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나 욕할 걸’ ‘대통령 이승만’은 왜 잊혀졌나
‘알고나 욕할 걸’ ‘대통령 이승만’은 왜 잊혀졌나
  • 미래한국 편집부
  • 승인 2020.06.08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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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보길 뉴데일리 회장의 신간 『이승만 현대사 위대한 3년 1952~1954』

1954년 7월 28일, 워싱턴의 미 의회 상하 양원 합동회의. 기립박수를 포함해 서른세 차례나 박수가 쏟아진 끝에, 연설을 마친 여든 살 노신사가 연단을 내려선다. 닷새 뒤 뉴욕 브로드웨이의 유명한 ‘영웅 거리(Canyon of Heroes)’에서는 이 노신사를 위해 색종이 가루가 눈처럼 흩날리는 가운데 퍼레이드까지 벌였다.

극동 한귀퉁이, 플로리다주의 3분의 2쯤 되는 나라의 대통령이라고 했다. 연설이 있던 날은 그 나라에서 휴전협정이 맺어진 지 만 1년하고 하루 지난날이었다. 반만년 가난 위에 전화(戰禍)까지 덮쳐 희망조차 없어 보이는 나라였다. 그런 나라를 위해 세계 최강대국 미국이 유엔을 움직여 전투병을 보내게 하고, 도무지 체급이 안 맞는 상호방위조약을 맺게 하고, 국빈으로 초청해 의회 연설도 모자라 영웅 퍼레이드까지 열어 주다니,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미·소·중·일을 통틀어 이런 대접을 받은 남북 지도자는 전에도 없었고 이후로도 없었다. 이승만(1875~1965)이었다.

이승만 포럼 공동대표·건국이념보급회 회장 인보길 뉴데일리 회장이 펴낸 『이승만 현대사 위대한 3년 1952~1954』(인보길 지음, 기파랑, 2020)은 대한민국 건국과 초대 대통령 취임(1948) 이후인 ‘이승만 현대사’를 가리키며 묻는다.

저자는 자유민주주의의 주춧돌을 새로 놓았고 나라와 집의 경제 기둥을 새로 세우는 한편 나라집의 자유민주와 자유경제를 지켜 줄 철벽 담장을 쌓았다는 점에서 1952~1954년의 세 해를 '위대한 3년'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기간 발생한 '부산·정치 파동(1차 개헌)'과 '사사오입 개헌 파동(2차 개헌)'을 각각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자유시장경제·국민투표 개헌'으로 칭하면서 역사 재해석을 시도한다. 지금 '386 출신들'이 걸핏하면 내세우는 직접민주정치 제도는 다름 아닌 이승만이 처음 도입했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또 대한민국 건국이 1948년이냐 1919년이냐는 논쟁에서 후자를 주장하는 세력은 한성임시정부부터 상하이 통합정부까지 1919년의 모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첫 국가수반은 이승만이었다는 사실은 애써 외면한다고 주장한다.

이승만이 임정 대통령에서 탄핵 면직된 1925년부터 건국 전까지를 제외하면 1919년부터 1960년까지 대한민국 대통령은 으레 이승만이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1896년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에서 입헌군주제를 처음 주장했으며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를 기회 삼아 2·8 독립선언과 3·1 만세운동을 기획한 것도 이승만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저자는 "우리가 이승만을 말하기를 꺼리는 이유는 독재자라고 잘못 배웠기 때문"이라면서 4·19는 '이승만 최후의 성공작'이라는 해석을 내놓는다. 4·19 1주일 전부터 선거 부정이 있었음을 늦게나마 알아차린 이승만이 자진 하야를 먼저 거론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다.

기파랑. 398쪽. 1만9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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