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AI시대 사람의 조건 휴탈리티....빅데이터를 이기는 인간의 조건
[신간] AI시대 사람의 조건 휴탈리티....빅데이터를 이기는 인간의 조건
  • 김민성 미래한국 기자
  • 승인 2020.03.24 14: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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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많은데 쓸 만한 인재가 없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해마다 열리는 수많은 채용박람회장은 늘 인산인해이고, 학력도 높고 스펙 좋은 사람들이 넘쳐나는 데도 말이다. 《AI시대 사람의 조건 휴탈리티》 이 책에서는 인재는 누구인지 인재라면 갖추고 있어야 하는 본질적인 역량은 무엇인지부터 알아나간다.

인재라면 누구나 갖추고 있어야 하는 본질적 역량은 기술 역량과 해석 역량이다. 기술 역량은 외부로부터 지식을 수용하고 이를 활용해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능력을 말하고, 해석 역량은 경험으로부터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의미 체계를 만들고 이를 통해 변화에 주체적으로 대응해나가는 능력을 말한다.

기술 역량이 데이터, 알고리즘, 생명공학을 통해 보다 나은 슈퍼 기계를 만들어내는 데 집중한다면 해석 역량은 슈퍼 기계와 우리의 관계는 어때야 하며, 슈퍼 기계를 어떤 용도로 누가 어디에 어떻게 사용할지를 논의하고 결정하는 능력이다. 기술 역량이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에 대한 것이라면 해석 역량은 우리의 어떤 욕구가 얼마나 충족되는 게 바람직한지에 대한 것이다. 이런 해석 역량은 감수성(sensing)과 감지성(sense making), 두 가지로 대별된다. 감수성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복잡하고 다양한 변화를 받아들이는 섬세한 촉과 같다면, 감지성은 복잡하고 애매모호한 상황 속에서도 의미를 만들고 연결하는 능력이다.

이렇게 볼 때 기술 역량은 지속적으로 개선돼야 하지만 해석 역량은 갈수록 세련돼져야 한다. 인재라면 어때야 할까? 업데이트되는 지식과 기술을 잘 소화해 실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활용할 수 있는 사람, 계속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자신과 세상이 맺어야 할 유의미한 관계를 주체적으로 형성해나가는 사람이 바로 인재이다. 이에 따라 AI시대의 중심에 서 있는 우리는 배우고(learning), 배운 것을 폐기하고(unlearning), 새로 배우는 것(relearning)을 지속할 수 있어야 한다.

기계, 데이터, 알고리즘에게 미래의 주인공 자리를 빼앗긴 우리 인간의 모습은 〈루시〉, 〈어벤져스〉와 같은 영화를 통해 만나볼 수 있다. 영화 속 세상만큼이나 현실 세계의 변화도 무섭도록 빠르다. 이런 기세와 속도라면 머지않아 컴퓨터 프로그램이 대부분의 인간을 직업 시장에서 몰아내고, 세계의 부와 권력은 슈퍼 기계를 소유한 집단이나 개인의 손에 들어갈지도 모른다. 그러면 아마도 전례 없는 사회적 불평등이 발생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여전히 우위에 있는 우리 고유의 영역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AI시대에 살아남는 방법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각각의 개별자, 즉 개인으로 존재한다. 개인(individual)이라는 영단어의 의미는 글자 그대로 ‘더 이상 나뉠 수 없다’는 뜻으로 다른 이들과 구분되는 독특한 완전체라는 말이다.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자아이고 거기서 세상의 모든 의미와 권한이 나온다. 개개인의 독특함(unique)은 바로 경험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대목에서 비로소 도드라진다. 데이터화되지 않기에 슈퍼 기계가 원천적으로 범접하기 어려운 우리만의 청정 지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이 진행되는 바로 그 지점, ‘감지(sense making)’가 시작되는 바로 그곳이다. 기술이 진보해도 여전히 주목받아야 하는 인간의 능력이 바로 이것인 것이다.

휴탈리티(hutality)는 우리 인간 고유의 속성을 뜻하는 휴머니티(humanity)와 인재의 잠재성을 의미하는 탤런트(talent)를 합해 인간의 본질, 기계와 달리 우리만 가지고 있는 해석 역량, 우리 안에서 나오는 인재성을 뜻한다. ‘휴탈리티’는 슈퍼 기계의 진보에 방향을 제시하고 미래에 있을 인간 경험의 질감을 풍성하게 만들어줄 해석의 힘을 가능하게 해준다. 빅데이터를 이기는 인간의 조건인 해석과 의미 연결은 휴탈리티를 통해 기능하게 된다.

아이폰을 처음 개발할 당시 애플의 직원들은 주당 100시간씩 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장시간 근로에 대한 불평불만을 하지 않았다. 모두 자발적으로 일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컴퓨터와 폰과 인터넷을 한 사람 한 사람의 손 안에’라는 신념을 이 세상에 실현하려는 내적 동기(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세상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하고 싶은 성장, 존중, 기여 및 관계 욕구)로 충만해 있었고, 그 일에 스스로(자율성 욕구) 몰입했다. 근로 시간의 길고 짧음에 대한 시시비비는 그들에게 의미 없었다.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하나하나의 과정을 통해 그들은 평범한 존재의 순간을 넘어 더 높은 수준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느끼며 이를 만끽했다.

20세기 미국의 화가이자 미술 교사였던 로버트 헨리(Robert Henri)는 내적 욕구의 진수를 엿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림 그리기의 목적은 그림을 만들어내는 데 있지 않다. 혹시 그림이 만들어졌다면 그것은 부산물일 뿐이며, 그리기 과정이 유용하고 흥미롭고 가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진정한 예술 작업의 목적은 언제나 평범한 존재의 순간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존재하는 것, 그 순간에 이르는 데 있다.”

그의 말을 단어만 조금 바꿔보면 아래와 같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일하는 목적은 성과를 만들어내는 데 있지 않다. 혹시 성과가 나왔다면 그것은 부산물일 뿐이며, 일하는 과정이 유용하고 흥미롭고 가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진정한 일의 목적은 언제나 평범한 존재의 순간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존재하는 것, 그 순간에 이르는 데 있다.’

내면의 동기부여 상태는 어떤 행동 그 자체에 완전히 빠져드는 것이지, 어떤 목표를 달성하는 것과는 무관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어떤 외부의 조명에도 여과 없이 우리를 맡겨서는 안 된다. 오직 내 안의 것들만이 나를 움직일 수 있도록 허락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그러려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의 내적 욕구는 무엇인지, 그것이 외적 욕구와 자극들에 억눌려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한다. 나의 안으로부터 울려 나오는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실제로 우리는 본질을 캐내는 질문보다는 현상을 확인하는 질문을 압도적으로 많이 주고받으며 살고 있다. 하지만 양은 적더라도 우리의 삶에서 진보를 일궈내는 것은 현상을 확인하는 질문이 아니라 본질을 깨내는 질문이다. 삶의 동력을 주고 의미 있는 여정을 계속하도록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많이 해야 한다.

본질적 자문과 이에 대한 성찰이 습관으로 자리 잡은 사람은 삶을 이끄는 화수분 같은 동력이 흘러나온다. 그 동력은 몰입의 강을 만들고 창의의 바다로 연결되며 나의 ‘오리진(Origin)’을 끌어낸다. 이때 우리는 AI시대 생존력인 휴탈리티를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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