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추적] 6·25전쟁 70주년, 6사단의 군번 없는 소년병
[발굴추적] 6·25전쟁 70주년, 6사단의 군번 없는 소년병
  • 고성혁 미래한국 군사전문기자
  • 승인 2020.06.25 07: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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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사단 마크가 세겨진 철원읍 소이산 전망대에서 본 철원 평야

6·25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에 즈음해서 6월 13~14일 양일간에 지인들과 함께 중부전선 6·25 격전지 현장을 답사했다. 이틀 만에 용문산지구전투, 춘천지구전투, 파로호전투, 사창리전투, 저격능선전투 현장까지 돌았다. 격전지 현장 답사를 주선한 길도형 장수하늘소 대표의 감회는 남달랐다.

화천 사창리지구 전투전적비 앞에 선 길도형 대표는 마치 아버지 산소를 찾은 듯 조용히 둘러봤다. 50대 중반을 넘어서는 길도형 대표의 눈에는 17세 ‘소년병’이 그려지고 있었다. 17세 소년병은 1951년 4월 22일 바로 이곳 사창리에 있었다. 그 소년병은 바로 길도형 대표의 선친이다.

대한민국 육군 6사단 7연대 3대대 12중대 군번 0742471 길운효. 길도형 대표는 아버지가 겪은 6·25전쟁을 이야기할 때 선친을 소년병이라고 칭한다. 17세의 병사이니 소년병이 딱 맞는 말이기도 하다. 길도형 대표의 선친이다. 소년병은 17세 어린나이에 군대 하우스보이처럼 생활했다. 전쟁이 터지자 군복을 입고 총을 들었다.

군번 없는 소년병으로 현지입대를 한 셈이다. 김종오 장군이 지휘하는 6사단은 춘천에서 북한 인민군을 효과적으로 막았다. 전쟁 초기에 국군 중 유일하게 북한군의 진격을 막은 사단이다. 그 중심에는 7연대가 있었고 그 자리에 역시 소년병이 있었다. 소년병은 6사단 7연대를 따라 압록강 초산까지 올라갔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압록강물을 전했다는 부대가 바로 육군 6사단 7연대다. 그리고 중공군 개입으로 6사단은 후퇴하여 1951년 4월 화천의 사창리에 방어진을 형성하고 있었다. 군번 없는 소년병은 1951년 4월 용문산 전투 승리 후 정식으로 소년병은 대한민국 육군 병사가 되었다. 군번을 받고 난 뒤 사창리전투, 용문산전투, 파로호전투까지 다 치른 소년병은 1955년 3월 25일 만기제대했다.

길도형 대표는 선친으로부터 6·25전쟁 이야기를 무척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학생 시절에는 그저 옛날이야기로 치부하기도 하고 대학생 시절에는 한마디로 ‘국방부스러운 이야기’라고 귓전에 흘렸다고 한다. 그러나 중년이 훌쩍 넘은 나이에 선친의 이야기를 되새겨 보니 선친이 겪은 전투는 한국전쟁사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길 대표는 선친이 격은 6·25전쟁을 책으로 남기는 작업에 착수했다. 출판사 대표로서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길 대표는 소년병이 생사를 오간 사창리전투 현장의 전적비를 아버지의 묘비처럼 바라봤다.

1951년 4월 22일 6사단의 체육대회

김종오 장군에 이어 장도영 장군이 6사단을 지휘했다. 1951년 4월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가 예상되는 가운데 6사단은 사창리에서 방어진을 구축하고 있었다. 1951년 4월 22일 장도영 사단장은 장병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사단 체육대회를 열었다.

전장의 긴장감으로 인한 피로를 잠시 잊기 위한 망중한의 조촐한 체육대회였다. 각 연대별로 할당 선발된 장병들을 공터로 집합케 하여 씨름과 기마전, 완전군장 단축마라톤 대회 정도가 순차적으로 진행됐다. 당시로서는 큰 키인 173의 소년병은 임부택 중령의 7연대를 대표하는 단축마라톤 선수로 나갔다.

전투 현장인 만큼 완전군장에 소총을 멘 채 달리는 단축마라톤이다. 입대한 지 1년이 지나 18세가 된 소년병은 사창리의 시골길을 몇 바퀴 도는 코스에서 1등으로 골인했다. 소년병에게는 사단장(장도영) 표창장이 수여됐다. 표창장을 받은 기쁨은 너무도 짧았다.

