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전쟁 70주년 연속기획Ⅰ] 스탈린, 1950년 2~3월부터 6·25 남침전쟁 대북군사지원 본격화
[ 6·25전쟁 70주년 연속기획Ⅰ] 스탈린, 1950년 2~3월부터 6·25 남침전쟁 대북군사지원 본격화
  • 송종환 미래한국 발행인·경남대 석좌 교수
  • 승인 2020.07.02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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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이 한국전쟁 개시 승인을 하면서 중국을 개입시킨 것은 1949년 12월 마오쩌둥이 새로운 중·소 동맹조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다.
스탈린이 한국전쟁 개시 승인을 하면서 중국을 개입시킨 것은 1949년 12월 마오쩌둥이 새로운 중·소 동맹조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다.

스탈린은 자신이 선택한 시기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1950년 2월과 3월 중 북한 내 전쟁준비를 감독하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중국과 협의한 후 2월 9일 “군사적 방법으로 통일을 달성하겠다”는 평양 측의 의도에 적극 찬성하는 의사를 표명하면서 한반도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의 준비를 시작해도 좋다고 허락을 했다. 그후 소련은 북한을 향해 탱크, 탄약, 군 장비, 대포, 의약품 및 석유 등을 적극적으로 공급하기 시작했다.

2월 4일 김일성은 북한의 7개 사단에 추가해 창설한 3개 보병사단용 무기 구입을 위해 1951년 소련의 대북한 차관을 1950년 중에 사용할 수 있도록 스탈린의 허가를 구해줄 것을 스티코프 대사에게 요청하고 3월 9일 추가로 1억2000-5000만 루불 상당의 무기 구입을 요청하는 공한을 스티코프 대사를 통해 소련 정부에 송부했다.

이에 대해 소련 측은 3월 12일 비신스키 외상이 스티코프 대사에게 보낸 전문과 3월 18일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보낸 메시지를 통해 이를 동의했다. 또한 스탈린은 2월 23일 스티코프 대사가 겸직하고 있던 북한 인민군 군사고문단장에 2차 세계대전의 전쟁 영웅 바시리에프 중장을 임명했다.

남침 승인 유보에서 긍정적으로 바뀐 스탈린의 의사가 전달되자 김일성은 북한 정권의 2인자인 박헌영을 대동하고 소련을 방문했다. 러시아 정부가 한국 정부에 제공한 소련 측 비밀문서는 김일성과 박헌영이 1950년 3월 30일 평양을 떠나 모스크바를 방문한 후 4월 25일 평양으로 귀환했음을 밝히고 있지만 상세 모스크바 체류 일정과 스탈린과의 대화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스탈린, 소련 손익 면밀히 계산 후 6·25 남침전쟁에 마오쩌둥 끌어들여

그러나 스탈린과 김일성 간의 대화 시 스탈린이 강조한 내용은 김일성이 5월 13일부터 16일까지 중국을 방문해 남한 공격에 대한 스탈린의 방침을 설명하자 마오쩌둥이 이를 확인하는 전문을 스탈린에게 보내고 스탈린이 이에 답변을 해주는 5월 14일자 전문에 나타나 있다.

스탈린은 “1950년 4월 모스크바 회담에서 김일성에게 국제환경이 변하고 있다”면서 “북한의 통일과업 개시에 동의하지만 이 문제의 최종 결정은 중국과 북한이 함께 내려야 하며 만일 중국 측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뤄질 때까지 이 문제의 결정을 연기하자고 제의하여 북한 측과 합의했다”고 하면서 김이 마오쩌둥에게 설명한 내용을 확인해줬다.

스탈린은 김일성이 끈질기게 남침 승인을 요청했기 때문에 승인을 한 것이 아니라 1949년 수차에 걸친 김일성의 남침 승인 요청을 거부했던 것처럼 당시 국제정세와 한국전 개전 시 소련의 손익을 면밀히 계산한 기초 위에 남침을 승인하는 결정을 내렸다.

스탈린은 1949년 기간 동안 계속 김일성의 남침 승인 요청을 거부하고 10월 이후에는 38선에서의 무력 충돌이 전면전으로 비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스티코프 대사에게 “김일성을 철저히 감독을 하라”고 수차례 지시했다. 그런 스탈린이 태도를 바꿔 1950년 1월 30일자 전문에서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게 된 이유를 밝히는 자료로서는 상기 5월 14일 스탈린이 마오쩌둥에게 보낸 전문에서 언급한 ‘변화된 국제환경’에 대한 스탈린 자신의 설명을 수록한 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러시아 대통령실 문서고에 소장되어 있는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에 관한 소련공산당 국제부 보고서는 스탈린이 ‘변화된 국제환경’은 “1949년 8월 소련의 원자탄 보유, 10월 중국공산당의 승리, 1950년 1월 중 구체화되어 가고 있던 중·소 우호, 협력, 상호 원조조약(The Treaty of Friendship, Alliance, and Mutual Assistance, 이하 중·소 동맹조약으로 약칭)의 체결로 중국이 북한을 도울 수 있고 또 미국이 아시아 지역에서 공산주의에 도전하는 데 더 주저하게 될 것”이라고 김일성에게 설명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1월 12일 한국이 미국의 방위선 밖에 위치한다고 한 애치슨미 국무장관의 선언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다.

