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논단] '재벌'은 한국에만 있는가
[미래논단] '재벌'은 한국에만 있는가
  •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20.06.29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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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10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대한민국 바로세우기 제3차 포럼 ‘재벌적폐 청산, 진정한 시장경제로 가는 길’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는 당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
2017년 1월 10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대한민국 바로세우기 제3차 포럼 ‘재벌적폐 청산, 진정한 시장경제로 가는 길’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는 당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

대한민국 국민들의 상식 가운데는 ‘재벌은 한국에만 있다’는 것이 있다. 흔히 진보 진영이나 노동계에서 그렇게 주장되며 그래서 영문으로도 ‘chae-bol’이라고 표기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우리가 잘 아는 듀폰그룹( Du Pont Group)은 150년의 역사를 가진 재벌그룹이다. 산하에 최대의 자동차 제조업체인 제너럴모터스(GM)과 록웰인터내셔널, 펜딕스의 두 항공회사 등 초대형 기업들을 두고 있다. 19세기 초 화약회사로 발족한 듀폰드느무르가 광산개발에 수반하는 화약 수요의 붐을 타고 화약 트러스트를 형성해 발판을 굳혔다.

이러한 가족경영회사(Family Own Business)는 특이한 것이 아니며 세계에서 공통적인 현상이다. 이 문제를 연구한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에 의하면 어느 나라든 창업기업의 85%는 가족의 자금으로 창업한다. 그렇게 창업에 성공하면 자연히 가족기업으로 지속적으로 존속, 발전하게 된다.

미국의 월마트, 포드자동차, 이탈리아의 피아트 그룹, 독일의 BMW 등 전 세계 기업 중 2/3가 가족기업이다. 미국 주가지수 S&P500 및 Fortune500 글로벌기업의 1/3 이상에 해당한다.

가족기업은 매출, 고용, 기업가치, R&D 투자 등에서도 비가족기업보다 우수한 성과를 도출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IBK은행 연구소에 의하면 전 세계적으로 이들 가족기업이 각국 GDP 대비 45~85%를 차지하며 일자리 창출의 45~80%를 담당한다.

독일 경영학자 헤르만 지몬 박사가 선정한 ‘히든챔피언’(hidden champion, 즉 규모는 작지만 틈새시장을 차지해 세계 최강으로 자리 잡은 기업)의 3분의 2가 가족기업이다.

최 교수는 “현대 기업은 주식이 널리 분산되고 전문경영인이 경영한다는 일반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세계적 기업 중 많은 기업이 가족 또는 국가가 경영하고 있는 형편”이라고 밝히고 있다.
 

한국의 재벌, 시대 상황이 만든 것

재벌(財閥)기업이란, 그 글자 뜻대로라면 ‘재계의 족벌’을 의미한다. 여러 계열사를 가족이 경영하는 대기업 집단을 의미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면 이런 한국의 재벌은 언제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한국에서 재벌이 탄생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72년 8월 3일 정부가 ‘경제의 성장과 안정에 관한 긴급명령’ 즉, 사채동결긴급조치를 선포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 조치의 골자는 기업과 사채권자의 모든 채권·채무관계는 1972년 8월 3일 현재로 무효화되고 새로운 계약으로 대체된다.

채무자는 신고한 사채를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조건으로 상환하되 이자율은 월 1.35%로 하는 한편 사채권자가 원하면 출자로 전환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8.3조치는 개인 금융시장 및 그 투자자들을 희생시키는 대신, 대기업을 구해준 것으로 평가한다.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원칙을 분명히 위반한 것이었다는 것. 그러나 이 조치가 없었다면 1973년과 1979년의 오일쇼크를 극복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데 대부분 경제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특히 출자전환 및 법인세와 소득세 감면으로 기업들이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을 경우 새로 회사를 만들었고 따라서 재벌들이 많은 계열사들을 만들게 되었다. 이러한 구조 하에 대기업그룹이 탄생할 수 있었는데 이 구조가 결정적으로 순환출자구조가 되었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재벌 대기업의 순환출자구조는 그 시대적 산물이었다는 점이다. 기업은 고유성과 계속성의 원리가 있기 때문에 각 나라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에 따라 그 형태나 상거래 관행이 진화적으로 발달하게 된다.