그날 저녁 중공군이 들이닥쳤다. 땅거미가 지고 어둑해질 무렵 북쪽 다목리고개와 동쪽 화천천 하류 방면에서 요란한 ‘따콩’ 소리가 들려 왔다. 포탄 폭발음과 화염이 임시로 차려진 군영을 뒤덮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사창리 분지를 감싼 능선들에서는 꽹과리며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6사단 전체가 사창리 비좁은 분지에 갇힌 채 중공군에게 포위된 것이다. 중공군 20군 예하 3개 사단, 40군 예하 1개 사단 등 무려 4개 사단이 한국군 6사단 전면과 측면을 기습공격했다. 중공군의 공격은 6사단 7연대 정면에 들이닥쳤다. 장도영 장군이 지휘하던 6사단은 지휘체계와 통신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뿔뿔이 흩어졌다.

장도영 사단장은 미군 등에서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중공군의 춘계 공세가 있을 것을 예상했다. 그에 따라 사단 전체 병력을 사창리에 집결시켜 적이 춘천과 가평으로 진출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작전을 짜고 있었다. 그런 중에 가진 체육대회와 전장에서의 조촐한 회식으로 조금은 느슨해진 장병들은 각자의 군영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휴식을 깨는 요란한 따발총 소리와 혼을 빼는 나팔소리에 병사들은 물론이고 지휘를 해야 할 장교들까지 군장에 개인화기까지 팽개치고 사창리 분지의 남쪽 골짜기를 향해 달음질치기 시작했다. 장도영 사단장은 다급하게 각 부대별 현 위치 사수를 명령했다.

그러나 회식과 휴식 중에 기습을 당한 장병들은 각종 화포며 개인 장비들을 팽개친 채 퇴로를 찾아 내달렸다. 집결지를 화악산 일대로 정하고 삼삼오오 각자 패주했다. 그래도 재집결에 성공해 낙오한 병력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4월 25일에는 6313명이 재집결해서 사단 해체를 막을 수 있었다. 1951년 4월 22일 저녁 무렵 시작된 사창리전투는 캐나다-호주-뉴질랜드 군으로 편성된 영연방 27여단과 미 2사단, 40사단, 213야전포병대대 부대원들의 분전에 힘입어 25일 중공군 주력이 수많은 사상자를 내거나 포로가 된 가운데 퇴각하면서 종료됐다.

사창리전투 직전 체육대회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우리 전사기록에는 없다. 패배의 기록을 감추는 일종의 자기 기만이 있기 때문이다. 영국군 전사기록에는 이때 사창리에서 한국군 6사단이 연기처럼 사라졌다고 묘사한다. 중공군의 1951년 4월 춘계 대공세는 한국군에 씻을 수 없는 패퇴의 기록을 남겼다.

1951년 4월 사창리에서 한국군 6사단을 패퇴시킨 중공군 9병단은 한 달 뒤인 5월 16일에는 강원도 동부전선 오마치고개 일대에서 국군 3군단을 집중공략했다. 3군단이 와해되는 국군 최대의 패전지 현리전투다. 사창리전투와 현리전투에서 국군이 무너지자 유엔군사령부는 육군본부의 작전권을 박탈해버렸다.

전선 전면에서 한국군을 모두 빼고 전선 뒤로 물렸다. 6사단은 용문산까지 후퇴했다. 중공군은 한국군이 약한 고리임을 파악하고 한국군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용문산에 6사단을 중공군은 또 공격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사창리 전투 전적비와 당시 전황도. 6사단 2연대와 7연대 정면으로 중공군 군단급 병력이 공격했음을 알 수 있다.
사창리 전투 전적비와 당시 전황도. 6사단 2연대와 7연대 정면으로 중공군 군단급 병력이 공격했음을 알 수 있다.

