서가 필요하지만, 그때는 이미 대중들은 선동된 후’였다.

나치는 독일 국민의 경제적 궁핍 원인을 유대인 탓으로 돌렸다. 히틀러의 ‘유대인 악마론’은 오늘날 한국에선 ‘대기업악마론’으로 부활하는 듯하다.
나치는 독일 국민의 경제적 궁핍 원인을 유대인 탓으로 돌렸다. 히틀러의 ‘유대인 악마론’은 오늘날 한국에선 ‘대기업악마론’으로 부활하는 듯하다.

대한민국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유사성

나치가 집권하던 1926~1930년대의 독일 상황은 우리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과 유사한 점이 많다. 대한민국은 후진국 독일이 보불전쟁에 승리한 전쟁 배상금으로 산업화에 성공해 중산층이 등장했던 것처럼 6·25 폐허를 딛고 70년대 산업화로 중산층이 등장했다. 이때 독일과 한국 모두 ‘민족주의’가 큰 통합의 역할을 했다.

독일에서 민주주의 혁명으로 빌헬름 카이저의 라이히 제국이 헌정 공화국으로 바뀌었듯, 대한민국도 권위주의 시대를 끝내고 민주화를 겪었다. 독일에서 사회주의는 몰락했고, 한국에서는 구소련과 동독의 몰락, 그리고 남북체제 경쟁에서 남한이 승리하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믿음은 확실해졌다.

문제는 이후였다. 20세기 초반에 독일은 심대한 공황을, 한국은 그보다 70년 후인 20세기 말에 IMF 사태라는 트라우마를 겪게 된다. 자본주의도 결국 대안이 아니라는 생각은 독일과 한국에서 같은 경험을 했던 것이다. 여기에 70년 전 독일은 주변국들의 위협에 놓였고, 한국도 일본 군사대국화와 중국의 노골적인 내정간섭, 그리고 북핵 위기에 놓이게 됐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 구질서는 무너지고 신질서는 등장하지 못한 70년 전 독일과 오늘 한국에서 낯선 악마의 소환을 두고 독일은 유태인에 대한 마녀 사냥에 나섰고, 한국은 대기업과 보수 마녀 사냥에 나섰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70년 전 히틀러의 반 자유주의적, 반 자본주의적 파시즘과 오늘 대한민국 문재인 정부는 같은 궤도를 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피터 드러커는 ‘경제인의 종말’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 맞든, 틀리든 ‘경제적 합리성’을 추구하려는 이념인 반면, 파시즘은 비경제적 논리에 입각하기에 ‘경제인의 종말’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부자와 재벌들 때문에 우리가 못 산다’는 주장이나, ‘재벌들이 사내유보금을 쌓아 놓고 투자를 하지 않고 있다’거나, ‘재벌기업의 경제 집중도가 높아 위험하다’거나 ‘재벌기업들이 납품단가를 후려쳐 중소기업이 어렵다’는 주장들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그러한 주장들은 바로 히틀러의 나치가 집권을 위해 동원한 ‘유태인 악마론’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들이다.

합리적이고 신중하기로 둘째라면 서러운 독일인들이 파시즘의 광기에 빠져들었다면, 오늘 그와 유사하게 출구가 없는 한국인들이 집단 광기에 빠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집단 히스테리가 작동하는 상황에서는 모든 비정상이 정상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우리는 보고 싶은 대로 보는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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