소련의 대중국 관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변화된 국제환경’만을 언급한 스탈린의 말을 고지식하게 믿는 것은 그의 진의를 간과하는 것이다. 스탈린은 남침전쟁에 대해 김일성보다 마오쩌둥과 먼저 협의했다. 1949년부터 12월부터 1950년 2월 마오쩌둥의 모스크바 방문 후반기에 북한의 남한 공격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토의를 했다는 몇 가지 증거들이 있다.

전사(戰史)학자로 옐친 대통령의 군사고문과 국가문서관리위원장을 지내면서 소련 비밀문서 공개 시 중요한 역할을 한 볼코고노프 장군은 마오쩌둥의 모스크바 방문 시 스탈린과 1950년 초 여름이 대만과 한반도 문제를 완전히 결정짓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는 데 의견일치를 봤다고 주장했다.

북한 공군의 미그-15 전투기. 스탈린은 미그-15 전투기 124대로 구성된 1개 항공사단을 보낼 것을 약속하고실 제로 압록강 상공에서 항공지원을 했다.
북한 공군의 미그-15 전투기. 스탈린은 미그-15 전투기 124대로 구성된 1개 항공사단을 보낼 것을 약속하고 실제로 압록강 상공에서 항공지원을 했다.

스탈린이 김일성의 6·25 남침전쟁을 승인하고 중국 참전을 유도한 이유

1950년 1월 30일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전쟁을 승인할 의사를 보이고 중국을 끌어들여 지원한 이유가 무엇일까에 대해 검토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김영호 성신여대 교수는 한국전쟁의 원인을 스탈린의 롤백전략(rollback strategy)에서 찾는다. 이 롤백이론은 스탈린이 냉전 개시 이후 최초로 중국공산혁명으로 공산세력 팽창이 유리하게 전개되는 전략적 상황과 북한 지도부의 무력통일론을 이용해 자신의 세계 전략적 목적을 달성을 위해 북한군으로 하여금 미국의 봉쇄선을 대담하게 넘게 해 한반도 전체를 소련 영향권에 편입시키려고 6·25전쟁을 일으켰다고 주장한다. 스탈린은 이 롤백전략에 의해 만일 미국이 만주로 침략해올 경우 중·소 동맹조약을 발동해 광활한 황무지인 만주로 미국을 끌어들여 패배시킴으로써 냉전 대결에서 결정적 승기를 잡고자 했다는 것이다.

마셜 슐만은 소련은 중국이 소련의 참전 여부와 상관없이 남침전쟁 참전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북한에서의 지배적 위치를 잃을 것을 우려해 김일성의 남침전쟁 개시 간청을 승인했다고 주장한다.

아담 울람은 “스탈린이 남한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기 위해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한국전쟁이 일어나면 마오쩌둥이 중국 대륙에서 새로운 내전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소련의 지원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을 예견하고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의 후견적 지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할 목적으로 소련 측이 일으킨 전쟁”이라고 주장한다.

스탈린이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지만 한국전쟁을 승인한 진정한 전략적 목표는 그의 중국관에 입각한 세계전략과 관련이 있다. 스탈린은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2000만여 명의 소련 인민의 사상자를 냈고 전후 경제 재건을 위해 미국과의 대결이 예상되는 북한의 남침전쟁에 직접 개입할 수 없다는 구구한 변명을 내세워 남침전쟁 개시 시기 결정 때부터 중국을 개입시키고 유엔군의 9월 인천상륙작전 후 북한 붕괴 상황에 이르자 북한을 포기한다는 마지막 카드를 제시해 중국의 참전 지원을 극적으로 유도했다.

뒤에 상세히 논술하겠지만 스탈린이 한반도의 전장에서 중공군이 현대전을 연구할 것을 권고하면서 휴전협상을 장기화시켜 중국 측의 희생을 강요한 것을 보면 스탈린은 1921년 창당한 중국공산당이 1949년 10월 그의 예상 밖으로 조기에 공산혁명을 달성하자 중국공산당 창당 이후 견지해온 마오쩌둥에 대한 의구심과 아시아에서의 제2 티토 등장 가능성에 대한 우려에서 중국을 약화하려는 의도로 한국전쟁을 일으켜 중국을 개입시킨 것으로 판단된다.

한국전쟁 발발 후 브라이언 베이징 주재 영국 영사가 “조선전쟁은 중국이 대만을 점령하고 강대국이 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특수한 목적 하에 소련에 의해 개시된 것”이라고 지적한 것은 상기와 같은 스탈린의 중국 약화 의도를 제대로 파악, 관찰한 것이다.

