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분석] 스페인독감과 3·1운동
[역사분석] 스페인독감과 3·1운동
  • 박명수 미래한국 편집위원·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 승인 2020.03.16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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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독감은 조선과 일본에도 큰 피해를 주었다. 조선총독부 자료에 따르면 2018년 독감으로 인한 조선인 사망자는 14만527명이다. 사진은 마스크를 쓰고 등교하는 도쿄의 일본 여학생들.
스페인독감은 조선과 일본에도 큰 피해를 주었다. 조선총독부 자료에 따르면 2018년 독감으로 인한 조선인 사망자는 14만527명이다. 사진은 마스크를 쓰고 등교하는 도쿄의 일본 여학생들.

전염병이 인류문화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염병은 중세의 흑사병이었다. 원래 중국에서 시작된 흑사병은 몽골군에 의해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 확산되었고 결국 대부분의 유럽 전역에 창궐하게 되었다. 당시 유럽의 도시는 매우 불결해 흑사병이 퍼지기 쉬운 상황이었다.

그 결과 당시 4억5000만 명이던 세계 인구 가운데 1억 명이 사망했다. 이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에서는 농업인구가 대량으로 줄어들고 결국 농경사회에 기초한 봉건사회가 붕괴되고 새로운 근대사회를 낳게 되었다. 종교개혁은 바로 이런 흑사병의 공포 가운데 일어난 것이다.
 

전염병과 인류문화

전염병은 유럽인의 신대륙 정복과도 연결된다. 16세기 유럽인들은 신대륙 정복에 나섰는데 이들이 신대륙을 정복하는 데는 총 못지않게 병균의 힘이 강력했다. 당시 유럽은 전염병을 겪으면서 병균에 대해 면역력을 갖고 있었는데 이들이 신대륙에 가면서 이 병균을 신대륙의 인디언들에게 전염시켰다. 새로운 병균에 대한 면역력이 없던 인디언들은 유럽인들이 가져온 병균에 속수무책이었고 결국 인디언들은 전염병 때문에 전멸하게 되었다. 유럽인들은 신대륙을 병균으로 정복한 것이다.

하지만 서양인들이 전 세계에 부정적인 역할만 한 것은 아니었다. 19세기 말 시작된 기독교선교는 전염병 치료와 함께 시작되었다. 당시 유럽과 미국에서 발달한 의료기술은 콜레라에 무방비 상태였던 한국인들에게 구세주와 같았다. 조선에 처음 온 선교사들 가운데는 의사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들이 조선사회에서 처음 맞부딪힌 것은 바로 콜레라였다.

당시 한국인들은 콜레라는 쥐가 감염시킨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쥐를 잡아먹는 고양이 그림을 집 안팎에 그려 놓는 것이 콜레라에 대한 예방책이었다. 하지만 이런 것이 효력이 있을 턱이 없었고 콜레라가 유행하면 궁궐에서 민간에 이르기까지 온 도시가 쑥대밭이 되었다.

조선 땅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이런 콜레라 예방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선교사들이 입국한 다음에 1886년 처음으로 콜레라가 창궐했는데 당시 선교사들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1892년경 다시금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 선교사들은 지역의 교회와 손을 잡고, 곳곳에 방역소를 마련해 소독하고, 사람들에게 면역주사를 놔 줌으로써 콜레라를 예방했고,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고종은 여기에 대해 깊이 감동했고, 참여한 교인들에게 상당한 하사금을 내렸다. 이 하사금을 기초로 해서 오늘의 새문안교회가 건축되었다.

한국에 기독교가 널리 전파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선교사들의 전염병 예방 때문일 것이다. 당시 전염병은 한국 사람들로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재앙이었는데, 선교사들이 들여온 새로운 방역체계에 의해서 이것을 극복할 수 있었으니, 이것을 통해 조선 사람들은 서양문명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알 수 있었다. 전염병에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서구문명이야말로 자신들의 영혼을 책임질 수 있는 종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일본은 조선이 스스로 개화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므로 자신들이 조선을 지배해 조선을 문명국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일본이 가장 역점을 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조선의 의료 발전이었다. 당시 의학은 서구문명의 정수였으며, 일본은 자신들이 바로 조선의 위생과 건강문제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위해 일본은 전국적으로 위생 사업을 강화했으며, 여기에 경찰력을 투입했다. 당시 위생을 책임진 것은 일본의 경찰이었다. 일본은 조선의 위생을 강화한다는 명분 아래 조선 사람들의 행동을 규제하고, 지배했던 것이다. 여기에 근대화와 식민지화가 함께 진행되었던 것이다.
 

