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논단] 대한민국 출발점 5·10선거
[역사논단] 대한민국 출발점 5·10선거
  • 박명수 서울신대 명예교수·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 승인 2020.05.01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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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7월 서울의 미소공동위원회회담에서 대화를 하고 있는 미소 대표들. 하지 중장(좌) 소련 레베데프(중)스티코프(우)
1947년 7월 서울의 미소공동위원회회담에서 대화를 하고 있는 미소 대표들. 하지 중장(좌) 소련 레베데프(중)스티코프(우)

1980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진보그룹의 한국 현대사연구는 민족의 통일을 가장 중요한 지상과제로 제시하면서 1948년 남한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것은 이런 통일에 대한 가장 중요한 방해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승만은 반통일세력의 상징이요, 김구는 통일세력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이들은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파들이 정권을 잡아 통일을 이룩해야 했다고 본다.

분단사관에서 건국사관으로

하지만 우리는 1948년 설립된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이런 대한민국은 실패한 나라가 아니라 성공한 나라이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이런 대한민국이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해 왔는가는 설명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해방 이후 한국사를 남북의 분단과정보다는 대한민국의 형성과정에 초점을 맞춰 설명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승만은 대한민국 건립에 중요한 공헌자이며 김구는 이런 대한민국 건국과정에서 제외된 인물이다.

우리는 이런 역사관을 갖고 해방 3년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해방 3년 동안 자유민주주의 세력은 공산주의 세력을 극복하고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던 것이다. 미국은 원래 소련과 함께 미소공동위원회를 만들고 한반도에 어느 정도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가미한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고자 했다. 하지만 미국은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이것이 실현 불가능한 일임을 알았고, 오히려 유엔을 통해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들려고 했다. 이런 과정에서 미국은 이승만과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반도의 운명: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유엔으로

오늘의 대한민국 뿌리는 1919년 3·1운동에 있다. 1919년 3월 1일 우리 민족은 대한독립만세를 불렀고 같은 해 4월 10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웠다. 하지만 이렇게 세워진 임시정부는 여러 가지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일제의 억압 때문에 전 국민의 의사가 집약된 대의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0조는 빠른 시일 내에 국토를 회복하고 그 후 1년 내에 선거를 통해 국회를 구성해서 정식정부를 세울 것이라고 선포했다.

1945년 일제의 강점기를 끝내고 해방을 맞이했을 때 우리의 희망은 빨리 선거를 통해 국회를 구성하고 정식정부를 세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을 종식시킨 것은 우리의 독립군이 아니라 미국이었고 그 미국은 소련과 같은 연합국이었다. 따라서 해방 후 한반도의 운명은 이들 국가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해방 직후 한반도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외상회담이 열렸고 여기에서 한반도에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기 위해 임시정부(당시 중경에 있던 임시정부가 아닌)를 구성하고 3년 동안의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을 결의했다. 그리고 이것을 논의하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이하 미소공위)를 시작했다.

하지만 미소공위는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 모스크바 3상회의 이후 미소공위는 한 번의 예비회의와 2번의 정식회의를 했지만 하나도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우선 미국과 소련은 1946년 초 예비회담을 열어 38선 철폐를 논의했지만 소련의 반대로 아무런 결론을 내지 못했다. 미국은 먼저 38선을 철폐하자고 주장했지만 소련은 먼저 정부를 수립하자고 맞섰다. 1946년 3월에 열린 1차 회의에서 미국과 소련은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한국인 대표를 선출하는 문제로 서로 대립했다. 소련은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우파들은 협상에서 제외시키자는 것이었고 미국은 민주국가는 표현의 자유를 인정해야 하므로 찬반과 관계없이 우파인사들도 여기에 참여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소련은 우파인사 특히 이승만과 김구를 제외하고 친소정부를 구성하려 했고 미국은 이에 반대했다. 결과는 결렬이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은 전후 질서를 소련과 공동으로 이끌어가자는 초기의 입장을 버리고 1947년 봄부터 소련의 확장을 막아야겠다는 소위 봉쇄정책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 봉쇄정책은 유럽에서부터 시작되었고 한반도에서는 다시 한번 소련과의 협상이 시도되었다. 이렇게 해서 열린 것이 1947년 7월 열린 제2차 회의였다. 원래 이 회의는 미소가 과거 신탁통치에 대한 찬반과 관계없이 임시정부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약속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회의가 시작되자 소련은 현재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단체는 참여할 수 없다고 주장해 다시금 이승만과 김구를 배제시키고자 했다. 미국은 이런 입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제2차 회담도 결렬되고 말았다.