만일 그러한 기업의 형태가 더 이상 변화된 환경에 적응할 수 없다면 기업의 형태나 상거래 관행도 변화하기 마련이며 이러한 문제는 현실이 아닌 이상적, 추상적 규범으로 제어하기 어렵다는 점이 있다.

정치인들이나 관료, 사법부가 현실 속에서 진화되는 기업들의 속성과 원리를 무시하고 당위성에만 입각한 규범으로 기업들을 옥죌 경우 당연히 해당 산업과 경제는 발전할 수 없게 되는 원리가 우리 재벌기업들에도 적용되는 것은 당연하다.
 

가족기업이 성과 높아…헤지펀드들의 타깃

가족지배기업을 연구한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가족지배기업이 상대적으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에 따라 기업의 명예는 곧 가족 구성원의 명예로 간주되기 때문에 기업의 명성에 해가 되는 의사결정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점을 발견했다.

또한 가족지배기업은 긴밀한 가족 문화를 바탕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관료적인 성향이 약해 빠른 의사결정과 강한 위기 극복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여러 형태의 조사로 확인되어 발표되기도 했다.

물론 가족지배기업이라고 해서 모두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다. 가령 가족지배기업이어도 경영 총수가 제대로 경영수업을 받지 않은 경우라든지 가족내 분규가 존재하는 경우에 가족지배기업의 경쟁력은 당연히 낮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가족지배기업들은 대체로 전문기업이나 펀드가 경영하는 기업보다 생산과 효율, 고용면에서 성과가 좋은 것은 사실이다. 반면에 가족기업이 사모펀드와 같은 형태로 넘어가게 되면 장점은 급속하게 사라지는 것으로 조사됐다.

최근 워싱턴대의 에드 대한(Ed deHaan), 스탠퍼드대의 데이빗 라커(David Larcker), 시카고대의 찰스 매큘러(Charles McClure) 교수 등의 공동연구로 발표된 ‘2018년 ‘행동주의 헤지펀드 개입의 장기 경제적 결과’라는 논문에 따르면 행동주의 헤지펀드의 경영 개입은 주가와 기업 성장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행동주의 펀드가 주주가치 제고 등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시가총액 4000만 달러(약 454억 원) 이하 소기업에만 해당한다고 분석했다.

전체 조사 대상 1964개 기업의 80%를 차지하는 시총 4000만 달러 이상 중·대기업의 단기 수익률은 4.4%였지만 장기 수익률은 -1.6%로 시간이 흐를수록 줄어들었다. 결국 행동주의 펀드의 기업 공격이 단기 차익을 거두는 데 효과적이란 사실만 검증된 것이다. 다만 조사 대상의 20%인 소기업은 단기(9.3%), 장기(35.9%) 모두 높은 수익률을 기록했다.

행동주의 헤지펀드가 타깃으로 삼는 기업은 비윤리적이고 법적으로 문제가 많은 기업을 대상으로 한다는 말은 거짓일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수익성이 좋으나 업계 대비 배당성향이 낮고 현금보유 비중이 높은 기업을 노린다는 것이 진실일 수 있다. 사실 헤지펀드들은 지금까지 우량한 기업들을 대상으로만 작전을 펼쳐왔다.

이들은 저렴한 가격으로 주식을 대량 확보한다. 이들이 확보한 주식으로 ‘지속가능한 회사의 성장과 가치창조’를 추구한다기보다는 건전한 기업에 뛰어들어 마음껏 분탕질해 주가를 최대한 끌어올린 다음 고액의 배당을 요구하고 자산 매각 등을 요구하며 이사진을 자신들이 원하는 인사로 교체할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러한 헤지펀드들의 널리 알려진 기업공격 및 경영권 간섭 사례로, 한국에서는 소버린 vs SK(주), 칼 아이칸 vs KT&G, 엘리엇 vs 삼성물산 & 제일모직 등의 사례가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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