1918년 스페인독감 대 유행으로 사망한 미국인은 공식적인 집계로 67만5500명에 달한다.
1918년 스페인독감 대 유행으로 사망한 미국인은 공식적인 집계로 67만5500명에 달한다.

일제통치와 스페인독감

일제 강점기 동안 가장 큰 전염병은 1918년 발생한 독감이었는데 보통 스페인독감이라고 불렸다. 당시 세계가 1차 세계대전 중이었기 때문에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스페인 언론만이 여기에 관심을 갖고 보도해서 국제사회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래서 스페인독감이라고 불렸다. 이 스페인 독감은 원래 미국 중서부에서 시작했지만 전쟁 중의 군인들을 통해 유럽에 전염되었고, 전쟁이 끝나면서 군인들이 다시금 자기 모국으로 돌아와 이 전염병을 퍼뜨려 결국에는 세계적인 대재앙을 낳게 만들었다.

이 스페인독감은 중세의 흑사병 이래 가장 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간 전염병이었다. 아직도 정확한 통계는 나오고 있지 않지만 학자들은 당시 전세계 인구의 1/3이 감염되었다고 추정한다. 처음에는 이 독감으로 약 216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최소 5000만 명에서 많게는 1억에 가까운 사람이 생명을 잃었을 것이라고 보고되고 있다.

이것은 1차 세계대전으로 사망한 사람이 약 1000만 명 가량이라는 사실과 비교해 볼 때 그 피해 규모가 얼마인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전쟁보다 더 무서운 것이 전염병인 것이다. 이때 사망한 미국인은 공식적인 집계로 67만5500명이었다.

당시 스페인독감은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1차 감염은 1918년 초 미국 중서부에서 시작해 유럽과 아시아, 북아프리카를 거쳐 같은 해 7월에는 호주까지 확산되었고 8월 초에는 약화되었다. 하지만 1차 감염은 조선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2차 감염은 8월 말부터 시작되는데 9월 말부터 만주를 통해 조선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2차 감염은 11월 말에 이르러서는 매우 약화되어 거의 사라졌다. 이 시기에 스페인독감이 한반도에 들어와 많은 피해가 생겼다.

사실 총독부 당국은 이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1차 감염이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는데도 무관심했으며 2차 감염이 진행되고 나서 한참 지난 10월 중순에 가서야 총독부가 관심을 갖고 대처하기 시작했다. 전염병 관리를 식민지 통치의 주요 이유로 간주하던 총독부로서는 큰 실책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늑장 대응을 한 것은 이런 전염병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 연유한 것이다. 또한 일본은 이런 소식이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 위험성이 있으므로 보도를 통제했다. 어쨌든 일본의 전염병 관리의 실패는 조선인들의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3차 감염은 1919년 1월 초 시작되었는데 그 피해는 2차 감염에 비해 약해졌다. 오히려 이 기간에는 조선보다는 일본에서 그 피해가 많이 나타났으며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도 조선의 소식보다도 일본의 소식을 더 비중 있게 다뤘다.

1918년 발생한 이 독감이 조선에 미친 피해는 매우 심각했다. 1919년 3월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내용에 의하면 당시 조선인구 1705만7032명 가운데 환자가 755만6693명이었고 이 중 사망자는 14만527명이며 사망률은 0.82명이었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1919년 3·1운동으로 인한 사망자가 7509명이었는데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3·1운동으로 희생된 사람보다 약 20배가 많은 것이다. (사망자 숫자는 당시 조선총독부에 의하면 553명이며 최근 국사편찬위원회는 900명이라고 발표하였음)
 

스페인독감과 3·1운동

우리는 여기에서 스페인독감 유행 가운데 일어난 3·1운동과 스페인독감의 연관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당시 조선총독부의 전염병 예방 조치의 실패는 조선을 새로운 건강한 사회로 만들기 위해 한일병합을 했다는 일본의 주장을 공허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총독부는 지금까지 조선인들에게 위생을 강조했지만 정작 자신들은 닥쳐오는 전염병의 위험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고 더 나아가 이것을 정당하게 보도하지 않고 은폐하려고 했다.