미국은 한반도 문제는 미소 간에 해결할 수 없다고 결론짓고 이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엔은 전후 점령지역을 전략지역과 비전략지역으로 구분했는데 전략지역은 전쟁으로 점령한 지역, 비전략지역은 그렇지 않은 지역으로 나누고, 전자는 참전국의 합의에 의해, 후자는 유엔의 결의에 의해 통치하도록 했다. 미국은 한국을 후자로 이해한 반면에 소련은 전자로 이해했다. 여기에 의거해 미국은 1947년 9월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한 것이고 물론 소련은 여기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1947년 11월 14일 제2차 유엔총회는 유엔임시위원단을 구성해 유엔감시하에 남북한 전체의 대표를 선출해야 하며 이들과 함께 한국의 독립을 상의하고 이들로 구성된 국회를 통해 중앙정부(national government)를 구성할 것을 결의했다. 선거방법은 보통 비밀선거로서 인구비례로 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헌장이 추구했던 그 내용이 국제적인 차원에서 결의된 것이다. 물론 소련은 여기에 반대했다.

유엔 총회의 결정과 소련의 북한 입국거부, 그리고 한국의 정치 상황

유엔 총회는 이 문제를 다룰 임시위원단에 미국의 일방적인 주도를 견제하기 위해 중립국 인사를 포함시켰다. 참여국은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중국, 엘 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후에 시리아)의 8개국이다. 그리고 앞으로 여기에 대해 발생하는 문제들은 유엔 소총회에서 다루도록 결의했다.

유엔임시위원단을 구성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고 이들이 한반도에 도착해 사무를 시작한 것은 1월 12일이었다. 이들이 한반도에 와서 처음한 일은 남북의 미소 양군대표들과 선거에 관한 일정을 상의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미군은 적극적으로 호응했으나 1월 22일 소련은 여기에 대해 거부하는 입장을 보냈다. 이렇게 되자 유엔 총회가 원래 결의한 남북한 전체 선거를 통한 중앙정부 수립은 차질을 빚게 되었다.

이제 중요한 과제가 목전에 놓이게 되었다. 유엔임시위원단은 한국인들의 의견을 들었다. 이승만은 선거가 불가능한 북한은 놔두고 전체 인구의 3분의 2에 이르는 남한만이라도 선거를 해서 중앙정부를 구성하자고 주장했으나 김규식은 남북이 다 같이 선거할 수 있도록 더 노력할 것을, 김구는 미소 양군이 철수한 다음에 남북 요인회담을 통해 선거를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 사실 김구의 주장은 북한의 주장과 같은 것이었다.

이렇게 우익 3영수의 입장이 밝혀지자 여기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김구에 대한 강력한 반발이었다. 지금까지 김구를 강력하게 지지했던 서북청년단을 중심으로 북한 월남인들이 김구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고 김구가 이승만과 함께 만들었던 독립촉성국민회의도 강력하게 반대했다. 심지어 자신의 텃밭인 한독당 내에서도 안재홍을 중심으로 반대가 일어났으며 원래 김구의 강력한 지지세력이었던 중국 정부도 김구를 반대했다. 나중에는 당시 가장 강력한 청년단체였던 이청천의 대동청년단도 김구를 반대했다. 당시 남한의 일반적인 분위기는 소련이 북한에서의 총선거를 반대하는 상황에서 남한만이라도 총선을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국민 대다수의 뜻과 지도자들의 뜻이 서로 상이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 남한의 김구·김규식과 북한의 공산세력 사이에 서로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 미군정은 남한에서 더 이상 지지 기반을 확보하지 못한 양김이 북한과의 관계에서 자신들의 정치적인 활로를 찾아보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북한도 김구와 김규식을 이용해 남한에 단독정부가 세워지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대중들은 이런 것들이 모두 북한과 소련의 단독정부 수립반대 작전에 김구와 김규식이 휘말리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이들에 대한 대중들의 지지는 악화되었고 이들이 대중들 앞에 나설 수 없는 상황 가운데 이르렀다.