사창리의 패배를 설욕한 용문산전투

장도영 장군은 6사단 2연대를 북한강을 관측할 수 있는 용문산 전면에 배치했다. 중공군 187사단, 188사단, 189사단 등 3개 사단이 공격했다. 용문산 골짜기로 밀고 들어온 중공군 3개 사단을 국군 6사단의 7연대와 19연대가 포위공격했다. 유엔군의 항공지원까지 얻으면서 말이다. 용문산전투에서 중공군 주력부대는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약 2만 명의 중공군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용문산에서 패한 중공군은 더 이상 남쪽으로 진격할 수 없었다. 용문산전투를 고비로 유엔군은 중공군을 북으로 밀어 올리기 시작했다. 6사단 7연대는 사창리전투의 설욕을 보기 좋게 한 것이다. 용문산에서 패주한 중공군은 화천 파로호까지 후퇴했다. 6사단은 중공군을 추격했다.

소년병 역시 중공군을 추격했다. 북한강 양안에는 중공군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5월 하순의 땡볕 아래 부패하면서 중공군 시체의 배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소년병은 ‘뻥’하는 소리를 들었다. 중공군 전사자의 몸뚱이가 터지는 소리다.

터질 때마다 옷섶을 비집고 내장이 쏟아져 나왔다. 살진 쉬파리 떼가 시체와 생사람을 가리지 않고 까맣게 달라붙었다. 6사단 공병부대원들이 중공군 시체를 공터로 옮겼다. 시쳇더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 소각했다.

중공군 킬러 육군 6사단

용문산전투에서 패주한 중공군은 화천 파로호 인근에 집결했다. 육군 6사단에도 새로운 명령이 하달됐다. 포위망을 뚫고 탈출해 온 중공군 패잔병들과 춘천 그리고 평창 속사리 방면에서 후퇴해 온 중공군 3개 군단이 파로호 남쪽 간동면 오음리 일대에 집결함에 따라 신속히 퇴로를 차단하라는 지시였다.

용문산전투 승리로 사기충천한 6사단은 1951년 5월 26일 파로호 일대의 중공군을 포위했다. 미 24사단 21연대, 미 7사단 7연대, 국군 6사단 19연대는 화천-춘천-지암리로 이어지는 축선을 완전 장악하고 중공군 3개 군단의 퇴로를 차단했다. 6사단 7연대는 패주하는 중공군 후미를 공략했다.

5월 28일 하룻동안 6사단 7연대는 중공군 3만8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파로호 전투에서 6사단은 총 6만2000여 명의 중공군을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았다.(군사편찬위원회). 이승만 대통령은 중공군 오랑캐를 물리친 것을 기념해 화천 대붕호를 파로호라고 명명하면서 6사단을 부대 표창했다.

파로호전투는 끝났지만 18세 소년병에게는 또 다른 전투가 기다리고 있었다. 중공군 시체처리였다. 말 그대로 산더미처럼 쌓인 중공군 시체였다. 더운 여름철이라 부패도 빨랐다. 6사단 7연대 병력 대부분이 시신 처리에 매달렸다. 병사들은 통나무를 이어 붙여 뗏목을 만들었다. 뗏목에 시신을 싣고 나룻배로 저수지 한가운데까지 끌고 가 수장시켰다.

시신이 떠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시신마다 묵직한 돌덩이를 달았다. 6월이 되자 부패한 시체가 물 위로 또 오르기도 했다. 중공군 시체가 가라앉은 파로호에서 잡은 물고기로 소년병이 속한 소대원들은 매운탕을 끓여 먹었다. 비위가 약한 소년병은 그 매운탕을 먹기가 역겨웠다. 배탈이 나기도 했다. 그렇게 소년병은 파로호전투를 기억했다.

인민군 6사단이 충청도 전라도를 휩쓸고 마산 진동리까지 진출해 대한민국을 사지로 몰아넣었던 사단이라면 육군 6사단은 중공군을 물리치고 대한민국을 구한 사단이다. 육군 6사단 청성부대는 육군 창설의 모체가 되는 부대이기도 하며 한국전 때부터 현재까지 거의 완편사단으로 지금껏 건재하다.

국군 6사단은 전쟁 초기 유일하게 북한 인민군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방어한 부대이다. 대한민국 육군 6사단은 중공군 킬러라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는 사단이었다.

진정한 숨은 영웅 소년병 길운효 이등중사의 병적확인서. 입대일자는 용문산전투 후 군번을 받은 날짜다.
진정한 숨은 영웅 소년병 길운효 이등중사의 병적확인서. 입대일자는 용문산전투 후 군번을 받은 날짜다.