더욱이 이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기 보다는 조선인들의 비위생적인 행동이 이런 참사를 가져왔다고 책임을 전가했다. 이런 총독부의 태도는 많은 조선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결국 독립만세 운동에 나서게 했다고 보인다.

3·1운동은 바로 이런 어려운 상황 가운데 우리의 애국자들이 독립운동을 했던 것이다. 사실 전염병이 본격적으로 확산되던 1918년 가을 상해 한인교회를 섬기던 조지 피치(George F. Fitch) 선교사와 여운형은 평양의 선천에서 열리던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 참석해 당시 국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한국 사회와 교회에 전달했다. 당시 전염병만이 한반도에 온 것이 아니라 전쟁이 끝나가고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다는 소식도 함께 왔다.

그 뒤 한반도에는 전염병의 소식 못지않게 세계 정세가 국내에 소개되었다. 1918년 11월 11일 독일은 미국에 항복했고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의 정신에 기초한 민족자결주의를 중심으로 새로운 국제질서를 확립하려고 한다고 천명했다. 조선의 독립을 바라는 애국지사들에게는 이것은 꿈에도 그리던 소식이었다.

특별히 미국에서 이승만과 안창호를 중심으로 하는 교포들의 독립운동은 일본에 전해졌고 일본의 유학생들은 여기에 자극을 받아 2·8독립선언을 하게 되고, 동시에 이들은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이런 소식을 전하며 독립운동을 일으킬 것을 요청했다.
 

1919년 3·1운동과 2020년의 새로운 선택

1919년 초 스페인독감이 일본에서 강하게 진행되던 3차 감염이 진행되는 기간에 일본의 유학생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현해탄을 넘어와 조선의 지도자들에게 국제 정세를 설명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호소했다. 일본 한인 유학생들은 스페인독감의 위험 가운데서도 민족의 독립의지를 온 세상에 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국제사회의 소식을 들은 조선인들은 전염병의 악몽에도 불구하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렇게 한민족의 최대 독립운동인 3·1운동은 전염병의 위협 가운데 여기에 움츠리지 않고 일제와 용감하게 맞서 싸운 애국지사들이 일으킨 것이다.

1918년 세계에는 스페인독감으로 온 세계가 요동쳤다. 조선총독부는 이 스페인독감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민심은 동요했고 이것은 다른 여러 요인들과 함께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 반감을 갖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새로운 소문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였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서 숨죽이고 살던 조선인들은 이 새 소문에 희망을 걸었다. 1919년 봄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대한독립만세가 외쳐졌고 남녀노소 모두가 일어섰다. 비록 이 꿈은 당장은 이뤄지지 못했지만 1945년 일제는 멸망했고 1948년 대한민국은 탄생했다.

2020년 봄 전 세계에는 다시금 무서운 전염병의 소문이 돌고 있다. 마크 립시치 하버드대 감염학 교수는 전 인류의 40%에서 60%가 1년 이내에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릴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백신은 개발되고 있고 이 전염병은 언젠가는 극복될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중국의 부상으로 인한 새로운 냉전체제의 등장이며 이로 인해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전체주의가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전체주의는 전염병 예방을 명목으로 더 강화될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가 염려해야 할 것은 코로나19로 인한 감염만이 아니라 포퓰리즘에 빠져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전체주의의 수렁에 들어가 인류 역사의 후퇴를 야기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년 한국인들은 전염병의 위험 가운데서도 미국 중심의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선택했는데 오늘의 한국인들이 이런 코로나19의 소문 가운데 정신을 잃고 역사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잘못된 선택을 하지나 않을까 염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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