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원로 - 백인제(白仁濟 박사)
내가 만난 원로 - 백인제(白仁濟 박사)
  • 미래한국
  • 승인 2002.10.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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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재산 기부 최초의 민립병원 설립
백인제 박사는 나의 백부가 되시는데, 아버지가 지방에 있던 관계로 나는 큰아버지댁에서 학생시절을 보냈기에 특별한 사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정도 많이 들었다. 내가 의과대학을 선택한 것도 백부의 권유가 있었기 때문이었고, 70년동안 딴 길 한번 안가고 한우물을 팔 수 있었던 데에는 백인제박사의 영향이 컸다. 늘상 검소한 생활태도를 보이시고 틈만나면 책을 읽으셨는데, 나의 기억속의 백인제 박사는 삶을 더 깊이 있게 살려고 노력하시는 모습이다. 내 고향 평북 정주는 늘상 풍년이 드는 넉넉하고 민심좋은 농어촌이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부터 많은 인물이 배출된 지역이다. 조선 말기에는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새로운 문물과 기독교의 전파로 인해 서양문화도 일찍 들어와 개화가 남쪽보다 빨랐고 많은 선각자를 배출하기도 한 지역이었다. 특히 기미독립선언 33인 가운데 이승훈, 이명룡, 김병조 세 사람이 정주출신이었고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정주 오산학교는 특히 많은 애국항일투사를 배출하였다. 백인제 박사도 오산학교 출신으로 감수성 예민한 중등학교 시절의 경험이 인생의 진로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신민회는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으로 국권회복을 위해 신교육이 필요함을 계몽하여 학교를 세웠고, 오산학교에서도 이러한 정신으로 교육의 질적향상과 민족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을 펼쳤다. 백박사는 오산중학 재학시절부터 한 번도 수석을 놓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졸업 후 경성의전에 수석으로 합격, 졸업한 당대의 수재였다. 3·1 운동 당시 만세사건에 가담해 옥고를 치렀고 식민지하에서도 반일애국운동에 앞장선 선각자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동경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독일에 두 번이나 유학하고 귀국하여 1928년 6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성의전의 외과 주임교수를 맡게 됐다. 당시 약관 스물 아홉의 나이었다.외과의사로서 백인제박사의 명성은 전국 방방곡곡에 널리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멀리 일본이나 만주에서까지 환자들이 찾아왔다. 이광수와 같은 저명인사로부터 일반 민중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가 없었다. 한 번은 진주에서 26세의 청년이 경부임파선결핵을 선생님께 수술받기 위해 입원했다. 당시 항결핵제가 없어서 수술도 난제였고 본래 백박사도 이 수술을 싫어해 다른 의사에게 수술을 맡기고 슬며시 수술장 밖으로 나가셨다. 선생님이 나간 줄 안 환자는 큰 소리로 “수술을 중지하라”며 “내가 논밭 팔아가지고 서울까지 온 것은 백박사에게 수술을 받으러 온 것”이라며 고집해 결국 3일후 임상강의를 겸한 수술로 성공리에 수술을 마쳐 귀향하게 된 일도 있었다. 백인제 박사는 외과 기술에 있어서 만큼은 말 그대로 ‘당대 최고’였다. 당시 자율적으로 자영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의사밖에 없었다. 의술로서 세상을 구한다 뜻을 가진 인술제세(仁術濟世)는 백인제박사의 꿈이었고, 이 꿈은 현재 인제대학의 교훈인 인덕제세(人德濟世)로 이어지게 된다. 1941년 백인제외과의원이라는새로운 간판으로 진료를 시작했다. 경성의전 당시의 은사였던 우에무라교수의 병원을 인수한 것이었다. 백박사는 한국에 미국의 유명한 병원인 Mayo Clinic과 같은 병원을 세우고자 하였다. 워낙에 실력이 있는지라 해방전후로 백인제 세글자는 삼척동자도 다 알 정도로 유명해졌다. 일본과 만주에서까지 환자들이 몰려오고 좁은 병원은 환자들로 가득차 공간이 없을 정도였다. 병원은 날로 번창해 5년동안 엄청난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1946년 12월 백박는 그 동안 마련한 전 재산을 기부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민립 공익법인을 설립했다. 이것이 재단법인 백병원이다. 19세기 말, 미국의 철강재벌 카네기가 미국 최초로 재산을 사회에 환헌코자 카네기 재단을 설립해 소외된 국민들의 교육과 복지에 이바지했듯이, 재단법인 백병원도 카네기 재단에 필적할 만한 일로서 인술제세(仁術濟世)의 높은 뜻을 실현하기 위한 첫 발걸음이었다. 의학연구와 교육, 특히 교육을 통해서 나라와 겨레를 구할 인재를 양성한다는 것은 재단법인 백병원의 목표가 되었다. 한국전쟁으로 백인제박사와 가친 백붕제 변호사가 공산당에 의해 납북되고 그 후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신식 병원들과 경영난으로 인해 백병원은 존립자체가 위태롭게 됐다. 그러나 설립자의 높은 뜻이 있었기에 김희규 박사를 위시하여 故윤덕선(尹德善, 한림대 설립자), 故전현오(全鉉五), 신현구(申鉉球) 그리고 가장 나이 어렸던 본인이 가담하여 백병원 재건에 온 힘을 기울이게 되었던 것이다. 납북된 두 분 모두 유명을 달리하셨다는 소식은 2000년 6월 특별수행원으로 남북정상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을 향하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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