하지만 김구와 김규식의 반대는 유엔임시위원단 내의 반미세력에게 좋은 빌미를 줬다. 이 반대세력은 원래 남북한총선거를 통한 중앙정부 수립이 유엔의 결의인데, 이것이 소련의 반대로 이뤄질 수 없으므로 다시 유엔 소총회에 이 문제를 제기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자고 주장했다. 여기에 앞장 선 것이 호주 대표였다. 호주는 2차 세계대전에 참여했지만 여기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얻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결국 이 문제는 1948년 2월 유엔 소총회에 회부되었다.

유엔 소총회가 열리게 되자 남한의 총선거를 추진하는 미군정과 이승만은 남한 사람들이 이것을 지지한다는 것을 유엔에 알리려고 했다. 우선 이들은 양김에게 협조를 부탁했지만 이들은 끝끝내 여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유일한 입법기관인 입법의회는 의장인 김규식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총선거를 지지하는 결의를 했다. 아울러 수많은 단체들이 현재의 시점에서 남한만이라도 총선을 실시해 독립국가를 만드는 것이 옳다고는 주장을 유엔 소총회에 보냈다.

1948년 5월 10일 선거를 통해 대한민국의 제헌국회가 구성되었다.
1948년 5월 10일 선거를 통해 대한민국의 제헌국회가 구성되었다.

유엔 소총회 결의와 1948년 3·1절

당시 유엔임시위원단에는 친미 세력이 중국, 프랑스, 필리핀, 엘 살바도르였고 호주, 캐나다, 인도는 영연방에 속해 있으며 시리아는 반미적인 태도를 보였다. 영연방에 속해 있던 나라들이 처음에는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입장을 갖고 있었으나 미국의 외교적인 노력으로 인도가 지지를 표하고 캐나다가 중립으로 돌아섰다. 당시 의장은 인도의 메논이었는데 그는 유엔 소총회에서 유엔임시위원단을 대표해 연설해야 할 입장이었다. 메논은 처음의 압장을 바꿔 미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연설을 했다.

당시 유엔임시위원단은 소총회에 첫째,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 둘째, 자유와 독립을 다룰 대표만 선출 셋째, 남북 요인회담을 통하여 총선거 실시 넷째, 철수 등 네 가지 안을 제출했는데 여기에서 실질적으로 고려한 것은 첫 번째와 두 번째였다. 남북요인들을 통한 총선거는 국제무대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미국은 제1안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제출했는데 그 내용은 남한의 총선거는 남북한 총선거와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우선 가능한 남한지역만 선거하고 그 다음에 상황을 가능하게 만들어 북한지역도 선거를 하게하는 하나의 중앙정부를 세우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오랜 토론과정을 거쳐 2월 26일 투표에 들어갔는데 그 결과는 찬성 31표, 반대 2표, 기권 11표로 미국의 안이 통과되었다.

이렇게 회의가 끝난 다음 메논은 선거 결과를 한국 국민들에게 알리면서 한국은 오랫동안 독립을 갈구했으며, 정치적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모두 독립을 요구하고 있고, 따라서 우선 독립국가를 원하는 남한 국민의 염원을 유엔은 받아들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하면 유엔은 몇몇 정치지도자들의 의견보다는 남한 전체 국민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런 결의는 한반도의 통일국가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중앙정부가 세워지면 이것이 핵심이 되어 정당 사상을 초월하여 [남북한의] 중앙정부를 수립하는 전국선거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하면 남한의 단독선거는 분단의 기초가 아니라 통일의 기초라는 것이다.

1948년 3월 1일은 한민족에게는 매우 기쁜 날이었다. 이승만은 이 소식을 듣자 담화를 발표하고 이번 유엔 소총회의 결의로 1919년 기미년에 시작한 대한민국의 건국운동이 이제 성공하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정부는 기미년에 설립된 한성정부를 계승하여 통일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3월 1일 오전 열린 기념식에서 이승만은 자신과 미군정이 추진하는 정부는 단독정부가 아 일의 출발인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헌법은 자유민주주의적인 기본질서에 입각하여 평화통일을 이룩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정신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국민 대다수의 뜻과 국제사회의 결의에 따라 만들어진 정통성이 있는 정부이다. 유엔은 한반도에 통일정부가 수립되기를 원했고 그 과정은 정당힌 민주선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한은 이런 유엔의 뜻에 따라 국민의 절대다수가 참여한 가운데 1948년 5월 10일 국회의원선거를 했고 이들이 헌법을 만들고 대통령을 선출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이런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북한에도 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민족 앞에 놓여 있는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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