우리 아버지들의 전쟁이야기 6·25

용문산전투와 파로호전투가 끝난 1951년 6월 6일, 7연대 3대대 12중대 주둔지 막사 앞에 모처럼 이발이며 면도를 하고 누추한 군복이나마 단정하게 차려입은 중대원들이 도열했다. 앞선 전투에서의 승리로 1계급 특진을 명받았던 장병들에게 진급 계급장이 수여됐다.

1950년 4월 우연히 군복을 입고 병영생활을 시작한 소년병에게도 그 날은 매우 특별한 날이었다. 소년은 호명과 함께 중대장 앞으로 나아가 섰다. 중대장이 직접 소년의 가슴에 일병 계급장을 달았다. 그리고 소년을 힘껏 끌어안으며 말했다.

“이놈, 고생했다. 장하다!”

성명; 길운효

입대일; 1951. 6. 6.

군번; 0742471

계급; 일병

소속; 7연대 3대대 12중대

사창리전투, 용문산전투, 파로호전투를 모두 치른 소년병은 그렇게 대한민국 육군 일병이 되었다. 그리고 이 날짜가 국방부가 정한 소년병의 공식 입대일이 되었다. 길도형 장수하늘소 대표의 선친이야기다. 전영준 푸른한국닷컴 대표의 선친도 6사단 장병으로 사창리전투를 겪었다.

전영준 푸른한국닷컴 대표의 선친인 전상윤 일등중사(원안)의 제대증서. 제대년도는 단기 4288년(1955년)이다. 사진은 사창리전투와 용문산전투를 치르고 난 뒤 찍은 기념사진이다. 당시 사창리전투에서 살아남은 대대내 병사는 10명 정도였다고 한다.
전영준 푸른한국닷컴 대표의 선친인 전상윤 일등중사(원안)의 제대증서. 제대년도는 단기 4288년(1955년)이다. 사진은 사창리전투와 용문산전투를 치르고 난 뒤 찍은 기념사진이다. 당시 사창리전투에서 살아남은 대대내 병사는 10명 정도였다고 한다.

우연찮게 마주앉은 길도형 대표와 전영준 대표는 선친들이 모두 6사단 소속으로 6·25전쟁을 겪은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전 대표의 전언에 따르면 사창리전투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선친은 그후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한다. 하늘이 도와 두 번째 사는 인생으로 여기고 삶에서 초연함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우파는 6·25전쟁 이야기를 할 때 장군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백선엽 장군의 다부동전투나 김종오 장군의 춘천방어전투가 그 예다. 그런데 나는 이런 식의 장군 중심의 전쟁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감흥이 크게 오지 않기 때문이다. 백선엽 장군이나 정일권 장군 이야기로 시작하면 좌파는 바로 친일논쟁으로 이야기를 흐린다.

그러나 일반 병사의 이야기로 하면 그런 논란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다. 그리고 더 실감 난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 공산주의가 얼마나 나쁜지 말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전쟁에 참여했던 일반 병사들의 이야기, 내 아버지가 겪은 전쟁 이야기, 지인들 선친이 겪은 전투 이야기가 더 가슴에 와 닿는다.

필자의 부친은 포항에서 6·25전쟁을 맞았다. 중학교 1학년 때다. 어려서 아버지가 겪은 6·25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다. 국민학교 다닐 때 6·25전쟁 글짓기는 늘 아버지의 전쟁 이야기가 단골 소재였다. 상도 받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아버지가 들려준 6·25전쟁 이야기는 그 어떤 전쟁영화보다 재미났던 기억이 있다.

무엇보다 뭉클했던 대목은 포항 중앙국민학교에 실려오는 부상병 이야기다. 손이 부족하던 때라 중학생이던 아버지도 부상병을 들것에 실어 나르는데 거들었다고 한다. 까까머리 중학생의 눈으로 본 6·25는 비명을 지르며 실려 오는 병사로 각인되었다.

중상자는 아무 소리 없이 실려 왔다고 한다. 부상병이 비명과 함께 찾는 이는 ‘엄마’였다고 한다. ‘엄마 엄마’ 하면서 울부짖다가 나중에 조용하다 싶으면 숨이 끊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 아버지 눈에 비친 6·25전쟁의 단면이다.

우리는 이제 책에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런 살아 있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가 겪은 이야기를 더 많이 발굴해야 한다. 대한민국을 지켜낸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를 말이다.

고성혁 미래한국 군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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