또한 스탈린은 한국전에 중국을 개입시킴으로써 중국과 서방과의 연계를 차단하고 중국을 확실히 소련의 영향권 하에 묶어두려는 것도 고려했을 것이다. 스탈린이 한국전쟁 개시 승인을 하면서 중국을 개입시킨 것은 1949년 12월 마오쩌둥이 새로운 중·소 동맹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여러 가지 이유로 동 조약 체결에 긍정적 반응을 보이지 않던 스탈린이 1950년 1월 영국과 인도가 중국을 승인하자 태도를 바꿔 조약 체결에 응한 것처럼 중국의 대서방 관계 개선을 경계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스탈린은 위와 같은 전략적 의도에서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한 경우 소련이 직접 싸우지 않고 중국을 내세우기 위해 마오쩌둥과 한반도 전쟁을 개략적으로 합의한 후 김일성에게 중국 동의 조건부 전쟁 개시 승인을 했으며 개전 이후에는 중국을 한국전에 끌어들이기 위해 필사적 노력을 했다.
 

스탈린, 전쟁 중 구체적 작전 지시까지 하면서 중공 지원군 공중엄호 약속

BBC 방송은 1994년 러시아에서 북한 인민군의 작전 동향과 개전 초기인 1950년 6월 25일과 26일 대남 공격 상황을 상세히 밝힌 보고서를 발굴했다. 스티코프 대사가 26일 당시 소련 군총참모부 차장으로서 북한의 남침 작전을 지휘 감독하고 있던 자하로프 장군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주목된다.

‘북한 인민군 총참모부가 소련 군사고문단들과 수립한 작전계획에 의거, 인민군들은 6월 12일부터 23일까지 38선 인근 지역으로 집결을 완료하고 공격지점에 배치되었다. 사단급 작전계획과 정찰은 소련 군사고문관의 참여 하에 진행되었다. 대남 공격을 위한 모든 준비는 6월 24일까지 완료되었다.

6월 24일 사단장들은 공격 일시에 대한 명령을 받았다. 남한군이 38선을 넘어 군사적 도발을 해왔기 때문에 반격을 명한다는 국방상의 명령이 전군에 낭독되었고 인민군 장교와 병사들은 이 명령을 열렬히 환영하는 반응을 보였다. 군사작전은 6월 25일 새벽 4시 40분에 시작되었다. 북한의 지휘참모부는 전투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최전선에서 소련 군사고문관들이 철수하자 전투지휘는 매우 서툴렀고 특히 전투에서 포와 탱크를 유용하게 사용하지 못하고 작전명령 하달을 위한 통신체계도 제대로 운용하지 못했다.’

이 보고서는 소련이 작전계획 수립에 참여하고 일선에 소련 군사고문관들을 일선에 배치했다가 남침 개입 사실을 숨기기 위해 개전 직전에 철수시키는 등 6·25전쟁에 깊숙이 관련되었음을 밝히는 증거이다. 특히 스탈린은 미국의 감청(監聽)을 의식해 6월 22일부터는 암호 전문을 모스크바로 보내지 않도록 평양주재 소련대사관에 지시할 정도로 치밀하게 움직였다.

인민군이 38선을 돌파한 지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자 스탈린은 평양주재 스티코프 대사에게 보낸 전문을 통해 인민군이 서울 점령한 후 지체하지 말고 곧장 남진(南進)할 것과 전쟁 수행에 필요한 탄약을 필요한 군수품을 7월 10일까지 원조하겠다는 자신의 의사를 김일성에게 전달토록 지시했다.

스탈린은 한국군과 유엔 안보리 결의로 참전한 유엔군의 반격 특히 미군기의 공습으로 전세가 북한군에 불리하게 되자 중공해방군의 참전을 중국공산당 지도부에 촉구했다. 1950년 7월 5일 스탈린은 중국 주재 로신 대사를 통해 저우언라이 외상에게 전문을 보냈다.

스탈린은 동 전문에서 “적군 (한국군과 UN군)이 38선을 넘게 될 경우 북한군을 돕기 위해 중공군 9개 사단을 한·만 국경지대에 집결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이들에 대한 공중 엄호를 약속했다. 이어 7월 13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내는 전문에서 중공군 9개 사단 엄호를 위해 제트기 124대로 구성된 1개 항공사단을 보낼 것을 약속하고 2-3개월간 중국 측 조종사 훈련과 훈련 후 장비 이전을 통보했다.

중국이 쉽사리 응하지 않자 스탈린은 8월 27일 저우언라이에게 보낸 전문을 통해 “중국이 요청한 38명의 공군 및 대공방위 소련 군사고문관들을 중국에 보내겠다”고 밝혔다. 이후 스탈린이 약속한 대로 중국에 파견된 소련 군사고문관들과 장비들은 중국 공군 창설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자 스탈린은 이 상륙작전의 전략적 중요성을 간파하고 9월 18일 낙동강 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인민군 3개 사단을 서울 인근으로 재배치하라는 작전계획을 바실리예프 군사고문단장과 스티코프 대사를 통해 전달하고 동 작전계획 이행 점검을 위해 자하로프 장군을 단장으로 하는 특별대표단을 평양으로 파견했다.

송종환
미래한국 발행인·경남대 석좌 교수
전 파키스탄 대사
전 유엔대표부·미국대사관 정무공사
전 안기부 해외정보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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